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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권능의 날 (시110:1~3,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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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권능의 날 (시110:1~3, 눅 7:11~17) 


저의 청년 시절에 많이 읽혔던 소설 가운데 이문열씨가 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란 책이 있습니다. 내용은 한 시골 초등학교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권력에 대항해보지만 어쩔 수 없이 환경에 굴복하고 결국 그 권력에 빌붙어 사는 한 소시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병태는 학급의 반장으로 권력을 쥐고 있는 엄석대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항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따돌림과 누명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엄석대에게 달라붙어 자기 안위를 도모하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당시 이렇게는 안 살고 싶다는 우리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병태를 얼마나 짓밟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희끗 희끗 머리가 바래고 삶의 풍상에서 얻어진 모습들은 우리들이 젊은 날 그렇게 싫어했던 병태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소설에서처럼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내게 피해만 없다면 불필요하게 부당한 권력에 도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대다수가 아닙니까?. 자신과 관계없으니 무심하자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눈과 귀를 닫아버립니다.

최근에 우리는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많은 것들을 우리 주변에서 보고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절망하게 하는 것은 이 땅의 청년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이 땅에서의 청년들의 죽음은 몇 가지 현상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청년 자살율의 급속한 증가(경찰청 통계/1일-36명/그중 20명이 20-40대)요, 둘째는 청년 실업률의 증가(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고, 셋째는 청년들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이야말로 죽음의 징후인 것입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아무 일에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과연 이 땅의 청년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인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시점입니다.

오늘은 우리교회 청년들이 성년-어른-이 된 것을 온 성도들 앞에서 확인하고 청년들을 축복하고 주님을 더 사랑하며 잘 믿으라고 기도해주고 격려해주는 뜻 깊은 주일입니다. 오늘 성년식을 갖는 청년들과 선. 후배 모든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이란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 청년을 새벽에다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새벽은 히브리어에서 새벽을 '오르'라고 합니다. 그 뜻은 빛나다 입니다. '솨파르'라는 단어도 있습니다. 그 뜻은 반짝반짝 빛나다 입니다. 청년은 누가 뭐래도 밝음과 희망을 상징합니다. 또 이슬에 비유를 했는데 이슬은 생명과 은혜의 상징입니다. 새벽이슬은 성경에서 은총 가운데 은총입니다.

여러분! 새벽 이슬하면 무슨 생각이 떠오릅니까? 깊은 밤, 새벽이 되려는 시간에 고요하게 산천초목 위에 촉촉이 내립니다. 이슬은 요란하게 내리지 않습니다. 깊은 밤에 소리 없이 내려 온 초목을 적셔주어 생명을 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의 이슬은 초목에게는 생명과 같습니다. 팔레스타인은 한 낮에는 햇볕이 매우 뜨겁기 때문에 식물들에게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물이 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산천초목이 필요한 물을 새벽이슬이 유일하게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지방의 이슬은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청년들을 새벽이슬에 비유한 것은-이슬 같이 깨끗하고 거룩한 청년, 신선하고 영롱한 청년이 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청년들은 생활 습관이 다르고 문화 코드가 달라서 ‘새벽이슬’ 아니라 ‘밤안개’ 같아요. 새벽이면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일어나더라도 그냥 멍해요. 그런데, 밤이면 말똥말똥해요. 밤이 돼야 머리가 잘 돌아가는가 봐요. 아무리 문화가 달라져도 청년은 새벽에 성공자가 되야합니다.

여러분 히브리어에서 젊음이란 말의 어원은 ‘새벽’입니다. 청년은 참으로 새벽의 시기입니다. 젊을 때 일하지 않는 것은 새벽을 잠으로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새벽 기도회를 새벽잠이 없는 노인들이나 참석하는 기도회라고 생각해서는 인생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바르게 드리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새벽이슬입니까? 새벽에 이차 삼차가 아닙니다. 새벽이슬은 주께 나아오는 청년의 모습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무의식중에 어디로 갑니까? 주께 나오십시오. 주께 나오면 은혜의 사람이 됩니다. 주께 나오면 새벽이슬이 됩니다. 그러므로 새벽이슬 같은 청년이 되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은 무엇보다 3가지를 강조합니다. 이 시간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잘 기 기울기를 바랍니다.

