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 만남의 은총 (딤전 1:12~17)

  • 잡초 잡초
  • 285
  • 0

첨부 1


하나님 만남의 은총 (딤전 1:12~17)


시작하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한주간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도 우리가 모여 예배하는 이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예배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큰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의 회심 271주년 기념주일입니다. 그의 열정과 열심은 처음부터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철저했지만, 초기 목회자로서의 사역은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의 철저한 신앙 훈련 속에서 성장하였고, 명문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후 목사가 되기까지 그의 신앙적인 훈련과 유산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위대한 전도자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웨슬리가 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 주를 향해 배를 타고 갈 때에 풍랑을 만나 심한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배에 있던 모라비안 교도들이 조금의 요동함도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를 만나 교제하며 신앙적인 도움을 받았지만 웨슬리의 미국 선교사역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한 여인으로 인해 고소사건에까지 휘말리게 되었고, 결국 도망치다시피 배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자신의 실패에 대해 자괴감을 가지고 고민하던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한 교회에서 로마서 주석 서문을 듣다가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성적으로 그렇게 믿으려고 해도 안 되던 예수님과 그분의 사랑이 믿어진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다고 느꼈으며 구원을 위해 다만 그리스도만 믿고 있음과 그 위에 주께서 나의 죄를, 아니 나의 죄까지도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특이한 경험을 우리는 ‘웨슬리의 회심’이라 말합니다. 

이 회심 사건을 중심으로 웨슬리의 인생은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의 인생의 전반부가 자신의 지혜와 열정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다가 실패한 시기였다면, 후반부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놀라운 기적의 역사와 부흥의 역사를 일궈낸 승리의 시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타이밍은 정확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조금도 틀림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엔 그 사람이 실패하도록 그냥 버려두시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엔 친히 찾아 오셔서 새 힘과 능력을 주시고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회심 이후 웨슬리의 삶은 달라졌습니다. 목회의 태도도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고정관념 속에 메여 있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하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울 것이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일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회심’의 사건입니다.‘회심’이란 단순히 마음이 돌아선다는 언어적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의미, 즉 하나님을 만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마음이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놀라운 삶의 변화를 유발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니 진리를 알게 됩니다. 진리를 알게 되니 삶의 가치관이 달라지고 무엇을 하든지 확신 속에 행하게 됩니다. 사실 드라마틱한 회심의 원조는 사도 바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이 환상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이후 바울의 생각과 가치관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예전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고 핍박을 했지만, 진리를 체험하고 나서는 자신이 돌을 맞는 자리, 핍박을 당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조금도 후회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기뻐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몸 말

