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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칼과 거문고 (계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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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거문고 (계 15:1~4) 


우리삶에는 우리의 힘으로 건너갈 수 없는 삶의 홍해 바다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부터 출애굽한 후에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그 홍해 바다와 같은 우리의 힘의 한계를 느끼게 만드는 일들이 있습니다. 밤새워 진통을 겪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건너갈 수 있었던 그 홍해 바다처럼, 우리에게도 이렇게 진통 없이는 지나갈 수 없고, 그나마 진통을 겪고 나서 지나 라도 갈 수 있으면 다행인데 그것조차도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일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일시적인 문제들도 있지만 사실 더욱 큰 문제는 늘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누구에게 말할 수 없고 풀리지 않는 오랜 숙제와 같은 우울한 문제들은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에덴으로부터 추방되어 살아가게 되면서부터 시작된 당연한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때부터 고민하고 아파하고 고생하고 고난을 겪으면서 살아야만 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란 우리 실존의 현 주소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방치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도울 방법을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 있어야 할지를 헤아리십니다. 마치 아버지께서 내 자식이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펴보다가 아무 말씀도 없이 저녁에 들어오실 때 그것을 사서 오시는 것처럼, 우리가 무엇이 있어야 할지, 무엇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지를 말없이 살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주셨습니다. 황량하고 척박한 땅, 이제는 더 이상 에덴이 아닌 이 척박한 에덴 밖의 세상에서 살아야하는 우리를 위하여 뜨거운 피가 흐르는 짐승을 잡아 만든 그 더운 가죽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신 겁니다. 이것이 우리로서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홍해 바다와 같은 삶의 자리를 지나가야 하는 우리에게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 아십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우리 삶을 향하여 다시금 용기 있게 일어나야 할지를 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알고 계신 바로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홍해라는 삶의 바다를 마주 하고 서 있는 우리의 뒤에는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이집트의 군대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칼과 창을 들고 말을 달리며 우리를 뒤 쫓아 오는데 우리의 손에 무엇을 들어야 이 홍해바다를 지나갈 수 있을까요? 교우들을 만나서 삶의 현장 이야기를 들어보면 칼과 창이 아니라 그 보다 더한 것들을 들고 나를 향해 돌진해 오는 치열한 삶의 현장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삶의 자리가 참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라는 말씀을 넋두리처럼 하시는 걸 듣게 되는데, 이 홍해바다와 같은 삶의 바다에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이 홍해 바다 앞에 선 우리가 무엇을 들어야 할지를 생각하게 하고 그것을 준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의 손에 무엇이 있어야 할지 우리가 무엇을 들고 우리 삶의 한 가운데로 나아가야 할지를 말씀 안에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하면 먼 미래의 이야기, 죽음 이후의 절차에 대한 이야기라고 우리는 종종 생각하지만 사실 요한계시록은 묵시록으로서, 오늘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때로는 신앙 때문에 사회적인 선택이나 상황에서 핍박 받고 고난 받고, 때로는 내 삶에 내가 치여서 슬퍼하고 절망하기도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읽으면 읽을수록 그 따뜻하기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힘차고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거룩한 환상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우리는 힘겨운 삶에서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어 마지막까지 신앙으로 승리할 수 있는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5장은, 다음 장인 16장부터 시작되는 [믿음의 사람들을 끊임없이 주저앉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했던 악한 영과 사단의 세력을 결박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일곱 재앙] 이 시작되기 직전의 폭풍 전야와 같은 말씀입니다. 본문의 2절에서 사도요한은 자신이 본 환상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라고 말입니다. 붉게 빛나고 있는 천국의 홍해라고 할 수 있는 불이 섞인 유리바다의 한 편에 서서 그 손에 하나님이 주신 거문고를 들고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의 그 장엄한 모습을 사도요한은 환상 가운데 보고 있는 것입니다. 

