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로마로 가니라" (행 28:11~31)

  • 잡초 잡초
  • 626
  • 0

첨부 1


"로마로 가니라" (행 28:11~31)


로마 사람들은 길을 잘 닦기로 유명했습니다.
당시 로마 군대에는 공병이 있었고 이들의 기술은 다방면에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군은 새 점령지가 생길 때마다 공병을 동원하여, 물론 노예의 노동력도 이용했겠지만, 새로운 도로들을 닦아서 로마와 연결되도록 했습니다.
그 도로들은 말이 끄는 전차 두 대가 서로 비껴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 있는 폭이었고 판판하게 다듬어진 돌로 덮인 일종의 포장도로이기도 했습니다.
또 로마 사람들은 '도로는 일직선이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철저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똑바른 길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산을 깎아내고 깊은 계곡에 다리를 놓는 등의 난공사들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로들이 군대 이동이나 보급을 신속하고 용이하게 함으로써 로마의 식민지 통치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소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Rome.)라는 유명한 말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가 평생 소원해 왔던 로마에 드디어 발을 디디게 됩니다.
그 바울이 로마로 갈 때 실제로 밟았던 길이 바로 그처럼 로마 군인들이 닦아 놓았던 길이었습니다.
본문 15절에 나타나는 "압비오"란 말이 바로 저 유명한 'Appian Way'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오늘날까지 보존되어서 관광의 명소가 되고 있는 바로 그 길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아피아 가도'를 따라 로마에 입성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지나갈 때에 그 길은 단순한 고속도로 이상의 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사도행전을 마감하면서도 총집대성하는, 실로 뜻 깊은 길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갔던 길, 그 길은 과연 어떤 길이었습니까?
오늘 총회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세계선교의 진짜 총재이신 우리 예수님의 주도 하에 땅끝까지 이르고 있는 복음전파의 길은 과연 어떻게 중단 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전도자를 격려하며 지원하는 성도들이 함께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1절로부터 15절의 말씀에 "11석 달 후에 그 섬에서 과동한 알렉산드리아 배를 우리가 타고 떠나니 그 배 기호는 디오스구로라 12수라구사에 대고 사흘을 있다가 13거기서 둘러가서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난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러 14거기서 형제를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유하다가 로마로 가니라 15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멜리데 섬에서 "석 달" 동안 과동한 후에 다시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 배", 즉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출발하여 로마까지 곡물을 실어 나르던 배로서 지금까지 바울 일행이 타고 오다가 파선당한 것과 똑같은 종류의 배를 또 하나 만나서 거기 승선하게 됩니다.
"그 배의 기호는 디오스구로라"고 했는데 이는 '쌍둥이 형제들'이란 뜻입니다.
제우스신의 쌍둥이 아들들인 Castor와 Pollux라는 두 신들은 당시 뱃사람들의 수호신으로 여겨지고 있었는데, 지금 바울이 탄 배의 뱃머리에 그 두 신들이 조각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배를 타고 멜리데 위에 있는 시실리 섬의 수도 "수라구사"(Syracuse)를 거쳐 이탈리아 반도의 "레기온"을 둘러서 드디어 "보디올"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보디올은 로마 시의 외항으로서 서울로 치자면 인천항과 같은 곳에 해당되었습니다. 

거기서 "형제를 만나"라고 했는데, 이는 두말할 것 없이 기독신자들을 뜻합니다.
이미 로마에는 오순절 때 예루살렘에 방문 왔다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신자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 중에는 로마에서 조금 떨어진 이 보디올에 살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성도들이 바울을 청하여 그가 거기 머물렀던 일주일 동안 그를 대접했습니다.
즉 이 보디올의 신자들은 말하자면 사도 바울의 로마 입성에 대한 제1차 환영 위원회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보디올을 떠나 아까 언급했던 "압비오" 가도를 따라 로마로 가던 중 바울은 두 그룹의 성도들로부터 또 환영을 받게 됩니다.
"압비오 저자"란 로마 시에서 남쪽으로 약 60km 지점의 압비오 가도 선상에 있던 유명한 광장을 가리키는 말인데, 거기에서 사도 바울은 제2차로 그를 맞이하려고 나와 있던 "형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삼관(三館)"이란 '세 여인숙'(The Three Taverns)이란 뜻의 지명인데, 역시 로마 시에서 남쪽으로 약 50km 되는 곳의 압비오 가도 선상에 있던 곳으로서 오늘날로 치자면 고속도로 곁의 휴게소와 같은 곳이었는데, 거기에서도 바울은 또 다른 한 무리의 성도들로부터 환영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작 로마에 들어서기 이전에 그 곳 성도들로부터 무려 총 3차에 걸친 환영을 받게 되었던 사도 바울은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사례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사도 바울로서는 생전 처음 오는 로마였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전도 여행지가 될지도 모르는 곳이었습니다.
아직까지 죄수의 신분으로 쇠사슬에 묶여서 오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길에서 그는 자기를 그처럼 극진히 환대해 주는 성도들을 수차례나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는 감사를 드리고 자신은 담대한 마음을 얻게'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산 넘고 물 건너 낯선 땅에 왔는데 뜻밖에 이런 든든한 응원부대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사도 바울이 얼마나 사기백배했겠습니까?

