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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서로 다르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창 2: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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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르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창 2:18~25)


다르다는 것은 다를 뿐 틀린 것이 아닙니다. 
가정의 달을 보내면서 우리가 「서로 다르게 지음받았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 됩니다. 셀교회 신학의 출발은 삼위일체론입니다. 하나님이 공동체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은 한분이면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면 두 분이면 됩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가족으로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땅에 당신의 모습을 따라 만든 작품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신의 모양을 따라 만드셨고 공동체된 당신의 모습을 따라서 이 땅에 두 개의 공동체를 만드셨는데 하나는 가정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행복의 비밀을 가정안에 숨겨두셨고 구원의 비밀을 교회안에 숨겨두셨습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가정안에 숨겨놓은 행복의 비밀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아직까지 인생을 잘못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안에 숨겨진 천국의 비밀, 구원의 비밀, 영생의 비밀을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라 할 수없을 것입니다. 

셀교회 교회론은 교회는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담의 옆구리가 터져서 갈비뼈가 뽑혀진 다음에야 가정이 만들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가 터져 물과 피가 쏟아진 다음에야 그 보혈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라는 것은 요술이나 마술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우연히 요술과 마술 쪽으로 행복한 가정과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서로 인내해야 되고 사랑의 씨를 심어야 되고 누군가 수고해야되고 헌신해야되고 피흘림이 있을 때에 가정이 가정다워질 수 있는 것이고 교회가 교회다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가정과 교회가 가족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 내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 물질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 인간은 인간다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족을 만드신 공동체를 만드신 하나의 원리가 있습니다. 서로 다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생물을 만드시는데 종류대로 만드셨다는 말씀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꽃들은 라일락은 라일락같이, 국화는 국화같이, 코스모스는 코스모스같이 만들었습니다. 짐승들을 만드는데도 사자는 사자같이, 호랑이는 호랑이같이, 고양이는 고양이같이 만들었습니다. 물고기를 만드는데도 고래는 고래같이, 갈치는 갈치같이, 꽁치는 꽁치같이 만들었습니다. 서로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이 지구상에 600억 인구가 왔다 갔고 지금 지구상에 60억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만은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조막만한 얼굴에 송충이 같은 눈썹 두 개, 뎅글뎅글 눈 두 개, 콧구멍 두 개, 송편같은 귀 두 개, 입 하나 -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신묘막측하게 만들어서 이 지구상에 왔다 갔던 그 누구도 똑같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말을 하고 있습니다만 파장이 있는데 60억 인구가운데 파장이 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답니다. 손가락마다 손금이 있습니다. 몇 개 안되는 원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기가 막히게 만드셨는지 60억 인구가운데 손금이 같은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만드셨습니다.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세상을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들 축복할 수 있도록 이 세상에 나는 하나밖에 없는 보배로운 존재로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 이 완전한 관계를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더라” 이것은 가족의 완성된 모습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내게 상처가 있고, 내게 약점이 있고, 허물이 있으나 그것 때문에 부끄럽지 않은 관계가 가족입니다. 상처가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약점이 노출됨에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 불편하거나 부끄럽지 않은 자리가 가족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마다 목장모임을 합니다. 그 목장 모임에서 지난 한 주간에 있었던 아픔을 고백하지요. 내 상처를 고백하지요. 내 약점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백되어진 상처가 다시 상처가 되어서 내게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 약점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 내가 부끄럽지 않다면 그 목장이 바로 천국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실수와 허물이 노출됨에도 불구하고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용납받을 수 있고 덮여질 수 있고 격려받을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인간이 언제부터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을까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면서부터 인간은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나뭇잎으로 자기를 감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모든 인간들은 자기의 수치를 가리고 자기 자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냅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의 수치는 드러내고 상대방의 자랑거리는 짓밟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선악과 먹은 범죄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때부터 인간의 역사는 나뭇잎 만들기 역사를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의 나뭇잎으로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나뭇잎이 작다는 것을 느낄 때에 자녀들을 교육시켜서 자녀들의 나뭇잎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려보려고 합니다만 일류대학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거나 부끄러움을 가려줄 수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여자들 나뭇잎사귀 만들어 주기 위해서 남자들은 밖에 가서 뼈골이 빠지도록 일합니다. 그러면 그 돈 가지고 여자들 백화점 다니며 자기 나뭇잎사귀들을 찾아 다니지요. 그 얼굴을 나뭇잎사귀로 가려보기 위해서 아침에 13가지 저녁에 7가지 화장품 바른다지요? 