우리가 오늘 함께 본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과 웨슬리 회심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살다가 어느 순간 문득 “내가 누구인가” 하는 낯선 질문 앞에 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며 지식을 쌓아 가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 앞에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평생을 살면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며 사는 인생은 불행한 인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그마한 하나의 사건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칭찬을 받으면 사람들은 자신이 모든 일을 잘하는 존재로 인식을 합니다. 또 반대로 실수를 해서 책망을 받으면 자신은 뭘 해도 못하는 못난이 정도로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전자이든 후자이든 둘 다 잘못된 평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쇼펜하우어의 일화 가운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하루는 정원을 걷고 있는데 정원지기가 물었다고 합니다. “거기 누구요?” 그러자 쇼펜하우어가 대답합니다.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소. 혹시 당신이 아시면 좀 알려 주시구려...” 평범한 질문에 대한 철학적인 답변입니다. 철학자도 인간의 지혜로 인생의 신비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정체성이 분명해집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하나님, 혹시 계시더라도 나와는 무관한 존재라 생각했던 그 하나님이 삶의 어느 시점에서 나를 만나 주셔서, 새로운 세계에 눈이 열리게 됩니다. 지금까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셨음을 알게 됩니다. 보지 못했기에 믿으려하지 않았던 것들이 믿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믿어지고, 그 말씀 하나하나가 전부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이것이 내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상당히 잘난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바울은 학식과 좋은 집안 배경, 하다못해 귀족 중의 귀족만이 가질 수 있었던 로마 시민권까지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늘 옳다고 확신했던 사람이었고, 그 결과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랬던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 밝은 빛을 보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거짓이라 생각했던 예수님을 체험하고, 그분이 진리임을 알게 되어 자신의 가치관이 전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실체를 깨닫게 됩니다. 박사 학위가 몇 개 있어도 깨달을 수 없는 진리를 몸으로 체험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깨달음을 디모데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내가 의인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 이런 나를 만나 주셨고 직분을 맡겨 주셨으니 정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섬기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요 택하신 족속이며,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하나님께로 가는 인생임을 분명히 깨닫고 용기를 내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존 웨슬리는 회심의 경험을 하고 난 후에 말씀을 전하고자 했지만, 영국 교회에서는 웨슬리에게 교구를 맡기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목사에겐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런 행정적인 절차에 얽매이지 않았고, 그런 결정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교구가 없으면 교구 밖에서 복음을 전하면 된다는 각오를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담대하게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외치면서 야외에서 복음을 전했고, 그런 웨슬리의 설교를 들으면서 회개하고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아졌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역경은 기회가 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를 잃었다고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느 젊은 부부가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작은 배를 타고 섬으로 가고 있었는데, 폭풍우가 일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빠져 죽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신부는 몹시 두려워 몸을 떨면서 자기 신랑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신랑은 평온하게 있는 거였습니다. 신부가 계속해 불안해하며 신랑을 보고 소리치자, 신랑이 칼을 빼더니만 신부의 목에 갖다 댔습니다. 그러자 신부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무사 신랑이 말하기를,“당신은 왜 웃고 있소? 칼이 당신 목을 겨누고 있는데 말이요.”신부가 말했습니다.“그렇지만 칼이 당신 손에 있지 않나요? 나를 사랑하는 당신 손에 칼이 있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칼은 위험하지만 그 칼을 당신이 쥐고 있는 걸요?”무사 신랑이 칼을 다시 집어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폭풍우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소. 폭풍우는 칼처럼 위험하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또 당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손에 폭풍우가 있기 때문에 나는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요.”

성도 여러분, 지금 나를 걱정하게하고 두렵게하는 아프게하는 그 가시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요. 낙심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마무리하는 말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회심을 경험한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인생이 될 때 세상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교리와 신학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했습니다. 그로 인해 유럽이 복음화 되었고, 북미를 비롯해 우리나라까지도 복음을 듣고 변화한 것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심의 경험이 있기 전에는, 열심은 있었지만 무기력함을 어떻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회심을 경험한 후에는 담대해졌고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담대함에 놀라운 기적의 역사들도 나타났고, 그가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회심을 경험하며 통회와 자복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신분의 사람이고 얼마나 많은 재산이 있으며 얼마나 높은 학식을 가졌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 회심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웨슬리가 영국을 변화시키고 전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웨슬리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초대교회시절 바울을 만나셨고, 271년 전에 웨슬리를 만나셨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 성도들을 만나길 원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회심을 경험하고 세상을 이기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중세기 카톨릭교회가 융성할 당시 유럽에는 수도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와 인본주의의 등장으로 사람들이 종교를 떠나기 시작하자 문을 닫는 수도원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런 위기에 처했던 한 수도원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한때 융성했던 이 수도원은 이제 사람들이 다 떠나 버리고, 다섯 사람만 남아 있었습니다. 수도원장, 부수도원장, 총무, 회계, 관리인만이 수도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신자들이 찾아오지 않자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이제 곧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낙심과 궁리 끝에 수도원장은 깊은 숲속에서 혼자 살며 기도와 명상으로 여생을 보낸다는 숲속의 성자를 찾아 조언을 구해 보기로 했습니다.

