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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동체의 화평과 화목 (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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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화평과 화목 (빌 4:4~7) 
 

우리는 날마다 사람들과 어우러져 그 틈바구니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관계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울기도고 웃기도하고, 불행해하기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소유에서 행 불행이 오는 것보다 관계에서 행 불행이 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관계가 좋으면 행복합니다. 교회에서도 성도들이 좋은 관계를 맺고 신앙생활할 때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가고싶고, 교회가 가면 오래 머물고 싶고, 밖에 나가면 교회를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때 행복합니다.그러므로 관계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관계의 기술은 다른 것이 아니라 관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들이 화평하게 살고 모든 공동체가 평화하는 방법, 그리고 행복하게 살수 있는 방법을 본문 말씀을 통해서 교훈하고 계십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만일 사람들이 관용이 없이 상대방을 비판하고 욕하고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 것입니다(갈5:15). 피차 불행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관용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생활방식입니다. 혼자 살려면 관용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어우러져 살려면, 서로가 관용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관용은 인간관계에 병이 나기 전에 치유받는 길입니다. 병은 발생하기 전에 미리서 치유해야 비용이 적게 들고 깨끗이 치유되는 것입니다. 

관용은 공동체의 화평과 화목을 위해서 치루어야 할 값진 댓가인 것입니다. 공동체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이자 선물이지만 언제든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관용의 댓가를 치룰때 공동체는 보존되는 것이며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요즈음 서울 서남부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난 강력사건 중에 사건하나가 해결되었습니다. 범인을 잡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범죄의 이유가 "지나가는데 상대가 째려보는 것같아서 욱한 마음에 죽여버렸다"는 것입니다. 째려만 보아도 살인하는 세상입니다. 욱하면 죽이는 세상입니다. 요즈음 세상이 이렇습니다. 마음은 점점 둔해지고 강팍해지고 좁아지고 있습니다. 점점 더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로 변해가고 다른 사람들을 품지 못하는 좁은 가슴을 안고 사는 모습을 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질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가슴에는, 우리 사회에는 관용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용입니다. 관용이란 자기와 다른 사람을 품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과 다르지만 받아주는 것, 틀리지만 품어주는 것, 잘 맞지 않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끌어안아 주는 것, 이것이 관용이라는 것입니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 다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다운 것은 바로 관용하는 것입니다. 사람다움의 큰 그릇은 다른 사람의 모자람을 얼마나 관대하게 용납해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누가 어른 입니까? 누가 큰 자입니까? 관용하는 사람입니다. 관용의 분량이 그 그릇의 크기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관용은 우리가 이만큼 일것이라고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관용'은 손해나 역경을 당해도 쉽게 동요되거나 넘어지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영적인 인내'를 가리킵니다. 또한 이것은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향해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당할 수 있는 모든 손해는 다 당하고 살았습니다. 법적으로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했습니다.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하고, 자녀들이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기도 하고, 때로는 살고 있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정처 없이 유랑생활을 해야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심지어 끌려가서 모진 매를 맞고 남모르게 죽임을 당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자기를 핍박하고 괴롭히는 사람을 향해 적의를 품거나 분노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용서하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태도를 관용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자신과 특수한 관계에 있는 가족에게는 얼마나 더 많은 관용을 실천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성도들은 자기 가족들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은 혼자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가족간에 관용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가족이니까 괜찮거니 하는 것은 큰 화를 부를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살과 피를 나눈 혈육의 관계가 가족입니다. 따라서 가족만큼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끝까지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가족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익이 있을 때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유익이 사라지면 관계도 끝납니다. 그러나 가족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이야말로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동안 좌절하지 않도록 항상 새 힘과 위로를 공급받으며, 마음에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요 선물입니다. 
  
가정에서 사랑하는 자녀들, 아내, 남편, 부모, 형제들을 한번 둘러보십시기 바랍니다. 내가 관용하지 못해서 상처 받고 있는 가족은 없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말씀대로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남편에게 내가 예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내 마음이 얼마나 넓은가를 보여줘야 합니다. 아내에게 보여주십시오. 자녀에게 보여주십시오. 나를 미워하는 가족들에게 그 넓은 마음을 보여주십시오. 그럴 때 우리가 살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교회 안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우리는 관용을 보이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 환경은 잘못하면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여지가 많은 환경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실적으로 교회 안에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그것은 성도 상호간에 기대치는 큰데, 그 기대치만큼 우리가 성숙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우리가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부패한 인간의 악한 본성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일하고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아야 하지만 세상에 머무는 동안 여전히 육신으로 일하고 자기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합니다. 이로 인해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갈등하면서 잘못하면 등을 돌릴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이런 약점이 있음을 알고 서로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한 성도라고 완전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성직자인 목사에게도 완전을 기대하면 안됩니다. 교회의 이런 저런 직분자들에게 완전을 기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고 중생 받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룩한 친 백성이 되긴 했지만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약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 그것이 노출될 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가려는 소원이 있지만 결코 쉽지 않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상처를 입을 수는 있지만, 거기에 오래 동안 매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사랑과 용서의 능력을 가지고 위험한 감정, 해로운 감정에서 우리는 속히 벗어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거기에 얽매여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은혜를 구하면서 노력만 하면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기는 축복, 긍휼이 여길 수 있는 능력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증오를 극복하는 은혜를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회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관용을 실천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에게는 관용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관용을 실천하지 않을 때 세상사람들은 실망하게 되고 비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어떤 친한 사람 또는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관용하라는 게 아니고 나와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관용함을 알게되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모든 사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라면 그 모든 사람들 속에는 나를 미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나를 사사건건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나를 원수시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도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들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게 없습니다. 관용하기가 쉽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신앙의 사람들이지만  관용이 쉽지 않다는 것을 주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이이기에 우리들이 관용할 수 있는 방법을 관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가정에서, 교회에서, 세상에서 관용하는 자가 되기 위한 한 가지 비결이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5절 하반절에 "주께서 가가우니라"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관용은 우리가 그냥은 감당할 수 없는 어렵고 무겁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가깝다는 전제하에서는 관용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이 가까우시면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가깝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능히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모두 가깝습니다. 공간에 있어서 그분은 우리에게 매우 가까워 도와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며, 시간에 있어서도 가까이 계시며 곧 오십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억울해하고 인색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계심을 생각하면 관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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