첫째,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3절 상반 절에는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라고 합니다. 청년이 살아 있기 위해서는 청년들이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거룩한 옷을 입는 것이 주께 헌신하고, 주께 나아오는 전제이며 조건입니다. 옷은 마음이며 자세입니다. 거룩한 마음 자세를 가진 청년들이 살아 있는 청년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옷은 성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옷은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옷은 그리스도인의 성품이며 영성의 표현이기도 하고 삶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옷은 거룩해야 합니다.

예전에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왕은 왕이 입을 옷이 따로 있었고, 귀족은 귀족의 옷을 입어야 하고, 평민은 평민을 나타내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군인은 군인 옷, 군복을 입었고, 판사는 법의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죄인은 죄수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옷은 그 사람을 말합니다. 옷은 그 사람을 결정합니다. 옷이 그 사람입니다. 전도서 9:8에는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흰 것은 정결한 것을 의미합니다. 깨끗한 모습을 상징합니다. 흰색은 하늘나라의 색입니다. 흰 옷은 그만큼 단정하고 깨끗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깨끗한 사람이 되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의 피를 의지하여 회개하고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면 깨끗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더러운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려고 친히 죄 짐을 지고 담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셨음을 믿고 죄를 자백하면 모든 더러움에서 깨끗케 해 주십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여러분의 마음이 깨끗해 질 뿐 아니라 예수님의 깨끗한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에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깨끗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내 으가 아닌 주님이 주신 의 에 옷을 입고 이제 구별된 삶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야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민이 어디에 있습니까?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정결함을 얻었지만 사단은 죄의 유혹을 통해 계속 우리를 더럽히고자 따라 붙습니다. 그런 유혹과 시험에도 우리가 자신을 더럽히지 않을 방법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항상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면 죄의 유혹을 이기는 강한 힘은 바로 주의 말씀입니다. 시119:9,11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미국의 유명한 실업가이며 체신부장관을 역임한 죤 워너메이크가 60회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친지와 친구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투자를 하여 많은 이익을 얻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투자는 돈의 투자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열두 살 때에 2달러 50센트의 빨간 표지의 책을 한 권 샀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저는 이 투자가 제 인생의 최고의 투자였으며 그 투자가 오늘의 내가 있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투자는 결코 후회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투자를 보장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투자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투자한 인생가운데 후회하는 사람은 역사상 단 한명도 없습니다. 죤 워너메이크뿐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인생 최고의 투자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투자하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에 내 인생을 투자하여 열매를 맺겠다는 거룩한 꿈을 가지십시오. 자녀들의 가슴에 하나님의 말씀의 꿈을 담아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우리 자녀들을 책임지실 것입니다. 둘째, 새벽이슬 같은 청년이 되기 위해서는 즐거이 헌신해야 합니다. 청년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무엇을 합니까? “즐거이 헌신하니”라고 합니다. 

여기 헌신을 우리는 어떻게 정의 할 수 있습니까? 사전에는 “당신 자신을 한 가지 목표에 완전히 쏟는 것. 그리고 그 목표에 이르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라고 정의 되어 있습니다. 헨리 빌레이는 "하나님은 자신에게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과 함께, 그 사람을 위하여, 그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신다."고 말했습니다.(고전 4:2) 하나님은 우리를 일터로 보낸 것이지 놀이터로 보낸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 하나님이 애타게 찾으시는 헌신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헌신의 이유는 하나님께서 헌신 된 사람들을 통하여 그의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자들을 보면 그들은 무엇엔가 헌신 된 자들이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는 자연의 법칙을 통하여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헌신된 무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은 성취될 수 있습니다. 주의 청년의 헌신의 특징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헌신이어야 합니다.

오늘은 청년 주일로 교회가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평생의 라이프싸이클 중에 신앙의 감격과 기쁨을 잃어버리기 쉬운 시기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구원의 감격과 사명의 열정을 현실에 적응하기위해서 세상과 쉽게 타협하며 마음의 갈등이 가장 심한 시기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바로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갈 때입니다. 그리고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생활을 하는 그때부터 사회에 조금 적응이 되는 20대 중반부터 30대 후반까지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제가가장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연령대가 청년부에서 직장이나 결혼을 통해서 삶의 현장이 변하는 그 시기에 처한 사람들입니다.청년 때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명자로 살겠다는 열정에 불이 탑니다. 

