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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께서 주시는 결말을 보라 (약 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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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주시는 결말을 보라 (약  5:7~11)

(약5:7-11)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1.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가 물속에 진주를 빠뜨렸습니다. 이 사람은 배가 육지에 닿자마자 큰 바가지로 바닷물을 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사흘 동안을 끈기 있게 물을 퍼내고 있을 때 물 속에서 거북이가 올라와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얼 하려고 물을 긷고 있소?” “바닷물 속에 빠트린 진주를 찾으려고 물을 푸고 있소.” “그런데 그 일은 언제까지 할 생각이오?” “물론 이 바닷물을 다 퍼낼 때까지 하지.” 이 말을 들은 거북이는 깜짝 놀라 물속으로 급히 들어가서 진주를 찾아다가 그 사람에게 돌려주었다고 합니다. 바다 물속에 빠진 진주를 찾기 위해 바닷물을 다 퍼내고자 하는 자세로 인내하여 욥과 같이 “주께서 주신 결말”, 즉 “그전 소유보다 갑절”(욥42:10)이나 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 오늘 본문에서 “인내하는 자가 복되다.”고 했습니다. “주께서 주신 갑절의 복된 결말”을 볼 수 있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주의 강림하시기 까지 길이 참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심판자로 다시 오실 때가지, 세상이 망할 때까지, 죽을 때까지 참으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까지 참아야 하느냐 어느 때까지 참아야 하느냐 하는 물음에 끝까지 참으라, 인내는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질문합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이에 예수께서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18:21-22) 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이라는 숫자에 제한을 두지 말고 무제한적으로, 끝없이 용서와 사랑을 베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제한이 없고 끝이 없습니다. 

이처럼 인내 역시 주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다시 오실 때까지 끝없이 참으라는 것입니다. 농부가 열매를 바라며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듯이 인내해야 합니다. 팔레스틴에서 ‘이른 비’는 10월에서 11월에 오는 비를 가리키며 ‘늦은 비’는 4월에서 5월간에 오는 추수 직전의 비를 말합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열매를 맺는 데 있는 반드시 필요한 비입니다. 농부가 생명과도 같은 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리라는 약속을 굳게 믿어 기대하고 인내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바라보며 길이 참아야만 합니다. 

농부는 수확을 할 때까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비가 오지 않을 때도 비를 기다리고 바람이 불 때도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참고 인내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익지 않은 곡식을 거두어 먹을 수는 없습니다. 농부가 열매를 맺게 할 수도 없고 열매를 익게 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수고하고 땀 흘려 일하면서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기다릴 뿐입니다.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의 유월절엔 꼭 등장하는 노래 한 곡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마민’이라는 아름다운 노래인데, 아니 ‘아니마민’이란 히브리어로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가 작곡된 곳은 놀랍게도 공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이 곡을 만든 사람도 그곳에 감금된 불행한 유태인이었습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리란 걸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늦게 오십니다.” 그즈음 젊고 유능한 한 유대인 외과 의사가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가스실과 실험실을 향해 떠나는 동족들의 죽음의 행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자신도 가스실의 제물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강제노역 시간에 이 젊은 의사는 흙속에 파묻힌 깨진 유리병 조각을 몰래 자신의 바지 주머니 속에 숨겨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아침과 저녁이면 으레 그 깨진 유리의 날카로운 파편으로 면도를 했습니다. 오후가 되면 나치들이 와서 가스실로 보낼 처형자들을 골랐습니다. 나치들은 유리병 조각으로 피가 묻어날 정도로 파랗게 면도된 의욕에 넘치는 외과의사의 턱을 보고 차마 그를 가스실에 보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잘 면도된 파란 턱으로 인해 아주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선입감을 주었기 때문에 나치들은 그를 죽이는 것은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나치가 완전히 패망할 때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그가 살아서 그 죽음의 수용소를 떠날 때 그의 소지품은 단 한 가지 그 깨진 유리병 조각이었습니다.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렸던 유태인 의사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은 결코 늦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할 뿐입니다.”

베드로는 성도 여러분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약속을 지키는 데 더디신 분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오래 참으셔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 날을 기다리며 하나님 앞에서 흠 없는 깨끗한 생활을 하여 평안한 마음으로 그분을 뵙도록 노력하십시오. 우리 주님이 오래 참으시는 것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아십시오.” 베드로 후서 3:8-15입니다. 

