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좋은 친구들 (막 2:1~5)

  • 잡초 잡초
  • 542
  • 0

첨부 1


좋은 친구들 (막 2:1~5)


72년 전(前), 미국 하버드대에서 “잘 사는 삶에 일정한 공식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학자들이 이 의문을 풀어보기 위해 그 해 입학생 중 똑똑하고 전도유망한 학생들 268명을 선발하고는 무려 72년에 걸쳐 연구를 했는데, 그 결과가 지난 12일 ‘애틀랜틱 먼슬리’ 6월호에 공개되었습니다. “성공적인 인생(노후)로 이끄는 열쇠는 지성이나 계급이 아니라 사회적 적성, 즉 인간관계였다. 형제·자매 관계도 중요하다.

65세에 잘 살고 있는 사람의 93%가 이전에 형제·자매와 원만하게 지낸 사람들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행복은 결국 사랑이다.” ... 결국 ‘사랑의 인간관계’가 가장 가치있다는 것입니다. 또, ‘폴 트루니에(Paul Tournier)’는 “사람이 혼자 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결혼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크리스챤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어떤 인간관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각종 질병을 고치신다는 소문(막1:28)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곁으로 몰려왔습니다(마15:38; 요6:10; 눅21:1). 오늘 본문에서도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막1:33, 45; 2:1-2). 더 이상 들어설 자리가 없었지만(막2:2) 저들은 개의치 않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그분을 대하려는 열정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님 앞에 있는 자들은 두 부류로 확연히 나뉘어집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막2:2)" 먼저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 남들보다 먼저 달려와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저들은 주변의 소란스러움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이 예수를 꼭 만나야하는 다른 이들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막2:4). 한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나아가려 하지만 길을 터주지 않는 이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 이들은 오늘날 예수를 먼저 믿은 우리들입니다.

먼저 이 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중요한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교회 사랑하는 마음과 열심 또한 둘째가라면 서럽습니다. 그런데 그런 내가 혹시 뒤에 온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지는 않는지 자문(自問)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짧은 생각과 배려 없는 우리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는 분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정말 중요합니다(마23:13).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었다.’는 이 말씀을 먼저 믿는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합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막2:3)” 뒤이어 등장하는 이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 역시 먼저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로,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2절의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꼭 만나야 할 사람을 데리고 ‘함께’ 예수님에게로 나아왔습니다. 중풍병자와의 관계는 알 수 없지만 저들은 이 중풍병자를 보는 순간, 그도 내가 만난 예수님을 꼭 만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이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를 데리고 오는 과정에 여러 장애물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막2:5; 요9:3) 중풍병자를 가까이 한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요4:4). 또, 그의 병은 침상채로 들어야만 옮길 수 있는 중한 상태였습니다(막2:4; 요11:3, 39).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 앞에 먼저 나아와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앉아 있는 사람들과 눈앞에 떡 버티고 서 있는 큰 집 또한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그 장애물 앞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꼭 만나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고 침상채로 예수님 앞으로 그 중풍병자를 달아내렸습니다. ... 남의 집, 침상채로 달아내릴만큼 큰 구멍,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그 진지한 시간에 지붕 위에서 흙과 나무와 돌멩이가 우수수 떨어져 내립니다. 지금 그들은 소란을 피우며 예배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저들의 행위를 ‘믿음’이라고 칭찬하십니다(막2:5). 그리고 그 믿음을 보시고 이적을 베푸십니다. ... 믿음이란 바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히11:6; 마25:31). 믿는 바를 행동에 옮기고 그 어떤 장애물일지라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 모두 동일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이 자리에도 고 있다 하면서도, 앞좌석만 차지하고 앉아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거나, 모처럼 예수님 앞으로 나아온 자들에게 상처나 입히고, 낙심케 하고, 앉아서 남의 약점, 허물을 캐내는 일에 급급했던 2절의 사람들과 예수님 앞으로 오되 혼자 오지 않고, 예수님을 꼭 만나야 할 또 다른 자들을 ‘함께’데리고 오는 3절의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3절에 있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죽어가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주님 앞으로 데리고 나오는 저들은 참으로 ‘좋은 친구들’입니다(요15:13-14).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주님은 우리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창4:9).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10:16)” 지금 우리 주님의 시선은 아버지의 말씀에 어김없이 순종하는 맏아들이(눅15:29) 아니라,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도 배를 채우지 못하는 작은 아들, 탕자를 향하고 있습니다(눅15:20). 우리 주님은 아흔 아홉 마리보다 한 마리의 길잃은 양을 더 중히 여기십니다(눅15:4).

다음 주일, 드디어 ‘생명줄 던져’ 축제의 날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날을 위해 태신자를 가슴에 품고 저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준비해왔습니다. 다음 주일만큼은 내 곁의 영적 중풍병자를 모시고 와야 합니다(왕하5:3). 혼자의 힘으로 어려우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함께’ 모시고 나오십시오. 그 과정에 분명히 장애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중풍병자가 주님을 만나, 치유함을 받는 모습을 바라보며 함께 기뻐하는 의미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단12:3).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