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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을 살리는 일과 죽이는 일 (막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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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막 3:1~6)

  
케나다 몬트리올에 4살 난 로널드란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마침 부모님이 이 어린이를 두고 잠시 밖에 나간 사이에 이 로널드는 먹어서는 안 될 수면제를 집어 먹게 되었습니다. 로널드는 수면제를 많이 먹고 혼수상태에 빠집니다. 잠시 후 아이를 발견한 부모들은 즉시 앰뷸런스를 불러 병원으로 호송했습니다. 그러나 치사량에 가깝게 많은 양을 먹었기 때문에 이 아이가 살지 죽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고민에 빠져있을 때 의사 중에 한 사람이 이 수면제에 대한 해독약이 나왔다는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약을 공수하기 위해서 미국 뉴욕으로 전화를 걸어서 그 약을 급히 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케나다 까지 싣고 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마침 몬트리올 공항으로 가는 뉴욕발 비행기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를 구할 약을 수송하기 위해서 모든 승객과 승무원이 탄 채로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린 생명을 구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약이 급히 공항으로 실려 왔고 비행기에 실어졌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의 비행 후에 그 약은 케나다 몬트리올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대기해 있던 차로 그 약을 실고 병원으로 가져와서 그 로널드라는 어린아이에게 투여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그 어린아이는 혼수상태에서 빠져나오게 되었고 의식을 회복하고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협력이 한 어린 생명을 위기에서 건져낼 수가 있었습니다. 역시 생명을 살리는 일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약 1년 전에 우리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인천 공항을 출발해서 비행기가 외국을 향해서 날아갔는데, 출발한 지 몇 분도 안 되어서 기내의 한 어린아이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위급했습니다. 이 아이를 그냥 태우고 목적지까지 간다면 이 아이는 죽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조종사는 어려운 결단을 했습니다. 바쁜 승객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조종사는 기내방송을 통해서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비행기를 돌립니다. 그리고 가득 싣고 있는 기름을 바다에 다 던져버립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3천만 원어치가 넘는 기름을 다 쏟아 붓습니다. 왜냐하면 착륙할 때는 기름이 거의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리고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이 아이는 앰뷸런스에 실려서 병원에 가서 응급처치를 받고 생명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생명이란 이처럼 존귀한 것입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존귀합니다.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함이라’고 우리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오셨고, 그 일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또 그렇게 행동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3장에서도 생명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거기에 마침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손 마른 사람은 직업이 석수장이라고 합니다. 돌을 가지고 조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돌을 가지고 예술품을 만들고 집도 짓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의 오른손에 마비증세가 왔습니다. 피가 돌지 않고, 신경이 죽어버리고, 손이 오그라들어버렸습니다. 성경에서는 손이 말랐다고 표현합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이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와서 예수님께 사정을 했습니다. “저를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십시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예수님이 어떻게 하는가?’ 하고 바라보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고,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양자 간에 결정을 해야 합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지금 막 숨을 거두어가는 사람조차도 어떻게 좀 응급조치를 할 수 있지 살만 하면 내버려두어야 했습니다. 사람을 치료하는 행위는 다 노동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상황 속에서 이 사람을 치료하기로 결심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하고 명하였더니 그가 손을 내밀 때 곧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 때문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시험에 들었습니다. “아니, 예수가 안식일도 안 지키고 노동을 해. 사람을 고쳐. 건방지군.” 예수를 죽이려고 그들은 헤롯 당원들과 모의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간략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본문 속에서 우리는 많은 도전과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잘못된 안식일 법을 바로잡아 주길 원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3장 직전에 2장 23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보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그 밀 이삭을 몇 개 까먹었습니다. 그랬더니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어겼다. 이삭을 자른 건 추수행위고, 이삭을 비벼서 먹었으니 그것은 탈곡행위다.”라는 것입니다.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 하십니까? “너희가 다윗의 이야기를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서 도망가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성전에 들어갔는데, 아비아달이라는 제사장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배가 너무 고픈데 음식 좀 주십시오.” 그랬더니 그곳에도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단에 늘 놓는 떡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진설병이라고 하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갈아놓게 됩니다. 