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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받는 사람 (슥 8: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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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받는 사람 (슥 8:13~17) 


[유다 집과 이스라엘 집은 들어라. 이전에는 너희가 모든 민족에게서 저주받는 사람의 표본이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너희를 구원할 것이니, 너희는 복 받는 사람의 표본이 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힘을 내어라!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너희 조상들이 나를 노하게 하였을 때에, 나는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작정하고, 또 그 뜻을 돌이키지도 않았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기로 작정하였으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하다. 서로 진실을 말하여라. 너희의 성문 법정에서는 참되고 공의롭게 재판하여, 평화를 이루어라. 이웃을 해칠 생각을 서로 마음에 품지 말고, 거짓으로 맹세하기를 좋아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다. 나 주가 말한다.]

• 전환에의 기대
스가랴는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던 유다 사람들 가운데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스가랴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그에게 주님의 말씀이 임한 시기는 주전 520-518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대략 중단되었던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재개되던 시기와 일치합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지요? 그리던 조국 강토를 다시 보고, 자유의 새 땅에서 살게 된다는 설렘도 잠시, 귀환 공동체는 철저하게 파괴된 삶의 터전을 일구느라 지쳤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해 백성들을 위로하시면서 그들의 운명에 극적인 전환이 있을 것을 예고하십니다. 

예언자는 역사의 의미를 해석할 혜안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스가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시련은 하나님이 무력한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언약을 배반한 백성들의 불순종에 대한 징계였다고 말합니다. 언약을 배반했다는 말은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는 제1계명을 어기고 우상들을 섬겼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안전과 풍요로운 삶을 보장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다운 삶의 길로 인도합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자신을 ‘히브리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과 눈물을 헤아리시면서, 그들의 살 권리를 되찾아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사람들이 ‘홀로’ 행복한 세상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이루도록 우리에게 촉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상들은 우리를 일차원적인 욕망의 포로가 되게 만듭니다. 우상은 욕망과 두려움을 숙주로 하여 우리 삶을 지배합니다. 하나님을 등진 사람들의 파탄난 삶을 스가랴는 간략하게 요약합니다.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악한 일을 도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거룩할 ‘聖’ 자를 생각해보십시오. 귀 ‘耳’ 자 옆에 입 ‘口’ 자가 있고, 그 아래에는 ‘일을 맡기다’는 뜻의 ‘任’자가 변형된 아홉 번 째 간지를 뜻하는 ‘壬’자가 있습니다. 

입 ‘口’는 옛날에 신의 뜻을 묻기 위해 축문을 담아두는 그릇을 형상화한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그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命을 모르면 군자라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순간순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경청하려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명이란 이웃과의 어울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탄나면 이웃과의 관계도 파탄나게 마련입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잠17:5)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등진 이스라엘은 이웃과의 관계가 파탄난 무정한 사회가 되어 징계를 받았고, 그 결과는 땅이 황무지로 변했다는 것이 스가랴의 가르침입니다.

• 가없는 사랑
하지만 예언자는 이제 복역의 때가 끝났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엄연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망의 심연에 이른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스가랴는 백성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이렇게 전합니다. 

“나는 시온을 열렬히 사랑한다. 누구라도 시온을 대적하면 용서하지 못할 만큼 나는 시온을 사랑한다”(8:2).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 가운데서 살겠다고 다짐하십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이 성전을 떠나는 비전을 본 바 있습니다. 우상숭배의 소굴로 변한 성전을 떠나시는 주님의 영을 본 것은 에스겔만이 아닐 것입니다. 눈을 뜬 사람이라면 누구든 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스가랴는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내가 시온으로 돌아왔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살겠다.”(8:3)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들의 삶의 자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겠다고 하십니다.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은 추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 당신의 장막을 마련하시는 분이 성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너희가 사는 땅, 곧 내가 머물러 있는 이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민35:34) 하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비루한 욕망이 지배하는 이 예토(穢土, 더러운 땅, 이 세상)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십니다. 이 땅을 거룩한 생명의 자리로 바꾸시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제 시온을 ‘성실한 도성’, ‘거룩한 산’(8:3)이라고 새롭게 명명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법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죄 가운데 사는 우리들을 ‘성도’로 여겨주십니다. 이 사랑을 깊이 깨달은 사람은 이전처럼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마음을 나눈 사람들을 가리켜 ‘내 친구’(요15:15)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십니다. <이름값을 하며 살고 싶다>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성도’라는 이름값에 합당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주님이 거처로 삼으신 그 땅의 평화로움을 스가랴는 아름답게 그려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예루살렘 광장에는 다시, 남녀 노인들이 한가로이 앉아서 쉴 것이며, 사람마다 오래 살아 지팡이를 짚고 다닐 것이다. 어울려서 노는 소년 소녀들이 이 도성의 광장에 넘칠 것이다.”(8:4-5)

‘한가롭다’는 말과 ‘어울려서 논다’는 말이 사무치게 좋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 삶을 돌아볼 성찰의 시간조차 마련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 뭔가에 쫓기듯 사는 우리들입니다. 그렇기에 ‘한가롭게’라는 단어는 정서적으로 큰 울림이 되어 다가옵니다. 그런데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많은 이 시대에 ‘어울려 노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건강한 사회의 표징으로 제시하는 스가랴의 예언이 생뚱맞은 느낌도 있습니다만, 사람은 상호 소통하는 어울림 속에 있을 때만 참 사람일 수 있습니다. 

