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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이 끊어진 자리 (욥 4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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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끊어진 자리 (욥 40:1~14)


[주님께서 또 욥에게 말씀하셨다. 전능한 하나님과 다투는 욥아, 네가 나를 꾸짖을 셈이냐? 네가 나를 비난하니, 어디,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 그 때에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폭풍 가운데서 다시 말씀하셨다.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여라. 아직도 너는 내 판결을 비난하려느냐? 네가 자신을 옳다고 하려고, 내게 잘못을 덮어씌우려느냐? 네 팔이 하나님의 팔만큼 힘이 있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천둥소리 같은 우렁찬 소리를 낼 수 있느냐? 어디 한 번 위엄과 존귀를 갖추고, 영광과 영화를 갖추고, 교만한 자들을 노려보며, 네 끓어오르는 분노를 그들에게 쏟아 내고, 그들의 기백을 꺾어 보아라. 모든 교만한 자를 살펴서 그들을 비천하게 하고, 악한 자들을 그 서 있는 자리에서 짓밟아서 모두 땅에 묻어 보아라. 모두 얼굴을 천으로 감아서 무덤에 뉘어 보아라.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나는 너를 찬양하고, 네가 승리하였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겠다.]

• 이해할 수 없는 현실

교우 여러분, 얼마나 큰 충격을 받으셨습니까?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충격과 슬픔 속에 잠긴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긍휼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그는 학벌, 재벌, 낡은 이데올로기, 권위주의에 작은 틈을 만들기 위해 맞서 싸우다가 좌초한 분입니다. 그의 죽음은 앞으로도 국민적 트라우마로 남을 것입니다. T지난 수요일 욥기를 묵상하다가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게 되었는데, <말이 끊어진 자리>라는 설교 제목이 마치 뭔가를 예고한 것처럼 생각되어 가슴이 아픕니다. 말이 끊어진 자리, 그 자리는 욥이 처한 자리였고, 또 기가 막힌 현실 가운데서 마음 아파하는 모두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욥은 세상의 누구보다도 절망의 심연을 맛본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고,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던 사람입니다. 그는 늘 정의를 실천하고,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이에게는 눈이 되어 주고, 발을 저는 이에게는 발이 되어 주었습니다. 궁핍한 사람에게는 아버지가 되어 주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하소연도 살펴보고서 처리해 주었습니다. 고난 받는 사람을 보면, 함께 울었고, 궁핍한 사람을 보면 함께 마음 아파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단비처럼 기다렸고, 농부가 봄비를 기뻐하듯이 그의 말을 받아들였습니다(욥29장 참조). 그런데 그는 하루 아침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고, 사회적 명망조차 잃고, 친구들까지 잃었던 것입니다. 이해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는 현실 앞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실 뿐입니다. 

‘왜 내가 이런 불행을 경험해야 하는가?’ 탄식하는 욥에게 경건한 친구들은 욥의 숨겨진 죄 때문이라며, 그의 죄에 비하면 하나님의 징계는 오히려 가볍다고 말합니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입니다. 몸과 마음이 겪는 고통에 사회적 소외감이 더해질 때 사람은 땅을 딛고 일어설 힘을 잃게 마련입니다.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자기 삶의 든든한 토대라고 여겼던 하나님조차 낯선 분으로, 아니 괴물로 변해 버린 것 같은 현실입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왜?’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기다립니다. 그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시련을 주신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그는 하나님의 정의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기소하고 있는 셈입니다. 

• 유한성의 자각

어느 순간 주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그 첫 마디는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는 책망입니다. 하나님은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하라면서 욥을 다그칩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바다 속 깊은 곳에 있는 물 근원에까지 들어가 보았느냐? 죽은 자가 들어가는 문을 들여다본 일이 있느냐?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느냐? 네가 북두칠성의 별 떼를 한데 묶을 수 있으며, 오리온성좌를 묶은 띠를 풀 수 있느냐? 강물이 범람할 것이라고 알리는 따오기에게 나일 강이 넘칠 것이라고 말해 주는 이가 누구냐? 네가 굶주린 사자 새끼들의 식욕을 채워줄 수 있느냐? 

유구무언일 따름입니다. 자신의 고통에 사로잡힌 욥에게 하나님은 광대무변한 세상을 가리키고 계십니다. 그 무한의 세계 앞에서 욥은 자기의 작음을 절감합니다. 인간의 어떤 지혜로도 하나님의 신비는 온전히 파악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다그침에 욥은 타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4-5)

유한성의 자각입니다. 노자는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 도덕경 56장) 했습니다. 삶이 평안할 때 욥에게 하나님은 친숙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삶이 곤고할 때 하나님은 낯선 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바뀐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다른 면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께 자기가 겪는 고난의 이유를 묻자, 하나님은 그 물음에는 답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한계를 자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분이시지만, 또한 스스로를 숨기시는 분(deus absconditus)이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이사야도 “구원자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진실로 주님께서는 자신을 숨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사45:15)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숙한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해서라면 모를 것이 없는 것처럼 처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것이 너무 작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말이 끊어진 자리에서 욥은 자신의 작음을 절감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고통은 남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위의 사람들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을 마치 다 아는 양 처신하며 벗의 고난을 함부로 해석했습니다.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이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셨습니다. ‘해석’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compassion), ‘곁에 있어 줌’(being together)이야말로 예수의 실존이 우리에게 가리키는 방향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과연 예수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 광신을 경계함

