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가시밭에 핀 백합화 (아 2:1~2)

  • 잡초 잡초
  • 785
  • 0

첨부 1


가시밭에 핀 백합화 (아 2:1~2)


파란만장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만큼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다는 뜻입니다. 지난 103년의 세월을 지내온 성결교회의 한걸음 한걸음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1907년 5월 30일 바로 성결교회의 생일입니다. 일본의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과 정빈이라는 두 분이 미국 동양선교회의 설립자인 카우만 부부와 길보른 선교사와 함께 한국에 도착해서 종로 염곡 지금의 무교동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날이 바로 이 날이요 이것이 한국 성결교회의 시작입니다. 

김상준은 원래 평안남도 용강군 출신으로 평양 거리에서 노방전도 하는 사람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인 유교 가정이었던 가족들에 의해 멍석말이라는 핍박을 당하고 겨우 살아난 그는 일본으로 와서 동경 성서학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빈은 황해도 사람입니다. 그는 북장로교회의 선교사인 사무엘 모어의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연동교회의 성도로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기독교의 진리를 더 깊이 깨닫기를 원해서 일본의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미국에서 세속화되어 가던 교회들이 참된 신앙을 회복하자고 하여 성결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며 뜨거운 선교 열정에 불타게 된 사람들이 세운 선교 단체 중 하나가 미국의 동양선교회입니다. 이들은 맨 먼저 일본에서 선교를 시작했고 그 결과 동경성서학원을 세우게 되었던 것인데 여기에 김상준과 정빈 두 분이 입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성결교회가 장로교나 감리교보다 크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성결교회는 장로교와 감리교보다 약 25년 늦게 출발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로교회는 네 개의 큰 선교단체가 시작을 했고 감리교회는 두 개의 큰 선교단체가 시작한데 비해 성결교회는 개인이 만든 작은 선교 단체가 그 출발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결교회가 성서중심의 교단이기 때문입니다. 1907년 처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교회가 세워지기도 전에 1911년 경성성서학원 오늘의 서울신학대학교를 세워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이 우리 성결교회입니다. 그것은 성경만이 신앙의 기준임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라는 전도 표제를 내세워 강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재림의 교리가 일본의 통치 이념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일제 말에 교단이 해산당하기까지 했었습니다.

둘째로 성결교회는 전도 중심의 교단입니다. 성결교회의 원래 이름은 복음전도관이었습니다. 그만큼 전도를 중요시했습니다. 성결교회의 본래 목적은 큰 교단을 만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고자 하는데 온 마음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주일 오전에는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나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전도된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저녁예배를 드렸습니다. 경성성서학원에서조차 오전에는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나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오직하면 초창기 표어를 보면 전도는 우리의 전공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처음부터 성결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나가서 전도하고 그들로 하여금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한 뒤 기존 교회로 보내어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어주었습니다. 

셋째로 성결교회는 체험중심의 교단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단지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적인 삶의 현장에서 체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사모했고 성령의 은사를 통해 뜨겁고 열정적인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뜨거운 열정으로 함께 예배하며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마음에 결국에는 따로 모여 예배하게 된 것이 성결교를 구성하게 되었던 것이요 그래서 성결교회 하면 열정 있는 교회로 통했습니다. 