단기선교를 가거나 선교단체의 간사로도 지원하면서 돈 한푼 없이도 사역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을 갖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기쁨입니다. 사람들이 새롭게 인생을 결단하며 축복의 통로로서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비전입니다.그러나 직장생활을 시작한 후 자신이 꿈꾸었던 것과 세상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 조직사회에 적응하기위해서 치루어야 할 일들과 갈등이 너무 많습니다. 신앙생활, 비전, 사명을 돌아볼 틈이 없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업을 통해서 세상을 봅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이 사회의 권력과 돈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경험합니다. 

신앙과 사업, 직장생활과 교회생활 너무나 고통스러운 갈등이 됩니다.어떤 분들은 직장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들어가서 얼마 있다가 사업도 그만두고, 직장도 포기합니다. 그러면서 신앙의 회의가 찾아옵니다. 반대로 자신이 시작한 사업과 직장생활을 하면서 사회생활에 대한 매력을 느낍니다. 이 사업을 위해서 이미 시작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배웁니다. 그들의 방법이 좋아 보이고 성공의 지름길처럼 보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배우다 보면 왜 사업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 다음부터는 돈이 자연스러운 목표와 비전으로 자리 잡고 더 나아가면 자기즐거움과 만족에 이르게 됩니다.믿음과 사명 그리고 비전에 따라 살겠다고 결단했지만 형제와 자매의 육체적 욕망 앞에서 한 장의 휴지조각과 같은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결혼을 합니다. 

첫째 아이를 낳고나서 타협, 둘째 아이를 낳고나서는 변질, 그리고 아이를 하나 더 나으면 절망하게 된다고 합니다. 결혼 전 생각 했던 환상적인 결혼생활이 아닙니다. 비전을 성취하기위한 수단으로 결혼과 직장생활이라는 의식이 깨어져 버립니다. 단지 현실가운데 생존과 적응이라는 것에 매이게 됩니다. 사명을 생각하기에는 현실의 여유가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비전과 사명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는 것 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다가 40이 넘어 중년이 되면서 갈등을 겪기 시작합니다. 지난날의 가졌던 그 열정이 다 타버린 재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이 비전을 잃어버린 삶의 끝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다음세대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지금 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고 심각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희망과 미래가 없는 하루살이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잃어버린 하나님의 비전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붙들어야 됩니다. 잃어버린 비전, 여러분 가슴속에 처음 은혜 받았을 때 하나님께 드렸던 그 헌신의 믿음을 다시 세워서 자신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비전을 찾으셔야 합니다.

셋째, 그러므로 주께 나아와야 합니다.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고 합니다. 나온다는 이 말은 새로운 각오와 자세를 말합니다. 전도서 11:9에는 말합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언뜻 이 말씀을 보면 젊었을 때 방탕하게 즐기며 살라는 뜻 같이 보입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하고 흥청거리며 살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젊음의 특권을 누리며 살라는 충고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청년의 때에 기회를 놓치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인생은 생각하는 것보다 짧다.”는 것을 이렇게 간곡하게 충고하는 것입니다. 어디든 가세요. 그러나 그것 때문에 미래의 길이 정해지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어디든 가세요. 그러나 그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의 길이 있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신앙의 의미를 붙잡지 못하고 명문 브라운 대학에 다니면서 무신론자 친구의 영향으로 교회를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4년 과정 대학을 3년에 졸업하고 졸업 여행을 떠났다가 시골 여인숙에서 옆방에서 밤새도록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듣고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 이튿날 그 옆방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가 바로 대학 시절 자기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든 바로 자기 친구였습니다. 그는 충격을 받고 인생의 실존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다가 어린 시절에 찬양하던 예수님 앞에 돌아오기로 결심합니다. 