'발에 차이는 것이 목사'라는 관념이 이 사회뿐 아니라 교회 안에까지 펴져 있습니다.
교인들조차 신학생들을 흔하게 여기고 오랜만에 모교회를 방문한 선교사를 귀찮게 여기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자기편의 대표선수의 사기를 푹 꺾어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께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교역자들을 항상 반가이 맞이해 드려야 하며 최고로 존중하고 대접해 드려야 합니다.
그런 성도 한 사람을 만나게 될 때 목사의 마음 깊은 곳에서 얼마나 뜨거운 감사의 사례가 일어나면서 자신의 목회에 새 힘을 얻게 되는지 모릅니다.
신학교 입학을 격려해 주는 성도의 한 마디 말 때문에 그 목사후보생은 더욱 경건과 학문에 매진하게 되며, 병 치료나 입국 비자 재신청 때문에 귀국한 선교사를 알아보는 성도의 인사 하나 때문에 그 선교사는 그야말로 사기충천하여 복음 전선을 향하여 다시 힘차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사자들을 언제 어디서 만나더라도 반가이 영접하고 극진히 대접해 주는 영적 지원부대가 됨으로써 복음 전파의 길을 더욱 탄탄하게 포장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모든 고난과 핍박 중에도 끝까지 복음전파에 충성하는 전도자가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16절부터 23절까지 말씀에 "16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17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 준 바 되었으니 18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놓으려 하였으나 19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함이요 내 민족을 송사하려는 것이 아니로라 20이러하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노니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21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22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하더라 23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평생 그처럼 간절히 가고 싶어 했던 곳, 꼭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던 로마에 드디어 도착한 것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을 받는 일종의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가서 재판 날짜를 기다리게 됩니다. 

그런 중에 바울은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 즉 로마에 거주하던 유대인 공동체의 지도급 인사들을 "청하여"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 내용은 바로 이 사도행전의 앞 장들에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이 그들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의 초점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기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바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고 있던 하나님의 약속, 즉 메시아의 도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론 바울은 그 소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이들에게 전해 주려는 의도에서 이 말을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바로 그 한 가지 사명 때문에 바울은 지금 '쇠사슬에 매인' 자신의 처지를 기꺼이 감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쇠사슬에 묶이는 정도만 아니라, 여러 번 투옥당하고 재판 받고 매도 맞고 돌로 맞기도 하고 파선의 위험까지 겪는, 그야말로 파란만장이요 설상가상의 길을 지금까지 걸어왔던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기조연설을 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은 "우리가 당신에 대하여 별달리 특별한 소식을 듣지는 못했지만"이라고 전제하면서 그러나 "이 파에 대하여서는", 즉 기독교라 불리는 이 새로운 종파에 대하여서는 유대 사회와 로마 도시 곳곳에서 "반대를 받고 있는 줄"로 알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제까지의 전도 사역에 가장 큰 방해자는 어디를 가나 항상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자기를 잘 알지 못하는 이 로마의 유대인들까지도 이미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내지는 거부감을 가지고 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기가 죽거나 물러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자를 정하고" 많은 유대인들을 지금 자기가 연금당해 있는 집에 불러 앉혀 놓고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온종일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했습니다.
또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즉 구약 성경의 주제인 '오실 메시아'의 예언을 가지고 "예수의 일" 즉 신약 복음의 주제인 '오신 메시아'를 전파했습니다. 

