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님의 날 (살전 4:13~5:11)

  • 잡초 잡초
  • 320
  • 0

첨부 1


주님의 날 (살전 4:13~5:11)
 
 
발신자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 이유로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했었습니다(살전 3:10). 4장 13-18절은 재림과 죽은 성도들에 관하여, 그리고 5장 1-11절은 재림과 살아 있는 성도들에 관하여 그들의 부족한 믿음을 온전케 하려고 권면한 내용입니다. 

발신자들은 “자는 자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16)에 관하여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꼭 알기 원하는 심정을 이중 부정을 통해 강조합니다. 그 목적은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었습니다(13). 죽음 앞에서 성도 역시 슬퍼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시간에 기뻐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성도의 슬픔은 소망 없는 다른 이와는 구별된 슬픔, 곧 거룩한 슬픔입니다. 따라서 발신자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사별로 인하여 슬퍼할지라도 ‘소망 없는 다른 이’처럼 절망적으로 슬퍼하지 않도록 권면합니다.

소망 없는 다른 이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죽음을 끝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예수님)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는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14).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성도가 죽으면 그 영혼이 즉시로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됨을 알려줍니다. 주님과 함께 있다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함께 와서 홀연히 변화된 부활의 몸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죽음조차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 됩니다.

소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과도하게 슬퍼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15). 죽은 자들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살아 있는 자들에 비하여 뭔가 대단한 불이익이 있을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재림과 관련된 부족한 믿음이 그들에게 과도한 슬픔을 가져다주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발신자들은 “주의 말씀으로” “결단코” 둘 사이에 차이가 없음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 후 오해를 교정하기 위하여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16-17a)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씀에 재림과 관련된 많은 표현들이 있지만 말하려는 핵심은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17b)입니다. 재림 때에 죽은 성도든 살아 있는 성도든 똑같이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된다’는 진리를 가르쳐줌으로써 과도한 슬픔을 막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죽음 때문에 사랑하는 자와 이별하게 되는 일은 성도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의 죽음, 사랑하는 배우자의 죽음, 심지어 사랑하는 자녀의 죽음에 직면합니다. 그런 슬픔을 당한 성도들이 이미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그런 종류의 슬픔들을 당할 것입니다. 그때에 죽은 자의 영혼이 항상 주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보다 더 위로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는 사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다시 만나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된다는 사실은 절망적이고 비참한 슬픔을 벗어나서 소망 중에 우리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18).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공감을 표현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말씀으로 부족한 믿음을 채워주는 방식을 통해 서로 위로하도록 명합니다. 발신자들 역시 말씀으로 오해를 교정하고 말씀으로 희미한 것을 분명히 알도록 도왔습니다. 때로 우리의 부족한 믿음이 불필요한 슬픔을 가중시킬 때가 있습니다. 부족한 믿음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염려하거나, 부족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과도하게 불안해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위로는 부족한 믿음을 보충해 주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옵니다. 진리는 죄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슬픔과 염려와 불안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합니다(요 8:32b).

이제 다음 주제인 재림의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더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이미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2). 구약 성경에서 ‘주의 날’은 여호와께서 의로움을 드러내시며 심판하러 오시는 크고 두렵고 어두운 날이었습니다(욜 2:31; 암 5:18; 말 4:5). 우리 주님의 재림을 예언한 그 날은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임할 것입니다. 잉태한 여인이 해산의 고통을 피할 수 없듯이 갑자기 그리고 필연적으로 닥칠 멸망을 저희는 “결단코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로마는 속국들에게 황제에게 충성하면 평안을 지켜주고 안전을 제공하겠다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 이념을 선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악티움 해전에서 시저의 암살자들을 처단하려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에게 협력했기 때문에 자치주로 인정을 받았고 로마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으면서 친로마적인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이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요. 로마의 보호 아래서 그들은 ‘평안하다, 안전하다’하고 있었습니다. 발신자들은 재림에 대하여 무관심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우습게 여기는 저희에게 홀연히 멸망이 임할 것을 경고합니다.

그런데 주의 날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날이 될 것이나 ‘너희’에게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성도는 주의 날은 대망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못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4-5). 본문은 인류를 두 부류로 나눕니다. 소망 있는 이와 없는 이, 너희와 저희, 빛의 아들과 암흑에 속한 자로 분류합니다. 상호 배타적이어서, 둘 모두에 속하거나 중간쯤에 위치한 사람은 없습니다. 성도는 다른 이들과 함께 이 땅에서 살지만 근본적으로 소속이 다릅니다.

존재와 소속이 전혀 다르다면 살아가는 모습도 달라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6-8). 어두운 세상 속에서 성도는 마치 전투 중에 무장하고 있는 보초병과 같은 존재입니다. 보초병의 모습이 술에 취하여 곯아떨어진 사람의 모습과 구별되지 못한다면 문제가 크지요. ‘근신하라’는 말은 정신을 차리고 있으라는 말인데, 저희와 구별되지 못한 모습으로 동화되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9절은 ‘왜냐하면’(o[ti, 호티)로 시작됩니다. 깨어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설명되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우셨다는 것은 ‘지정하셨다’는 뜻으로 선택하심의 의미가 들어있지요. 10절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떤 일을 일어났는지 설명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라는 말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혹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표하여 죽으셨다’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대신하여, 대표하여 죽으셨다는 세 가지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9-10절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전능하시고 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에 한번 정하신 구원은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정 교리에 대한 부족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구원받았으니까 깨어 근신하지 않아도 평안하고 안전하다는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하여, 대표하여 죽으신 목적은 소망 없이 흑암에 속해 있는 ‘저희’와 같은 모습으로 살게 하려 함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목적을 실패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구원으로 선택된 자의 모습은 결국 재림하실 주님을 대망하며 깨어 근신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믿음과 순종심을 주셔서 결코 ‘저희’와 같지 않는 모습이 되게 하십니다. 오늘날 예정하심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여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을 로봇처럼 만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구원으로 예정되었다면 재림 때까지 아무렇게나 살아도 일단 구원은 받는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예정에 대한 바른 믿음은 자만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신실하게 깨어 근신하는 삶을 살도록 이끕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11)는 말씀은 주의 날과 관련한 권면의 결론입니다. 서로 권면하고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세우기를 현재 너희가 행하고 있는 것처럼 하라는 의미입니다. 부족한 믿음이 채워지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도가 성도를 교회가 교회를 서로 권면하는 가운데 바른 진리가 확증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의 부족한 점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깨어서 근신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이미 무장하고 있었지요. 그러므로 주의 날을 두려워할 필요 없이 계속해서 깨어 근신하는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이 땅의 팍팍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바쁜 일생에 쫓겨서 부족한 믿음을 채우기도 쉽지 않습니다. 부족한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살아가려고 하니 힘겨워서 영적 전투의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날을 대망할 때 고달픔과 괴로움을 잊을 수 있습니다. 언제나 소망 있는 자답게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