회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를 시작합니다. “주님,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어제처럼 지금까지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복음밖에 없고 이 복음을 한번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고 신학을 공부한 후 방금 결혼한 신부와 데리고 아시아를 향해 떠납니다. 그때 그의 나이 25세였습니다. 그가 지금으로부터 190년 전에 미국 교회가 처음으로 파송했던 선교사가 아도니람 저드슨 선교사입니다. 지금도 미국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은 누구든 이 분의 삶을 닮기를 원할 정도로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탁월한 수재였기에 젊은 25세의 나이에 모교인 브라운 대학으로부터 교수 초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보스톤에 있는 어떤 큰 교회로부터 담임목사 청빙을 받았습니다. 두 가지가 다 탐나는 초빙이어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두 곳을 다 정중하게 사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혼한 지 보름 만에 아내와 함께 인도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인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교사라는 이유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그들은 다시 배를 타고 미얀마(버마)로 떠났습니다. 긴 항해 도중에 아내는 유산을 했고 너무 허약해진 나머지 랑군에 도착했을 때 들것에 실려 배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드슨 부부는 복음을 위해 열심히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어 두 번째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도 몇 달되지 않아 열병으로 죽였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낙심하지 않고 복음 사역에 최선을 다했는데 그만 감옥에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는 창문이 하나도 없는 캄캄하고 더러운 감방에서 일년 반 동안이나 고생을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밖에서 얼마나 어려움을 많이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 길로 아내는 건강을 해쳐 남편을 출감한 직후에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저드슨은 낙심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서 일했는데 결국에는 자신도 병이 들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요양을 하려고 고국으로 가는 배를 탔는데 그의 건강이 너무 악화되어 고국 땅을 밟아보기 전에 선상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당시는 냉동기술이 전무한 시대라 그의 시체를 바다에 장사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땅에서 저드슨의 삶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여러분, 저드슨의 생을 한번 보세요. 그가 세상적으로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이국만리에서 아내와 자녀를 잃고 자신도 차디찬 바다에 수장되는 운명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차라리 대학교수로 갔더라면, 차라리 큰 교회 목회자가 되었다면 얼마나 행복한 생을 살았을까요? 그러나 그 부부는 진짜 축복을 놓치고 싶지 않아 세상 복을 포기해 버렸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저드슨의 가정은 예수 때문에 망한 가정처럼 보입니다. 그가 죽은 후 단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도 없었던 버마에는 21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습니다. 한 사람의 회심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그를 이야기하는 사람 어느 누구도 그를 실패한 인생이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제 정말 믿기지 않는 소식 앞에 망연자실하고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은 정말 안타갑기 그지없는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사건입니다. 왜 자살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살아 있을 때 외쳤던 도덕성의 심각한 훼손은 자신을 버티지 못하게 하는 수치감으로 작용해 그 길을 택한게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그 분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이 죽음은 그가 살았을 때 우리에게 보여준 용기와, 정직, 불의와 맞서 싸운 의로운 죽음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정말 한 비겁한 사람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저도 내 인생을 어떻다고 자신 할 수 없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소망 있는 것은 이 연약한 인생을 조건없이 받아 당신의 보혈로 죄 씻음을 주시고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날마다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는 예수가 있기에 희망을 노래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혼자 고민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주일에 주 앞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시간이라도 마음껏 하나님 앞에 와서 우리의 고뇌와 기쁨과 슬픔과 감사를 하나님 앞에 드러냄으로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찬송하면 건강해집니다. 기도하면 건강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속사람이 강해집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것들은 하나님께 맡기고 쉬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왜 우리 속에 주셨습니까? 우리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여긴 모인 청년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미래를 봅니다. 청년의 때는 무한한 가능성과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의 비전과 기초를 튼튼히 세우고 위대한 스승을 만날 수 있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청년의 때는 정욕과 유혹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시기입니다. 강한 자아의 만용을 부릴 수 있습니다. 부모나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길을 가버림으로 꽃도 피어보지 못하고 져버릴 수 있습니다.

청년은 육신의 나이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젊은 생각, 젊은 신앙은 육체의 나이와 관계없이 청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주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 교회에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김을 받고, 주님께서 나 하나를 위해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으신 것처럼 우리 역시 한번뿐인 인생을 가장 가치 있게 사용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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