실로 바울이 중생 받은 후에 걸어 왔던 길은 오직 이 한 길, 이 외길뿐이었습니다.
쇠사슬에 매이는 고난 속에서도 오직 이스라엘의 소망을 전파하며, 온 민족의 반대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예수님이 곧 메시아이심을 선포하는, 바로 이 사명 하나 지키면서 이제까지 걸어왔던 길이었습니다.
바울의 그와 같은 전도자의 길은 로마에 와서도 조금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전도자의 길이란 결코 순조롭고 평탄한 길은 아닙니다.
'예수쟁이가 되면 부모 앞에 제사도 드리지 않는 불효자식이 되더라.'는 반대가, '교회 가면 그저 연보하라는 소리밖에 안 하더라.'는 비난이 일선 목회자들의 전도와 심방 길에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망쳐 놓는 풍토병과 그 자녀들을 미개발 사회에서 교육시켜야 하는 방해물들이 선교사들의 앞을 항상 막아서고 있습니다.
만약에 전도자들이 이런 불신자들이 하는 소리에 오히려 주눅이 들고, 중생 받지 못하고 지옥 갈 사람들의 말에 지레 겁을 집어 먹는다면 어떻게 복음전파가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경찰관이나 소방대원도 목숨을 내어놓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는데, 순교까지 각오해야 할 사람이 자기 생활 걱정조차 극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참된 교회가 세워지며 구원받을 백성이 거기에 모일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전도자들이 그런 첩경 앞에 그냥 겁먹고 물러섰더라면 복음은 로마가 그냥 종착역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전파의 현실은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기독교가 유대인 민족의 한 종파로 끝나지 않고 오늘 이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까지 전파된 것은 사도 바울과 똑같은 자세로 섬긴 수많은 전도자들이 그 길을 계속 이어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계선교의 마지막 종착지를 향하여 그 길이 이어지고 있는 이때에 문자 그대로 '죽도록 충성하는' 각오로 이 길에 앞장서서 오직 '이 길 따라서 살 길을 온 세상에 전하는' 목사와 선교사들이 우리 교회와 고려신학교를 통하여 끊임없이 배출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이르는 세계선교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24절 이하 28절까지에 기록하기를 "24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25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전도를 들은 유대인들 중에는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믿지 않는 쪽이 훨씬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어서 인용한 이사야서의 예언이 바로 복음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즉 결국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예언하신대로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복음을 먼저 "이 백성에게 가서" 즉 유대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친히 3년 동안이나 전해 주셨습니다.
성령 강림도, 첫 교회 설립도 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또 이방 지역 선교가 시작되었을 때에도, 사도 바울은 그 지역의 유대인 회당에 가서 먼저 전도했습니다.
그것은 이 로마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복음 전파의 새로운 국면이 개시되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첫 장 8절에 기록된 말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이 말씀이, 이제 이 끝장 28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는 이 말씀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장면입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도, 곳곳의 이방 지역에서도 그처럼 자기네들에게 먼저 전파된 복음을 오직 '완악한 마음'과 '둔한 귀'와 '감은 눈'으로 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유대인들의 거부반응이 이 로마에서도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을 보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보내시는" 시기가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던 것이었습니다. 
즉 복음 전파가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한 민족을 넘어서서 더욱 넓게 세계를 향하여 본격적으로 퍼져야 할 단계에 도달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바로 그 세계선교를 향한 시발점이 됩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잘 닦여진 도로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로 올 때까지 뿐 아니라 나중에 거기서 서바나로 다녀올 때에도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영어처럼 당시 어디를 가도 통하던 공용어 헬라어는 사도 바울을 위시한 초대 선교사들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도 복음을 전파할 수 있던 최고의 '방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당시의 그 막강한 로마 권력이 유지해 주던 '팍스 로마나'의 치안과 평화, 이것 역시 그런 전도자들의 여행과 활동을 안전하게 보장해 줌으로써 복음이 급속도로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실로 완벽한 길을, 참으로 탄탄하고도 똑바른 대로를 일찍부터 닦아 놓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속사'라는 위대하신 계획 속에 이미 다 포함되어 있던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교회의 교인들이나 사도 바울이 그 '아피아 가도'를 걸어가기 훨씬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땅끝까지 이를 복음전파의 길을 이처럼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그리고 '로마에서 세계로' 철두철미하게 그려 놓으시고 닦아 두셨습니다.
로마인들은 기껏해야 '지중해 연안의 모든 길'들만 로마로 통하게 만들어 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상 곳곳의 모든 길'들을 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땅끝까지 이르는' 세계선교로 통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처럼 하나님께서 닦아 놓으신 길을 통하여 온 유럽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섬나라 영국으로 건너갔으며 대서양을 넘어 미국으로, 그리고 이제는 지구를 반 이상 돌아서 우리나라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세계는 많이 변했고 각 나라와 민족에는 온갖 사건들이 일어났지만, 그 어떤 것도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를 돌아가면서 전파되는 길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도면을 그려 놓으시고 미리 다 완공해서 준비해 두신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 다시 예루살렘 쪽으로 계속 나아가는 길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친히 진두지휘하실 길이 아니겠습니까?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로마에서부터 이 지구 반대쪽까지 세계선교의 길을 이끄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남아 있는 길 역시 이미 다 예비해 두신 줄을 믿고 그 '땅끝까지 이르는' 복음전파의 '압비오 가도'를 함께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끝으로 30절과 31절 말씀을 보면 "30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후에 바울은 "자기 셋집" 즉 자기가 스스로 주거비용을 내는 집에서 살게 되었음을 볼 때 좀 더 자유가 허용된 상태에서 "온 이태" 즉 만 2년을 로마에서 지냈습니다.
그는 이 기간 중에 계속 "하나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전파하면서, 또한 지금은 옥중서신으로 불리는 성경, 즉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등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바울의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서는 아무 언급이 없이 끝을 맺고 있습니다.
추측컨대, 바울은 그런 연금 상태로 2년을 지난 후에 석방되었고 그 후에 그가 기회만 되면 가고 싶어 했던 '서바나 전도 여행'(롬 15:24)을 떠났던 것 같습니다.
그 후에 마게도냐, 아가야 지방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거기서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기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는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 시에 다시 체포되었고 그 옥중 생활 중에 마지막으로 디모데후서를 쓰고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그런 이야기를 다 끝내지 않고 여기서 갑자기 끊겨져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주제가 만약 '바울의 행적'이라면 물론 이상하다고 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바울 개인에 대한 전기가 아니라 '신약 교회의 설립과 세계를 향한 복음 전파'가 그 주제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이것은 조금도 이상하거나 어색한 종지부가 아닌 것입니다.
이제 당시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그 로마가 닦아 놓은 길을 통하여 전 세계를 향하여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로마에서 시작된 세계 선교는 유럽을 거쳐 영국으로, 영국에서 미국을 지나 우리나라로, 그래서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28장 31절 이후에 이어질 뒷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이 써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치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사도 바울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기독 신자들입니다.
바로 이 시대에 복음을 먼저 전해 받고 이제 아직도 이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전파해 주어야 할 사명을 받은 저와 여러분들이야말로 이 사도행전을 계속 이어가야 할 주인공인 것입니다.