남자들은 권력을 통해서 힘을 자랑함으로 무용담을 늘어놓음으로써 자기 부끄러움을 가려보려고 합니다. 자기 힘의 나뭇잎사귀가 작았다고 생각되어지면 고향에 사돈네 팔촌이 아무개 자리에 있다고. 고향 사돈 팔촌 나뭇잎사귀 빌려다가 자기 부끄러움을 가려보려고 합니다. 
교회에 와서 자기 선행을 과장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주님의 은혜가 고마워서 한다면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바로 선행을 과장한 나뭇잎사귀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교회 직분은 교회를 잘 섬길 수 있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 직분조차도 나뭇잎사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유가 오면 자신의 못난 모습을 드러내고도 자신의 상처나 약점을 나누고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허물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의 용납과 용서는 우리의 약점보다 크십니다. 이런 인간에게 자유가 오고나면 다른 것은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이 아니다 하는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만든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도 내 입맛에 맞게끔 상대방을 뜯어 고쳐 살려고 하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취향에 맞게끔 뜯어 고쳐 살려고 하면 부부관계가 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구별과 차별은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제물은 구별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면 안됩니다. 귀천으로 차별하면 안됩니다. 

비판과 비평은 다르지요. 비판과 비난은 미워하는 감정이 도사려있습니다. 상대를 헤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죄하게 되고 비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평은 학문의 세계에서 함께 바람직한 아름다운 세계를 추구하는 몸부림입니다. 사람관계에서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상대를 세워주는 격려를 비평이라고 합니다. 

다르다는 것과 틀리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마이크 씨와 강대상 씨는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너와 나는 다른 것이지 너와 나는 틀린 것이 아닙니다. 차이가 주는 의미, 차이가 주는 행복을 누릴 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은혜의 동산이라는 영성훈련이 있습니다. 첫 시간에 배우는 노래가 데꼴로레스입니다. 색깔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저는 굉장히 열정적인 사람입니다. 제 색깔을 표현하라면 빨간색쯤 되지 않을까 생각되어집니다. 우리 가족의 내 자녀들이나 내 이웃의 모든 사람들이나 교역자들이나 장로님들이 모두 빨간색이길 원한다면 아마 교회가 지글지글 끓는 소리 때문에 앉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파란 색깔로 차분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얀색깔로 조화를 이루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노란색깔로 맛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색깔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을 하고 나면 부부간에 그렇게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갈등을 느끼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아프게 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결혼하고 나니까 아내와 저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먹는 것도 다릅니다. 식당에 가서 1인분만 시켜서 제가 안 먹는 것 아내가 먹고 아내가 안 먹는 것 제가 먹으면 딱 맞습니다. 저는 국 한그릇을 먹어도 건더기만 먹습니다. 아내는 국물만 먹습니다. 저는 뜨거운 것을 좋아합니다. 제 아내는 뜨거운 것을 못 먹고 식어야 먹습니다. 고기집에 가서도 저는 약간 덜익은 피가 살짝 보이는 것을 먹습니다. 아내는 빠싹 구워져야 먹습니다. 제가 고기를 먹다가 놓쳐서 새까맣게 구워진 것을 아내가 먹습니다. 다르다는 것이 이렇게 편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세상살이고 가정이고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우주만물을 만드시고 마지막 날에 아담을 만들었는데 아담은 남자입니다. 남자를 만드실 때 흙으로 빚어서 아담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드실 때는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흙은 땅입니다. 사물입니다. 세상입니다. 이게 인간 남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자는 땅으로부터 와서 땅을 향하여 살도록, 땅으로 만들어 져서 땅을 가꾸면서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문화적인 소명이 땅에 있습니다. 