불이 섞인 유리 바다의 한 편에 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의 모습은 마치 홍해를 마른 땅을 밟고 지나듯이 지난 후에 기뻐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홍해를 건너기 전에는 두려움과 절망이 그들을 엄습해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들을 인도해 내셨고, 바로의 군대에게 쫓기던 그 긴 밤은 너무나 길고 두려운 밤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셨음을 보았듯이, 천국의 홍해 바다 앞에서도 성도들은 끝까지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거문고를 연주하며 찬양하고 있는 바로 그 환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그 옛날 이집트에서 내 백성을 데리고 나오실 때도 우리 손에 칼과 창을 쥐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삶의 자리를 지나가는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칼과 창을 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칼 대신 거문고를 들게 하고 창 대신 그들의 손뼉을 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할 수 없는 우리에게 무엇을 들고 나가서 싸우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고백했던 것처럼[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사무엘하17:47)] 전쟁이 여호와께 속했기에 어떤 삶의 자리에서도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이 환상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노래도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노래도 모두 다 그 옛적부터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마지막 날까지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우리의 싸움인 칼과 창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을 찬양하는 일임을 환상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찬양해야 하는 것도 알고 찬양하면 얼마나 좋을지도 압니다. 그런데 그게 되지 않는 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찬양하라고 찬양하라고 말하면 그리고 해야 한다고 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압박하면 찬양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안 됩니다. 해야 하는지 몰라서 못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는데 되지 않아서 안 그래도 답답한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감사하게도 요한계시록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찬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어디에 찬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찬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찬양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찬양하는 성도들의 환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이 환상이 바로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를 기뻐 뛰게 하는 것입니다. 환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환상은 곧 계시입니다. 환상과 계시는 하나님께서 주실 때에만 볼 수 있는 것이며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환상과 계시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이 환상과 계시가 있는 동안 신앙인은 숨을 쉴 수 있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9장 18절은 [계시가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즉 환상이 없으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이 생명의 환상을 보고, 그 환상을 요한계시록을 통해 전해주고, 그 요한계시록을 읽는 사람들이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보았던 그 환상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을 가로 막고 있는 홍해라는 삶의 현실 앞에 서서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칼과 창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 환상을 보는 성도는 결국 삶의 모든 거칠고 황량한 상황들을 이겨내고, 유리 바다 한 편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들의 대열 그 사이 사이에 끼어서 거문고를 들고 우리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환상을 보아야 하고 계시를 보아야 합니다. 환상을 보아야 그 환상이 우리의 삶이 됩니다. 만일에 우리에게 환상이 없고 이 땅의 교회들에 계시가 없다면 우리도 이 땅도 이미 망한 사람이며 망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쉽게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 환상, 이 계시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에도 수 없이 우리에게 그 분의 계시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계시에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분별력을 가지고 본다면 말씀에서 찬양에서 기도에서 사람들과의 간단한 대화에서도 하나님께서 내 안에 이미 두신 내 마음의 소원과 간절한 바람에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듯이 하나님의 계시 또한 계시는 하나이지만 그 계시의 표현은 천의 얼굴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계시에 환상에 넉넉하신데 문제는 우리에게 분별력이 훈련 되지 않아서 [환상 속에서도 환상이 없다고 목이 타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물건이 보이면 사야 된다는 생각도 하고 지금쯤 사거나 지금쯤 팔면 이익이 되고 손해가 된다는 것도 알면서, 지금쯤 이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끌고 나가면 되고 안 되고도 알면서, 직장은 얼마나 더 다녀야 하고 남편에게 아내에게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면서 정작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그 환상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영적 무분별이라는 심각한 중병에 걸린 듯이 삽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병인지도 모르는 이 영적 무감각이, 이것이 우리의 아픔이며 우리의 비극입니다.

누구라고 처음부터 잘 할 수 있을까요? 처음엔 이 영적 감각이 모자랄 수도 있고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틀릴 수도 있고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감각이 훈련될 통로조차 없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을 내 신앙과 내 삶의 홍해 바다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삶은 내 삶대로 힘들고 내 신앙은 내 신앙대로 계시가 없고 환상이 없기에 무미건조한 신앙에 머무르고 말게 됩니다. 그러므로 삶 속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그 묵상한 말씀으로 기도하는 이 말씀의 훈련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실 말씀의 환상을 사모할 예배의 자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꿈의 사람] 그러면 누가 생각나십니까? 그렇습니다. 요셉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단순한 꿈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 즉 환상의 사람이었고 계시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요셉은 자신에게 주시는 계시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주시는 계시까지 포착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훈련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꾼 꿈이 어디 평생 동안 곡식단의 꿈과 해와 달과 별의 꿈만 이었겠습니까? 아마 매우 많은 꿈을 꾸었을 것이고 그 중에 어떤 꿈은 참 맞기도 했지만 아마 우리가 많이 꾸는 개꿈도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꿈을 꾸는 아이었지만 처음엔 문제도 많은 아이었습니다. 창세기 37장 2절을 보면 철도 들었을 만한 나이인 17살에도 배 다른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주는 고자질쟁이였습니다. 얼마나 촐랑촐랑 거리는지 뭘 꾸고 나면 참지를 못하고 가서 다 쏟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물론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는 일이었지만 형들 미움 받고 고향 떠나 멀리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잘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이 꿈, 환상이요 계시인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에게 온 이 소중한 하나님의 신호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가슴에 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은혜가 더욱 풍성하도록 자신을 다듬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소통의 통로를 늘 유지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계시에 밝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어디에 있든지(39:2, 3)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았습니다. 어린 요셉 앞에, 꿈 많은 요셉의 인생을 막고 서 있는 삶의 그 붉고 거친 홍해 바다가 얼마나 두려운 것이었습니까? 그러나 요셉의 꿈이 요셉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꿈이었기에 그 어떤 삶의 홍해 바다고 요셉을 삼킬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매일을 살아야 하는 여러분의 삶의 홍해 바다가 하나님의 환상과 계시로 풍성하여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 홍해바다를 지나가는 동안 칼과 창을 들고 여러분의 싸움을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문고를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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