• 신분의 역전
주님은 약속하신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동쪽 땅과 서쪽 땅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 그들을 예루살렘에서 살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언약을 갱신하신 후 성실과 공의로 다스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게 될 때 그 땅에는 긍정적인 변화가 시작됩니다.

먼저는 그들의 산업이 복을 받을 것입니다. 뿌린 씨는 잘 자라고,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고, 땅은 곡식을 내고, 하늘은 이슬을 내릴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황무지로 변했던 땅의 회복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됨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스가랴는 굉장한 복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땀 흘린 만큼의 대가를 얻고, 또 그것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세상이야말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세상입니다. 저는 며칠 전 1200일이 넘는 기간 동안 복직투쟁을 하고 있는 기륭전자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다운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고,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은 생에 대한 비애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조금 시선을 돌리는 젊은이들이 출현하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만든 틀 속에서 살려니 숨이 막힙니다.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희망제작소의 박원순 변호사는 “젊은이들이 철밥통 직장을 원하는 사회는 미래의 비전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호의호식하고 출세하겠다는 욕구를 버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겠다는 꿈만 가져도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는 것입니다.

스가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이스라엘이 이전에는 저주받은 사람의 표본이었지만, 이제는 복 받는 사람의 표본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말은 그들의 역사적 경험의 빛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게 무너지고, 유다가 바벨론에게 무너지면서 그들은 저주받은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절망의 자리야말로 새로운 희망의 자리입니다. 

스가랴는 귀환 이후의 공동체가 남과 북의 경계를 지우고 하나가 되는 비전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보람은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면제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그것을 아름다운 삶의 계기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으시는 분이 주님이시니 말입니다. 살다보면 정말 어려운 일을 많이 겪게 마련입니다. 앞에서 말했던 박원순 변호사는 시민운동을 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을 어린 시절의 경험에 빗대 인상적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아버님이 논을 갈기 위해 써레질을 해요. 소에 쟁기를 달아서 그 위에 우리더러 타라고 했어요. 그래야 땅이 깊이 갈리거든요. 그런데 돌 위로 지나가면 우리 몸이 덜컥하잖아요. 개척 초기 단계에는 곳곳에서 돌이 계속 돌이 나오는 겁니다. 돌을 계속 바깥으로 던져내야 온전히 흙으로만 된 풍요로운 땅이 된단 말이에요. 그 돌에 쟁기가 걸려 덜컥 하는 느낌, 그 느낌을 시민운동하면서 매일같이 느꼈어요. 절망을 일상으로 느껴요.”(박원순․지승호, <<희망을 심다>>, 224쪽)

우리가 원하는 세상,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가는 길에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쟁기에 걸린 돌을 하나하나 골라내면서 땅을 가꾸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 신앙적 응답
주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런 비전을 주시면서 거듭 하시는 말씀은 ‘힘을 내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입니다. 영어성경은 이 구절을 Let your hands be strong이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손을 든든히 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사실 거룩한 전쟁의 맥락에서 사용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나서는 용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할 수 없다는 말처럼 사탄이 좋아하는 말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서로를 깊이 존중하는 세상을 이루는 것이 주님의 뜻임이 분명하다면, 그 길은 이미 주님께서 열어가고 계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이 이미 마련하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의 비전을 주신 주님은 이제 그의 백성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가르쳐줍니다.

“서로 진실을 말하여라. 너희의 성문 법정에서는 참되고 공의롭게 재판하여, 평화를 이루어라. 이웃을 해칠 생각을 서로 마음에 품지 말고, 거짓으로 맹세하기를 좋아하지 말아라.”(8:16-17)

‘진실을 말하라’로 권하시는 까닭은 진실만이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는 말씀을 잘 아시지요? 나는 ‘진리’라는 추상적인 말 대신 나는 ‘진실’ 혹은 ‘진정’을 대입해보면 이 말씀의 의미가 잘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진실한 사람, 진정의 사람은 아무 것도 가릴 것이 없습니다. 물론 진실과 진정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부정에 이르러야 합니다. 쉽지 않지만 그 길만이 영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입니다. 

성문 법정에서 참되고 공의롭게 재판하여 평화를 이루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크게 들려옵니다. 신영철 대법관이 ‘촛불 재판’에서 판사들에게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던 일 때문에 판사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검사들의 법 집행을 두고도 논란이 많습니다. 법이 존재하는 까닭은 사실 강자들의 폭력에 의해 약자들이 유린되는 일을 막기 위한 것일 텐데, 지금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엄정한 법질서를 확립한다’는 말에 사람들이 코웃음을 치는 것은 법이 공의롭게 집행되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일 것입니다. 대화와 협상이라는 절차를 배제하고 법대로만을 외칠 때 세상은 냉랭한 곳으로 바뀌게 마련입니다. 성경이 특히 재판의 공정함을 새로운 세상의 초석으로 보는 까닭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이들을 보호할 책임이 재판관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동원하고, 이웃들을 해칠 생각을 품고, 법질서를 교란하고, 거짓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슴에 품고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땀 흘리는 이들이 많아질 때, 새로운 세상의 여명이 밝아올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꿈을 실현하는 전초기지가 되어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복 받는 사람의 표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 교우들이 이 척박한 역사의 자갈밭을 옥토로 바꾸기 위한 실천에 많이 동참하고 헌신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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