남자들 모아놓으면 세상 돌아가는 얘기, 일 얘기, 정치 얘기 - 만든 재료 자체가 땅,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을 섬기면서 세상 얘기하면서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만든 재료 자체가 남자보다 고급입니다. 창조를 할 때보면 뒤로 갈수록 좋은 제품, 고급 제품이 만들어집니다. 남자보다 여자가 뒤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자가 좀 더 고급 제품입니다. 남자는 흙으로 만들었는데 여자는 재료 자체가 뼈입니다. 
인류 최초의 본차이나가 여자입니다. 여자들은 유지비가 남자보다 더 듭니다. 
사람으로부터 만들어져서 사람을 향하여 살도록, 타락한 이후에도 너는 남자를 사모하며 살리라.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리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만들어서 사람을 향하여 살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남자들이 제일 행복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일하는 그룹 안에 있을 때에 남자는 제일 행복합니다. 일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여자들은 일대일의 관계, 사랑의 관계안에 있을 때 제일 행복해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남자들은 밖에서 집에 전화할 때 “집에 별일 없지?” “일 없지?”라고 묻습니다. “일” 없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아내들이나 여자들은 밖에서 집으로 전화할 때 “얘들은?” 사람을 먼저 묻습니다. “당신 밥 먹었어?” 사람에 대한 배려가 먼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뇌를 만드는데도 오른쪽 반구와 왼쪽 반구가 역할이 다릅니다. 
오른쪽 반구는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사실과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고 분석하고 종합하고 활용하는 기능이 오른쪽 반구에 있다고 합니다. 남자들은 오른쪽 반구가 발달되어졌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논리적입니다. 성경을 듣더라도 성경 본문에 근거가 분명해야 되고, 의미 해석이 확실해야 되고, 그것을 적용하는 적용과정이 분명해야 됩니다. 기승전결이 확실하고 서론 본론 결론이 분명해야 됩니다. 
목장교재를 만드는데도 성경적인 근거가 있어야 되고 해석을 해야 되고 삶에 적용하는 관찰해석 적용이 분명해야 은혜를 받습니다. 남자들이 오른쪽 뇌가 발달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자들은 왼쪽 뇌가 발달했는데 왼쪽 반구는 창의적인 기능을 하는 곳입니다. 감성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곳입니다. 정보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기능을 하는 곳이 왼쪽 기능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남자들은 오른쪽 머리를 만지면서 골치가 아프다고 말합니다. 여자들은 왼쪽 반구는 가슴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가슴이 답답하다고 얘기합니다. 언제나 남자들은 사실 정보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고 여자들은 그것을 적용하고 창의적으로 바꾸는데 귀재들입니다. 

오래전에 제 친구가 사별을 했습니다. 금실이 너무 좋아서 평생 혼자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1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재혼을 한다고 합니다. 은근히 샘도 나고 화도나서 아내에게 얘기했습니다. “여보 그 친구 있잖아. 글세 그 친구가 재혼을 한다네.” 저는 오른쪽 뇌로 정보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제 아내는 왼쪽 뇌로 즉각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먼저 죽으면 당신 일년 내에 장가 갈 거지?”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오른쪽 뇌로 정보를 얘기했는데 제 아내는 왼쪽 뇌로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남자와 여자는 다르게 만들어 졌다는 것이지요.

조금 내려가면 소리를 내게하는 성대 기능이 있습니다. 
집에 가서 아내들이여 남편의 성대를 한번 만져보십시오. 굉장히 굵습니다. 여자보다는 세배쯤 더 굵게 되어있습니다. 목 전체가 성대로 만들어져있습니다. 남자들은 말 한마디를 하려면 복식호흡을 해야 됩니다. 아랫배에 힘을 주어야 되고 많은 바람을 뿜어내며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굉장한 에너지가 듭니다. 

집에 가서 남편들이여 아내들 목을 만져보십시오. 여자분들은 남자들 울림통보다 1/3밖에 되지 않습니다. 복식 호흡 자체가 없습니다. 가슴 발랑발랑 거리면 호흡이 되고 입만 열면 말은 튀어나오게끔 되어 있습니다. 남자들은 하루에 일 얘기를 하면서, 정치 얘기를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면서 1만 단어 정도를 사용합니다. 밖에 가서 1만 단어를 소비하고 나면 집에 와서 할 말이 별로 없다고 합니니다. 그런데 여자 분들은 말하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입만 열면 말이 나오니까 하루에 2만 5천 단어를 쓴다고 합니다. 일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개인적인 감정과 정서와 사랑을 나눌 때에 2만 5천 단어를 쓴다는 것입니다. 

남자분들은 말을 적게 해야 되니까 한번 생각하고 논리를 정리해서 결론을 만들어서 결론만 얘기합니다. 여자분들은 결론이 없습니다. 얘기하는 자체가 인생의 행복입니다. 논리가 없습니다. 말을 하다 보면 논리가 나오기도 하고 안나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자들은 말을 많이 하면서 정서들을 부드럽게 합니다. 여자들이 오래 삽니다. 남자보다 평균 수명이 7년 내지 8년 정도를 더 삽니다. 

우리교회 안에서 목장 안에서 매 주일 한번씩 모여서 한 주간 동안에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도 하고 당했던 유혹을 나누기도 하고 받았던 은혜를 나누기도 하고 실패를 나누기도 하고 느낌을 나누기도 합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굉장한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정서적으로 풍성한 세계를 가져다 줍니다. 육체도 건강해 집니다. 건강한 셀이란 것은 자기 상처를 드러내고도 그 상처가 다시 상처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약점과 허물을 들추어 내주고도 그것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게 건강한 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 목장과 가정은 아름다운 목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 사람을 나처럼 바꾸어 보려고 하면 상대방의 장점은 보이지 아니하고 단점이 너무나도 크게 보입니다.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면 상대방이 바뀌어 지기 시작합니다. 장점이 보이면 격려가 가능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에 나와 다른 것을 칭찬할 수 있고 인정할 수 있고 격려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 아이 둘 만 키우면 전혀 다르잖아요. 그때에 하나님이 만들어준 모습 그대로를 축복하면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 이 세상에서 춤추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입맛에 맞게끔 자녀들에게 잔소리하고 뜯어 고쳐서 살려고 하면 아이들은 위축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의 약점, 상처에 대한 배려가 가능해 지는 원리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다르게 만드셨다. 다르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다르다는 것은 서로를 축복하라는 뜻이다. 