(벧후3:8-15)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에게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와 같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약속을 지키는 데 더디신 분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오래 참으셔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갑자기 올 것입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천체는 불에 타서 녹아 버릴 것이며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이 타서 없어질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렇게 녹아 버릴 텐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 날에는 하늘이 불에 타서 없어지고 천체도 그 열로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정의만이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 날을 기다리며 하나님 앞에서 흠 없는 깨끗한 생활을 하여 평안한 마음으로 그분을 뵙도록 노력하십시오. 우리 주님이 오래 참으시는 것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한 것임을 아십시오. 

어느 목사님이 주일 예배를 끝내고 목양실에서 잠시 묵상에 잠겨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요란한 전화 벨 소리가 울리는 것이었습니다. 불길한 생각을 하면서 수화기를 들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교회 어느 집사님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어 병원 응급실에 있다는 전화였습니다. 부랴부랴 그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다른 데는 크게 이상이 없었지만 얼굴부위는 붕대를 두룬채 겨우 한쪽 눈만 내어놓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너무 급하게 당한 일이기도 하고 또 얼굴상처가 너무 심한 것 같아 뭐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하고 목사님은 그의 손을 잡고 그저 “집사님 어떻게 된 일이십니까?” 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조용히 목사님 얼굴을 바라보면 그의 한쪽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면서 얼굴을 감은 붕대를 적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으면서 차분히 가라앉은 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목사님! 염려 마세요.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오래 참으신 것이지요.” 

그 집사님의 짧은 말속에서 목사님은 깊은 의미를 알듯하여 더 이상의 말을 하지않고 서로 손을 잡은 채 침묵만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오래 참으신 것이지요.”라는 집사님의 말 속에는 감사와 함께 어쩌면 당연히 일어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고를 통해서 그가 볼 수 없었던 과거를 한 눈으로 보는 것 같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래도 버리지 않고 지키셨다는 감사가 서려있는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오래 참으셨습니다.” “오직 너희를 대하여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 원하시는”(베드로 후서 3:9)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길이 참되 “마음을 굳게 하여” 참으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의 말씀에 마음을 고정하고 길이 참으라는 뜻입니다. 여기 “굳게 하라”는 말씀에 해당되는 헬라어 ‘스테릭사테’는 출애굽기 17: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 오지 아니한지라.”는 말씀에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과 전쟁할 때, 여호수아는 전장(戰場)에 나가 싸우고 모세는 산에 올라가 기도합니다. 이때 모세가 손을 높이 들어 기도하면 이스라엘 군대가 이기고 그 팔이 내려가면 이스라엘 군대가 패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모세의 팔이 피곤하여 내려오지 않도록, 그것도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도록 아론과 훌이 양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습니다. 

모세의 기도하는 손이 내려가지 않도록 받쳐 주고 지지했다는 단어가 바로 “굳게 하라”는 말과 같은 단어, ‘스테릭사테’(stand firm, stablish your hearts)입니다. 마음을 굳게 하되 주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의 말씀에 굳게 하여 인내하므로 “주께서 주시는 축복의 결말”을 보고 누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릴 때,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 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의 뜻을 설명하실 때,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8:5-15)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 깊이 내려 어떠한 유혹과 시련에도 마음을 굳게 하여 인내하므로 마침내 백배의 결실을 맺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마음을 굳게 하여 참을지라도 서로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하면서 참는 것은 “주께서 주시는 축복의 결말”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서로 원망하지 않으면서 인내할 때 심판을 받지 않게 됩니다. 원망은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참을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참지 못하는 자가 원망을 하는 법입니다. 우리 인간은 다 부족하기 때문에 완전한 이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지극히 부분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도 불완전한데 내가 남을 아는 것이야 얼마나 불완전 하겠습니까? 이웃에 대해 충분히 안다면 원망보다는 사려 깊은 이해가 나오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남을 판단해서도 안되고 남을 원망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너무 빨리 결정적인 말을 잘합니다. 우리는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흥분부터, 원망부터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티는 보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려고 하니까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기까지 참고 기다려야만 합니다. 원망은 믿음에서 떠난 육적인 행동입니다. 원망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이 무서운 원망이 입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에 있어서 인내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19에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고, 전도서 5:2에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은 원망이 쏟아지지 않도록 말을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10:10-11을 통해 이렇게 원망에 대해 경계하고 있습니다.