이 진설병은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아달은 이 굶주린 무리들을 위해서 그 떡을 기꺼이 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불리 먹고 길을 떠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예를 들면서 그 당시 아무도 다윗을 비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너무나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는 것은 안식일 법을 뛰어넘는 사랑의 법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정의해 주십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이렇게 행동하는데 너희가 왜 시비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안식일 법을 재정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7일째 하나님께서 쉬시면서 온 인류에게 안식을 주셨습니다. 마음껏 쉬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입니다. 지금은 안식일을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로 바꿔서 지키고 있습니다. 주일에는 가능하면 육신적으로 쉼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고 말씀을 들음으로써 영혼의 쉼을 얻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모든 얽매임에서 자유 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쉼을 누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 하는 날입니다. 이것이 원래 안식일의 목적입니다. 자유와 해방이며 쉼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은 너무 율법을 많이 연구하다보니까 안식일을 잘 지키려고 ‘안식일에는 몇 Km이상 걸으면 안 되고 몇 Km 이내로만 걸어야 해.’ ‘안식일에는 너무 무거운 물건을 들면 그것도 노동이니 안식일에는 몇 Kg 이하의 물건만 들어야 해.’ 이런 법을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 법이 오히려 사람을 혹사시키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괴롭게 만드는 억누르는 법이 되었습니다. 안식일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법만 215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복잡하니 그 법을 누가 다 지키겠습니까? 그 법을 못 지키면 죄인입니다. 정죄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법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때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들에게 자유와 해방과 쉼을 주려는 목적이 본질에서 벗어나 인간을 혹사시키고 죽이고 비판하는 법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은 다 죄인이었습니다. 양치는 목동들은 다 죄인입니다. 목동이 양을 안 지키면 누가 양을 지킵니까? 사람은 안식일에 안식하지만 양은 꼴을 주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안식일 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다 죄인입니다. 인간 취급을 못 받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억누르고 인권을 말살하는 법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리새인들도 따지고 보면 원래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시딤’이라고 아주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그들은 오히려 나라를 바로 지키는 길이 율법을 잘 보전하고 지키는 것이라 생각해서 아주 경건하게 생활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흘러가면서 그들이 변질되었습니다. 안식일의 본래의 의미는 잃어버리고, 율법의 본질은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가지고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남을 공격하는 사람으로 타락해 버렸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율법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먼저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 다음은 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 율법은 사랑의 법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가지고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그런 법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진짜 안식일 법의 내용은 인도적입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신명기 23장 24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따 먹어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라.” 배고픈 사람은 굶어죽는 것보다는 지나가다가 포도나무가 있으면 포도열매 몇 개 따 먹고 연명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따 가지고 그릇에 담아가지고 오면 도둑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 됩니다.

지나가다가 너무 배고파서 남의 곡식밭에 들어가서 밀 이삭을 조금 따 먹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그것을 낫으로 잘라가지고 오는 것은 도둑질입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또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따고 남은 것은 그대로 두라. 그러면 객과 고아와 가난한 과부들이 지나가다가 그것을 주어먹고 그것을 따서 그들의 생명을 보전할 것이 아니겠느냐.” 

성경의 율법이라는 것은 굉장히 인도적이고 인간적이고 사랑 중심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공격하고 정죄하는데 이 율법을 사용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이웃을 향한 아름다운 인간애가 날마다 불꽃같이 솟아오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정신이고, 성경의 정신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3장 1절, 2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참 안타깝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주목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저 사람을 고치기만 해봐라.’ 참 답답합니다. 안식일에 고통당하는 사람을 고쳐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텐데. 참 안타깝습니다. 왜 이렇게 변질되어 버렸을까요?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가 있습니까? 무서운 일입니다. 6절 말씀을 봅시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 하니라”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주목하고 있다가 예수님이 개의치 않고 고통당하는 사람을 치료했을 때 그들이 시험에 단단히 들었습니다. 마음이 더욱 완악해져가지고 그들은 어떻게 예수를 죽일까 모의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헤롯당과 정치적 이해가 전혀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를 죽이기 위해 손을 잡았습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국제사회는 영원한 원수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고 합니다. 이익이 될 수만 있다면 원수와도 손을 잡는 것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바리새인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를 죽이기 위해 헤롯당과 결탁하고 손을 잡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예수님은 오늘 이 손 마른 사람을 일어나게 하고 앞으로 나오라고 하고 중앙에 세웁니다. 