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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승주일] 본을 보이는 스승 (요 13: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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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을 보이는 스승 (요 13:13~15) 
 
 
유대인의 랍비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가서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고 하였습니다(요 3:2). 니고데모 자신도 백성들에게 선생으로 존경받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예수님이 가장 위대하신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고 하였습니다(13절). 예수님은 인류의 선생님으로서 교훈과 삶을 통하여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본문말씀 15절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직접 보고, 배운 베드로는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21).

1. 완전하신 인간형입니다.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완전한 사람이 없습니다(롬 3:10). 예수님만이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 분만이 인간이 추구해야 될 이상형입니다.

1) 신성과 인성을 겸전하셨습니다.

신학적으로 신인양성(神人兩性)을 말하는데, 곧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요, 또한 완전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에 관하여 비중 있게 기록하였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사실을 취급하였고,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을 종으로 묘사하였지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을 태초부터 계신 분으로 소개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은 바 되었고, 그에게서 모든 생명의 빛이 비춰졌다고 하였습니다(요 1:1-4). 그 예수님을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18). 그분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을 두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였습니다(요 1:14). 이는 동정녀(童貞女)탄생을 말한 이사야의 예언과 같은 것입니다(사 7:14).

2) 인격(人格)의 모델이 되는 분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기의 형상을 모델로 하였습니다. 창세기 1:26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라고 하였습니다. 곧 예수님이 완전하신 하나님의 원형입니다. 성경 소요리문답에는 예수님의 성품을 지혜로우시고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며 무궁하시며 변하지 
않으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제4문답). 예수님이 아닌 그 어떤 사람도 이렇게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만 나은 점이 있어도 교만하여 남을 무시하며 군림하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하시고 온유하시고 무한한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포용하며 도와주시는 분입니다(히 4:15).

3)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야 됩니다.

에베소서 4:13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15절에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야 됩니다. 빌립보서 2:5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였습니다(마 11:29).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성품을 배우며 그의 삶을 본받아서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2. 모범을 보인 선생입니다.

본문말씀 15절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그의 백성들은 모두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본받아 실천함으로써 제자의 도를 지키게 됩니다.

1) 믿음의 본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음의 근원자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3:1에는 “우리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2:2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실체입니다. 역사적으로 오랜 시대에 걸쳐 많은 사람이 나름대로 믿음을 정의하곤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바르고 정확한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믿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1). 이 말씀이 성령의 감동에 따라 문서로 기록된 것이 성경입니다. 요한복음 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

2) 생활의 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제자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마 16:24). 이렇게 가르치는 선생님은 먼저 자기가 십자가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강론하실 때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 5:19). 예수님께서 가장 혐오하는 선생은 말로만 가르치고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대표적인 부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마태복음 23:3에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마 26:53-54). 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몸으로 실천하였습니다.

3) 섬김의 본이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0:45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목숨까지 내어주며 다른 사람을 섬기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섬김의 본이 되신 것은 그의 겸손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섬김을 받아야 될 신분이면서 섬기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과 모세의 관계를 비교하면서 예수님은 집주인의 아들이지만 모세는 하인이라고 하였습니다(히 3:5-6). 그런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지키신 것은 겸손한 모습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에도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였습니다.

3. 희망을 주는 선생입니다.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줍니다. 학문적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치기 전에 올바른 인간성을 길러 주고 또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꿈을 가꾸게 하는 사람입니다.

1) 희망을 잃은 세상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온갖 병자들이 다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천사가 목욕하러 내려오기를 기다
렸습니다. 천사가 목욕한 다음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뛰어드는 사람은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전설을 믿고 거기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입니다. 그곳에 오신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명하실 때 걸어가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희망을 가졌습니다(요 5:2-9).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것을 예언한 이사야는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고 하였습니다(사 9:2). 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죽음의 권세 아래 고통당하는 인간의 현장을 찾아 주시며 그 근본문제를 해결해 주시며 큰 소망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2) 사랑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의 어느 시골 학교에 들이닥쳐 유대인 어린이들을 잡아갈 때 ‘야누스 코르차크’라는 독일인 선생님은 아이들과 함께 트럭에 실려 갔습니다. 그는 가스실에서 죽음의 공포에 질려있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최후를 같이했습니다. 히브리서 4:15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모든 고난과 불행을 몸소 체험하셨고 또 승리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희망으로 와 닿는 것입니다. 수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예수’의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과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힘이 생깁니다. 

3) 부활과 영생의 표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도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바라보시면서 제자들에게 담대하게 받아들이도록 당부하였습니다(마 16:21). 그것은 십자가 죽음 이후에 있게 될 부활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밖에 달리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잠자는 것 정도로 생각하시고(막 5:39) 직접 죽은 자를 살려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있습니다.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살고, 영원히 사는 천당의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하루를 살더라도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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