넷째로 순수한 신앙을 강조하는 교단입니다. 기독교와 함께 들어온 서구문화는 이 땅에 세속화를 가져왔습니다. 그 결과가 도덕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고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생각들로 넘쳐나게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성결교회는 순수한 신앙 안에서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은혜로 살아가기를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 안에서 먼저 남을 섬기는 순수한 신앙을 강조합니다. 이는 곧 은혜 안의 질서입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먼저 하나님과 이웃을 섬겨나가는 신앙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이를 위해 항상 자신을 살펴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기에 어찌 보면 그만큼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결교회의 상징 마크도 가시밭의 백합과입니다. 가시밭에서 자라는 한 송이 백합화 그래서 가시에 찔려가면서 오히려 더 짙은 향기를 발하는 가시밭의 백합화처럼 그렇게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것이 우리 성결교회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라고 한 이 말씀이 성결교회의 상징을 잘 나타내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시는 곧 세상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은 결코 옥토가 아닙니다. 가시밭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결심을 방해합니다. 그 안에서 자라는 것들로 열매 맺지 못하도록 온갖 훼방을 다합니다. 가시는 곧 핍박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도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며 시기하며 알게 모르게 집적대고 힘들게 하고 있습니까? 그것뿐이 아닙니다. 우리로 낙심하게 만드는 일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은혜를 받아 기뻐함도 잠시뿐이고 우리에게 닥쳐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로 인해서 주저앉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세상과 같은 족속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가시라면 우리는 백합화입니다. 그리고 온갖 가시로 가득하기에 그 가운데서 피어나는 백합화는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온갖 가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 가시에 찔려가면서 오히려 더 아름답게 피어나는 백합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가시에 찔리기에 향기는 더 짙게 풍겨나는 것입니다. 골짜기 가운데 단 한 송이만으로도 향기 진동하는데 거기에 가시에 찔리기까지 하면서 피어내는 그 향기야 말로 향기 진동하도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곧 너희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내게 속했기 때문이며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기 때문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합니까? 왜 세상이 우리에게 가시 역할을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세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소속은 이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잠시 머무는 나그네일 뿐이요 우리의 원 소속은 하나님의 나라이기에 그러기에 우리의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이 그리고 살아가는 것이 세상과 다른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우리를 미워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세상은 사단에게 속해 있고 우리는 하나님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먼저 나를 생각합니다. 남을 잘 되기를 그들도 바랍니다. 하지만 이왕이면 내가 먼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앞서 가는 사람을 넘어뜨려야 하고 잡아채서 뒤로 내팽개쳐야 마땅합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누구에게 좀 무시를 당했다 싶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는 무시해도 좋지만 결코 무시는 당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나는 좋게 포장하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은 흠집을 내려고 합니다. 그래야 내가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합화는 결코 남을 해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가시에 찔려 아파하면서도 아프다고 하기보다는 그러기에 더 짙은 향기를 내뿜습니다. 그 아픔을 더 짙은 향기로 바꾸는 백합의 사랑과 백합의 지혜가 그러기에 우리들에게도 필요합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고 누가 나를 무시하고 누가 나를 서럽게 한다고요? 그러기에 더욱 그들에게 더 큰 사랑과 관심과 격려와 축복을 아끼지 않는 우리가 될 때 그것이 진정 가시밭의 백합화가 아니겠습니까? 결국은 가시노릇을 하면서도 그 향기에 흠뻑 젖을 수밖에 없는 것이 가시밭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백합화가 지니고 있는 특색이 무엇입니까? 
백합화의 첫 번째 특색은 결백입니다. 

깨끗함이 백합화의 상징입니다. 성결은 곧 깨끗함입니다. 순수한 마음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이 얼마나 추하고 역겹습니까? 마치 먹었던 음식물을 토해 놓은 것처럼 역겹기만 한 그런 세상입니다. 더러운 냄새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보기에도 역겨운 세상입니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세상입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 그런 세상입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을 껴안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시밭의 백합화 가시에 찔리고 또 찔리는 백합화로 보이지만 오히려 우리는 그 모습마저도 자시를 끌어안고 있는 백합화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나를 힘들게 하는 가시일망정 나는 그들을 끌어안는 백합화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결코 내 안에 가시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내 안에 가시가 있다면 어찌 그것이 백합화일 수 있겠습니까? 성결이란 또 다른 말로는 구별입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비록 가시로 뒤덮여 있어도 그 가운데 백합화는 눈에 확 띄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봐도 다릅니다. 결코 이악스럽지 않고 어찌 보면 그렇게 찔리면서도 아프다 소리 한 마디 하지 않는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짙은 향기를 뿜어내는 백합화처럼 그렇게 그들이 우리의 순수한 사랑에 물들고 스스로 부끄러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도록 피어나는 순백의 아름다움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백합화의 두 번째 특색은 겸손입니다.
백합화는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 모습으로 피어납니다. 결코 고개를 바짝 들고 자신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항상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이는 결코 자신을 자랑하지도 않고 주님께만 영광 돌리는 모습입니다. 나는 죽고 오직 그리스도만 내 안에서 존귀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고백하던 바울 사도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향기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기는 것을 더 기뻐합니다. 주님이 주와 선생이 되어 오히려 제자를 섬기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였던 것처럼 그렇게 섬기며 영접하기를 기뻐합니다. 