오늘은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1703-1791)의 회심 271주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영국 런던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에서 열렸던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저녁 8시 45분경 그는 어떤 사람이 루터가 쓴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있다가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체험을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문지방을 넘는 체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롭고 쓸쓸하고 암담하던 곳에서 벗어나 빛의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내가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이론이 아니라 실재로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삶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그 체험 이후 웨슬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봉헌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재능과 열정 시간과 물질을 받으신 하나님은 그것을 영국사회를 변화시키는 밑거름으로 삼으셨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샀던"(행2:47) 것처럼, 웨슬리를 따르는 이들이 있는 곳에는 새로운 초대교회의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감리교회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 감리교회는 길을 잃고 있습니다. 길을 잃은 책임은 물론 목자를 자처하는 목회자들에게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정확하게 저 자신을 포함한 목회자들의 문제입니다. 무지와 독선과 편견에 사로잡힌 이들이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인생의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처신합니다. 사람들을 굳어진 교리의 틀로 묶어두고, 헛된 욕망과 두려움의 독을 흘려 넣어 사람들이 이성적 사유를 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여러분께 분명하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지도자들을 경계하십시오. 늘 기도를 통해 계시를 받는다고 말하는 이들을 믿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눈먼 인도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이들이 아니라, 제 배만 불리려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확신에 찬 것처럼 보이는 이들처럼 사람을 오도하기 쉬운 이들이 없습니다. 감리교회는 물론 체험을 중시합니다. 올더스게이트에서의 하나님 체험이 없었더라면 웨슬리의 위대한 신앙운동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웨슬리는 신앙적 체험이 자칫하면 광신이 될 수 있음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활의 가장 사소한 일들에서까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받고 있거나 받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길잡이가 되는 이성을 이미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초현실적인 꿈을 기다리지 않고, 환상 속에서 하나님이 계시해 주시기를 기대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는 ‘특별한 느낌’이나 갑작스러운 충동을 찾지도 않고, 다만 하나님의 말씀(oracle)을 찾아 거기서 뜻을 찾는 것입니다.” (웨슬리 설교전집3/설교37, <광신의 본성>, 26쪽)

하나님의 뜻은 특별한 방법으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대개 건전한 이성과 상식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그 뜻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생각’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피를 토하듯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문화는 슬프게도 반성적 사유가 실종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공적 이성보다는 벌거벗은 욕망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웨슬리는 광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얼마나 비타협적인가를 잘 압니다. 그들은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에게 배울 생각이 없습니다. 가르칠 것만 있습니다. 그들은 폭력적입니다. 이런 교만함이 광신을 강화합니다. 

“그의 교만이 커질수록 그를 권면할 수 없는 상태와 고집도 역시 커집니다. 그는 납득이 되도록 이야기가 통할 가능성과 설득당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어서 오히려 자기 자신의 판단과 자기 자신의 의지에만 더욱더 집착을 하기 때문에 드디어 그는 완전히 고착되어 요지부동이 됩니다.”(같은 책, 31쪽)

• 관용의 정신

교만한 영혼, 요지부동이 된 영혼들이 때로는 확신에 찬 지도자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에 대해 말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정작 그들 속에서 말하는 것은 ‘자아’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생각,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합니다. 그들은 선교의 열정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교의 본질은 사람을 온전케 회복시키는 데 있습니다. 병든 사람을 고치고, 귀신 들린 사람을 회복시키고, 죄책감이나 열등감에 짓눌린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야말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웨슬리는 <편협한 믿음에 대한 경고>라는 설교에서, 설사 교회가 이단이라고 정죄한 이들이 귀신을 쫓아낸다 해도, 유대인이나 무슬림들이 귀신을 쫓아낸다 해도 그를 말려서는 안 된다며, 그들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쓰시더라도 그분이 기뻐하시는 사람이면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몸을 바쳐 살 수 있도록 그를 격려하십시오.”(같은 책, 56쪽)

이것이 웨슬리 정신이고, 감리교 정신입니다. 그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나가 있는 사람이라 해도 이성과 진리와 사랑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돌아오도록 강요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예배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그를 외면하는 일은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가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지만 서로 사랑할 수는 있으니 말입니다.(웨슬리 설교39, <관용의 정신>, 61쪽 참조).

• 사람을 아끼는 세상

이 마음이 없어 한국 감리교회와 우리 사회가 이 지경입니다.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제 마음 속에 떠오른 말은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아낌만한 것이 없다"(治人事天 莫若嗇, 노자 59장)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 거칠고 사나워졌습니다. 사람을 아끼지 않습니다. 서있는 자리가 다르다고 함부로 규정하고, 헐뜯고 상처내고 모욕 주고 사지로 몰아넣습니다. 우리는 이런 야수적 현실이 어떤 결과를 빚는지를 지금 참담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사라진 세상을 치유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생존을 위한 약탈을 정당한 행동으로 여기는 유목민들조차 길 잃은 적들은 잘 대접하여 원기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본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추수할 때 마을의 어려운 이들을 위해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두고, 한 뭇 쯤 슬쩍 흘려줄 줄 아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살펴서 그들을 비천하게 하고, 악한 자들을 그 서 있는 자리에서 짓밟아서 모두 땅에 묻어보아라"(욥40:12-13)라고 욥에게 말씀하시지만, 이 말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정말 사람을 아끼신 분이십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마음을 우리가, 그리고 교회가 회복하지 않는 한 한국교회에 희망은 없습니다. 

교리 속에 박제화 된 예수 말고, 갈릴리의 민중들 속에서 함께 웃고 울며 사람이 사람 대접받는 세상을 열기 위해 역사의 뻘밭을 온 몸으로 포복하셨던 예수님을 우리 가슴에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에 눈 뜨고, 예수의 얼에 사로잡혔던 참 사람 존 웨슬리를 기념하는 오늘,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에 지핀 사람이 되어, 이 척박한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삶으로 증언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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