이철환씨의 곰보빵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과 예화가 혹시 상처 받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신체적인 약점을 배려하고자 하는 예화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곰보빵 너는 아니?
너의 이름 때문에 상처받은 아이가 있다는 거...
못된 사람들이 아이의 아빠를 곰보라고 불렀어.
아이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곰보빵, 너를 먹지 않았어.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가
사람들은 너에게 
곰보빵이라는 이름 대신
소보로빵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지.
아이는 그때부터
곰보빵, 너를 맛있게 먹을 수 있었어.
사랑이란 거, 어려운 게 아냐.
예쁘다고 말해 주는 거
잘했다고 말해 주는 거
함께 가자고 손을 잡아 주는 거. 
그게 사랑이야.
활짝 핀 꽃처럼 그냥 한번 웃어주는 거
그게 바로 사랑이야.


곰보였던 빵 가게 아저씨에게 “곰보빵 주세요” 그 얘기를 하지 못했던 마음씨 착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곰보빵 주세요” 말을 하지 못해서 먹고 싶어도 한번도 그 빵을 사지 못했습니다. 언젠가부터 곰보빵을 소보로빵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아 그러면 되겠구나.’ 소보로란 말이 어려워서 집에서부터 빵 가게를 향하여 뛰면서 “소보로, 소보로 소보로...” 외치며 뛰었습니다. 빵 가게 문을 열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소보로 아저씨 곰보빵 주세요.”

실수했던 이 아이가 얄미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을 배려하고자 하는 이 아이의 마음이 아름답지 않습니까? 
서로의 약점이 있고 허물이 있고 실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르게 만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용납할 수 있는 완벽한 관계,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관계 - 이게 바로 가정이요 교회요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너희는 소금이 되고 빛이 되었다는 얘기는 윤리적인 얘기만은 아닙니다. 존재적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밝은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밝게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만 없으면 집안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가 아버지만 들어오면 화기애매한 가정이 있다고 한다면 그 아버지는 빛이 아니지요. 집안 식구가 걱정을 하고 있다가 아버지만 들어오면 집안 분위기가 밝아진다. 그건 빛입니다. 남편이 걱정된 얼굴로 집안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아내의 밝은 얼굴 때문에 식구들이 웃을 수 있다면 그 아내는 그 엄마는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밖에 있다가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집안 분위기가 밝아지고 웃음꽃이 필 수 있다면 그 아이는 가정에 빛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금이 되라는 얘기는 맛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내가 목장 안에 들어가면 목장이 밝아지고 목장이 맛있어 지고 행복해 질 수 있다면 그는 소금이 된 사람입니다. 내가 교회 안에 들어왔을 때 나 때문에 교회가 맛있는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다면, 목장 안에 내가 들어갔을 때 목장이 행복한 목장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소금이 되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보완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격려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나의 모자람을 네가 채워주는 것입니다. 너의 허물을 내가 덮어주는 것입니다. 네가 잘못하는 것 나는 잘할 수 있고 내가 잘못하는 것 네가 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곳이 가정이고 그곳이 목장이고 그곳이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관계를 오늘 성경 본문에서는 돕는 배필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부부관계는 돕는 배필입니다. 서로 잘못하는 것을 채워주라고, 약점을 덮어주라고, 서로 보완해주라고 돕는 배필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것입니다. 
목사와 교인들의 관계는 돕는 배필입니다. 류목사를 만들어준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서 만들어준 모습 그대로 여러분은 인정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만들어준 모습 그대로 여러분의 재능과 은사 그대로 인정하고 여러분을 훈련하고 격려하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은 꼭 맞는 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꼭 맞는 짝이란 요철처럼 내가 들어간 곳에 네가 나오고 네가 나온 곳에 내가 들어가 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꼭맞는 짝이란 것입니다. 이게 돕는 배필이요 너와 나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네가 들어간 곳에 내가 들어가 주는 것입니다. 나와 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다르게 만들어진 신비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은 아닙니다. 
나와 너, 우리 모두가 다르게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살맛나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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