오히려 누가 나를 무시했다고 속상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기에 그 사람을 더 겸손함으로 섬겨나가는 그러한 아름다움이 바로 백합화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겸손은 순종으로도 나타납니다. 주님의 명령 앞에 항상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주님의 말씀 앞에 예 하고 고개를 숙입니다. 그것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언제든지 내 생각보다는 주님의 생각이 우선입니다. 일단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거기에 다른 이유도 다른 핑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하고 아멘 할 따름입니다. 가슴이 터지도록 아프다고요? 그래서 백합화입니다. 그 아픔조차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겸손이요 순종입니다. 가시에 찔리기에 더 짙은 향기를 발하는 백합화처럼 나를 아프게 찔러대는 그들을 향해 더 순수하고 화사한 웃음을 피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나를 찔렀는데 오히려 나에 의해 감싸임 되는 그런 섬김이 바로 고개 숙인 모습 곧 겸손이요 순종입니다. 
백합화의 세 번째 특색은 향기입니다. 

단 한 송이로도 온 골짜기를 진동하게 하는 향기로 가득한 백합화입니다. 화장은 곧 돋보이게 하기 위한 포장입니다. 나를 더 잘 보이도록 합니다. 하지만 백합화는 속에서부터 향기를 뿜어냅니다. 결코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향기로 온 골짜기를 다 향기롭게 만들어나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 속으로부터 향기를 뿜어내야 합니다. 그 향기는 곧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골짜기 가운데 백합화가 보이지 않아도 그 향기만으로 백합화의 존재를 알듯이 우리는 몰라도 나를 통해서 풍겨나는 예수님은 알도록 그리스도의 향기가 내 안에서 풍겨나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일어야 합니다. 무언가 가슴에 와 닿는 훈훈함이 무엇인지 그 알 듯 알 듯 모르겠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임을 깨닫도록 만들어주는 향기가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밝고 환한 웃음인 것이여 내게서 보여지는 참된 기쁨과 평안함입니다. 누구든 나와 함께 있으면 편안함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되는 그런 향기 그런 은은함으로 가득한 모습이 곧 백합화로서의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백합화의 네 번째 특색을 아름다움입니다. 

새벽안개 속에 이슬을 머금은 순백의 백합화를 보십시오. 물론 활짝 피어나는 순백의 모습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이윽고는 시들러가는 그 모습조차도 어찌 보면 추해보일 수밖에 없는데도 오히려 눈길을 사로잡는 그 아름다움이 바로 백합화의 아름다움입니다. 피어날 때뿐 아니라 시들어가면서 조차도 그 눈길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은 결코 꾸며진 것이 아닙니다. 이는 곧 사랑으로 가득한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보여지는 아름다움이어야 합니다. 사랑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사람을 베풀고 사랑을 나누고 그러기에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사랑으로 가득한 행복에 겨운 아름다움이 바로 백합화가 상징하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미워하려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사랑으로 가득한 삶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이어야 하고 우리 교회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런 귀한 백합화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문제는 이 백합화가 가시밭에 있다는 것입니다. 가시는 결코 백합화가 온전히 피어나도록 놔두지를 않습니다. 온갖 가시로 찔러댑니다. 그래서 많은 상처도 생깁니다. 그만큼 고난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련 가운데서 백합화는 더욱 아름다운 빛을 발합니다. 분명 가시에 찔린 모습입니다. 심지어는 찔리다 못해 찢기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래서 추해 보여야 하는데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기에 더욱 아름답습니다. 그 가운데서 피워내는 향기가 진동합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뭉클합니다. 나는 한없이 못살게 굴고 힘들게 만들었는데도 여전히 밝은 웃음을 잃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면서 찡그리기만 하던 얼굴이 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 더 이상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미워해야 마땅하다고 고개를 흔들어도 마음으로는 이미 더 이상 미워할 수가 없어 하고 항복하게끔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저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간구하시던 십자가의 사랑 주와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그 사랑이야 말로 가시밭의 백합화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스러운 성결교인들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은혜 가운데 오늘을 살아가는 가시밭의 백합화와 같은 귀한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