그리고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4절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바리새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중에 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유구무언,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양심에 약간의 찔림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회당에 예배하러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고발하러 왔고, 사람을 죽이기 위해 왔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사람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것은 세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물어봐도 다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 주일은 참 좋은 날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은혜를 받는 날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면 우리 자신이 늘 작아 보입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 우리가 누구나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 십자가 앞에 서면 내가 얼마나 정말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참 감사하고 고마운 날입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헌금을 드리고, 기쁨으로 찬양을 드리고, 말씀을 듣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떤 분들은 주일 독거노인 돕기에 참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정말 바쁘신 분들이 시간이 쪼개어서 주일 오후라도 손으로 그들을 돕고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때로 우리가 바리새인과 같은 마음을 가져서 예배에 기쁨보다는 ‘이거 누가 왔나? 예배를 제대로 드리나? 저 사람은 저 모양을 하고 무슨 예배를 드린다고.’ 이렇게 자꾸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된다면 오늘 하나님이 보시고 얼마나 안타까워하실까요? ‘저건 예배자의 모습이 아닌데…….’ 교회에 오면 ‘늘 사랑하라, 용서하라.’ 말을 듣는데 저렇게 마음에 죽이려는 악심을 가지고 있다니 너무 답답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변질되어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로 사람을 죽이기가 제일 쉽습니다. 말을 잘못 하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저 자신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모두가 늘 조심해야 합니다. 생각지도 않은 말로 툭 던졌는데 상대방에게 큰 상처가 되어서 그것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부모들도 그렇습니다. 가능하면 자녀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어떤 부모는 아이가 성적표를 가지고 왔는데, “야 이놈아! 이걸 공부라고 했냐? 나가 죽어라.” 그랬더니 이 아이가 그 말을 곧이듣고, 그렇지 않아도 맘이 상해 죽겠는데 부모의 말을 듣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뛰어 내려 죽어 버렸습니다. 이 말 한마디가 그 귀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알파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납니다. 어떤 아이가 성적표를 받아가지고 집으로 왔습니다. 엄마가 마침 나물을 다듬고 있습니다. 이 아이가 지혜로운 아이입니다. “엄마! 질문이 있어요.” “뭐냐? 질문해 봐라.” “엄마는 음악가가 좋아요? 미술가가 좋아요?” 엄마는 “음악가면 어떻고 미술가면 어떠냐? 난 네가 뭐가 되던 다 좋아!” 그랬습니다. “그래요! 엄마, 여기 성적표 좀 보세요.” 보니 음악 ‘가’, 미술 ‘가’였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뭐라고 말을 못 했다고 합니다. 음악‘가’도 좋고, 미술‘가’도 다 좋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녀가 성적표를 가져 왔는데 국어, 산수 다 양이었습니다.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부모가 한 마디 했습니다. “야! 너는 이렇게 양이 많은 거 보니 앞으로 양을 많이 키워서 목장주가 되겠구나. 앞으로 이것을 위해 기도해 봐라.” 그랬더니 그 아이가 격려를 받고 정말 양을 많이 키워서 큰 양떼 목장을 운영하며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죽이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격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이 사람을 살려 냅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을 같이 읽어 봅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지켜보든 안 보든 개의치 않습니다. 그분이 오신 목적은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도둑은 도둑질하고 멸망시키려 왔지만 인자가 온 것은 생명을 주려 하되 풍성히 주려 함이니라.” 이것이 예수님의 오신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악의 자리에서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부활절 아침에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오늘 이 사람을 향해서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손이 깨끗하게 회복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치료행위를 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말씀으로 “손을 내밀라.”고 했는데 손이 깨끗하게 치유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것에도 시험이 들어서 어떻게 예수를 죽일꼬? 하고 모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손은 어떤 손입니까? 혹시 말라비틀어진 손이 아닙니까? 여기에는 굉장한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손이 있으되 영적으로 말라버린 손이 있습니다. 온전히 봉사하지 못하는 손, 전도하지 못하는 손, 남을 일으켜 세우지 못하는 손, 온전히 헌금하지 못하는 손, 이것이 다 말라버린 손입니다. 오늘 이런 손들은 주님 앞에 이 손을 내밀어서 치유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손은 치유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손이 되어야 할까요?

이제는 생명을 살리는 손이 되어야 합니다. 의사의 손만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귀한 손은 전도자의 손입니다. 한 영혼을 주님께로 전도할 수 있다면 그것처럼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천사들은 롯의 가정을 손으로 붙들고 그들을 그 심판 받는 자리에서 이끌어 내었습니다. 이런 손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낙심한 자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손, 절망한 자들에게 소망을 주는 손, 격려하는 손, 축복하는 손이 있습니다. 요셉은 손을 들어서 자녀들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손이 그런 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묻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악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주님 앞에 나와서 우리 영혼이 잘 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그것이 귀한 일이고, 그것이 주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고, 생명을 살리는 일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예수 사랑 큰 잔치 50일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손이 이 50일 동안 집중해서 정말 생명을 살리는 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손이 되셔서 주님 앞에 한없는 영광을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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