선배 전도자들이 이제까지 똑바로 걸어온 길, 유일한 구원의 복음을 여기서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버릴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이처럼 잘 포장해 온 길, 참된 진리의 길을 이 대한민국을 통과하면서 진창길로 만들어 버릴 수 없습니다. 
순교자들이 그 피를 흘려 이제까지 연결해 준 이 2천 년 기독교회사의 길을 우리가 공사 중단해 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될 소리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세계를 향한 복음 전파의 길을 계속 이어갈 때에, 이 사도행전은 결코 중간에서 미완성으로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 재림하실 때에 그야말로 대단원의 막을 멋있게 내리는 완벽한 '행전'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땅끝까지 널리, 그리고 속히 전파되기 위해서는 정말 '로마로 통하는 길'과 같이 잘 닦인 길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도자들이 첩첩산중의 외로운 길을 가는 나그네같이 고독한 걸음을 걷고 있을 때, 우리는 그들을 길가에서라도 영접하고 대접하는 성원의 길을 닦아야 합니다.
독선주의자라는 비난, 정치가들의 종교탄압과 같은 방해물들이 가득한 길이지만 참된 전도자들은 그런 것들을 다 무너뜨리고 사명감으로 탄탄히 포장된 대로를 닦아야 합니다.
공산주의나 이슬람교가 치고 있는 철의 장막들 앞에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막힌 길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세계 끝까지 반드시 이어지도록 계획해 놓으시고 추진하고 계시는 길이며 또한 반드시 완성하고야 마실, 인류 역사상 최대최고의 공사가 바로 이 세계선교의 길인 것입니다.
똑바른 길, 잘 포장된 탄탄한 길, 산을 깎고 다리를 놓고 굴을 뚫어서라도 어찌하든지 땅끝까지 연결해 가야 할 길, 세계를 향한 복음 전파의 이 길을 오늘도 계속 닦으며 함께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