수도원장이 성자에게 수도원의 사정을 얘기하며 눈물을 글썽이자, 성자는 아무 말 없이 수도원장의 손을 살며시 잡아 주었습니다. 두 노인(老人)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그저 같이 손을 잡고 울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은 수도원장은 이제는 수도원으로 돌아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수도원장은 떠나기 전 성자에게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저희의 이런 상황에 대해 지혜의 한 말씀을 해 주실 수 없으신지요?”성자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성자는 자기로서는 어떤 지혜의 말을 해 줄 형편이 못 된다며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수도원장은 성자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나서면서 마지막으로 다시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선생님, 우리 수도원은 곧 문을 닫아야 하는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한 말씀만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꼭 한 말씀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성자는 수도원장의 간청에 못 이겨 말했습니다. “그렇게 간청하시니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내가 드리고자 하는 말은 지금 수도원에 남아 계신 다섯 분 중에 한 사람이 그리스도일거라는 것입니다.”그 말을 남긴 채 성자는 숲속으로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수도원장이 수도원에 돌아오자 수도원에 남아있던 부수도원장과 총부, 회계, 관리인이 반기며 물었습니다.“그 지혜로우신 성자께서 수도원을 위해 한 말씀 해주시던가요?”“글쎄요. 그분이 해 주신 말씀이라고는‘우리 다섯 사람 중에 한 사람이 그리스도일거라’고 하시더군요.”이 수수께끼 같은 말을 안은 채 모두 각각의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고는 성자의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저 부수도원장이 그리스도일까? 그 사람은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인데…. 아니지! 그래도 그 사람은 마음이 따뜻하고 친절하지 않은가? 

부원장이 그리스도일지도 모르겠군.’부원장은 또 자기 방에서 생각했습니다.‘우리 수도원 총무가 그리스도일까? 천만의 말씀. 그 사람은 얼마나 마음씨가 차갑고 비판적인데. 아참, 아니지. 그래도 그 사람의 판단력은 정확하며 사태의 본질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나지 않던가? 아마 그 사람이 그리스도일지 모르겠군.’또 총무는 자기 방에서 생각했습니다.‘우리 수도원장이 그리스도일까? 아마 그 사람은 책임감이 있으며, 헌신적인 면이 있으니 그리스도일지 모르지.’또 수도원장은 수도원장실에서 생각했습니다.‘우리 수도원 관리인이 그리스도일까? 

화려한 직책이 아니라도 자기가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해내는 저 관리인이 그리스도의 현현인지 모른다.’또 관리인은 관리실에서 생각했습니다.‘저 회계가 그리스도일까? 무척 구두쇠같이 굴지만 그 사람 아니면 우리는 지금 죽도 못 먹을 형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회계가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구나.’그 다음날부터 수도원식구들은 서로를 마치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정성과 친절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수도원에는 친절과 따스함의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원 전체가 온화한 분위기로 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찾아 왔습니다. 인근에 있는 도시에서 사람들이 가족단위로 소풍을 나왔다가 수도원의 마당을 산보하곤 했습니다. 거기서 도시사람들은 예전에 느낄 수 없었던 포근함과 따스함의 분위기가 수도원 전체를 감돌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은 수도원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애정과 친절로 대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다음번에 올 때는 친구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수도원의 사람들이 서로 얼마나 따뜻하게 대하는 것을 지켜보며 배우게 했습니다.

수도원의 온화하고 친절한 사람들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원근각처에서 사람들이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방문객들은 수도원의 사람들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문제를 털어놓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종교에 대해 진지하게 물어 보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젊은이는 자기도 그 수도원에 가입할 수 있는지를 묻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수도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가 하고 묻기도 했습니다. 이리하여 수도원에는 식구들이 점점 늘기 시작했습니다. 문 닫기 일보직전에 있던 수도원에 사람들이 찾아들자 그 수도원은 다시금 부흥하고 존경받는 수도원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변화될 때, 내가 회개하고 그리스도 앞에 있다는 자세로 살때 우리의 공동체는 부흥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웨슬리의 회심은 죽어가는 영국사회와 이 세계를 살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회심의 은총과 능력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따뜻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신앙 공동체인 우리교회가 은혜롭고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직장이나 이 나라가 평화롭고 살만한 곳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나의 회심이 먼저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웨슬리 목사에게 마음의 뜨거움과 하나님 만남의 회심의 은총을 허락하시고 능력을 주셨던 것 같이 우리 모두에게도 같은 은혜가 임하기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의 교회와 사회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