(고전10:10-11)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이 말씀의 배경은 민수기 21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길에 지름길로 가지 않고 멀고 험한 길로 돌아가게 되자 고생길을 참지 못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이렇게 원망 불평을 쏟아냅니다. ‘왜 우리를 애굽에서 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이려 하시오? 여기는 먹을 것도 없고 마실 물도 없지 않소? 이제 이 지겨운 만나도 신물이 나서 못 먹겠소!’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독사를 보내시자 원망 불평하는 사람마다 물려 죽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세에게 와서 ‘우리가 하나님과 당신을 원망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없애 주십시오.’ 하고 애걸하자 모세가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뱀에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고 살게 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두었는데 뱀에 물린 자마다 그 놋뱀을 쳐다보고 살아났습니다.(민21:4-9) 세워진 놋뱀을 쳐다보며 자신의 원망 불평한 죄를 회개한 사람은 모두 살아났습니다. 원망 불평의 죄를 지었다면 회개해야만 합니다. 

민수기 16:47-50을 보면, 고라 자손(성전에서 찬양을 담당하던 자손)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와 아론을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고 반역을 꾀하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고라 자손들이 죽임 당한 것을 정치적 분쟁으로 여기면서 고라 자손의 죄악과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 무려 14,700명이 심판받아 염병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뜻대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가정이든 사회이든 누구를 막론하고 원망 불평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는 죄악인 것입니다. 심판하실 하나님께서 이미 여러분 문밖에 계십니다.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음을 믿으시고 범사에 감사하며 길이 참으시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갈 때에 시므이란 자가 다윗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계속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이 때 다윗의 신하 아비새가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하며 시므이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말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16:5-14) 

다윗은 범사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를 믿고 자신에게 일어난 엄청난 환난에 원망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소망하며 인내했습니다. 이러한 다윗은 마침내 반란군이 정복되고 이전보다 더욱 더 공고한 왕권을 확립하고 나라를 더욱 부강하게 만들게 되었습니다. 도살의 날, 심판의 날이 없다면 세상은 너무나 불의하고 불공평한 것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부활하심으로 진리가 살아있음을 증거하신 예수께서 세상 끝날에 심판주로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세상은 비록 불의와 불공평할지라도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 도살의 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으며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 911 테러 때 한 성도는 15분 차이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는 세계 무역 센터의 부회장으로 워싱턴에 살았는데 그날 그 장소에서 열리는 중요한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습니다. 너무 중요한 모임이라 밤늦게까지 회의를 준비하고 침실로 가니까 평소에 몸이 약한 아내가 커피를 마신 후에 잠을 못 자고 뒤척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내에게 “나도 커피를 끊을 테니 당신도 커피를 끊으라!”고 짜증을 냈습니다. 다음날, 그는 늘 습관처럼 마시던 커피를 마시지 않고 그냥 집을 나섰습니다. 

공항에 도착해서 보통 때는 바로 탑승했지만 그 날은 커피를 사러 잠시 상점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커피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어 짜증을 내며 커피 대신에 얼음을 채운 딸기주스를 마셨습니다. 그리고 뉴욕 공항에 예정대로 8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평소 같으면 바로 차를 탔지만 바로 전에 마신 딸기주스 때문인지 속이 뒤틀려 화장실로 가서 15분을 지체했습니다. 그리고 차를 타고 세계 무역 센터에 접근하면서 한 임원에게 15분 늦는다고 전화했습니다. 

바로 그때 통화 중이던 임원이 “불이다. 여길 나가야 한다.”고 하면서 급히 전화를 끊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위를 올려다보는데, 바로 그때, 머리 위로 한 대의 여객기가 전 속력으로 달려오면서 세계 무역 센터의 두 번째 건물을 정면으로 들이받았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돌진한 장소가 바로 자신이 회의에 참석하려는 장소였습니다. 

만약 그때 그가 15분을 지체하지 않았다면 그는 영락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결국은 아내가 뒤척인 것, 커피 줄이 긴 것, 딸기주스를 먹고 설사한 것이 그 순간에는 짜증난 일이었지만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이 살려주시려고 그 순간이 있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당시에는 손해가 되고 짜증나는 일도 나중에 선이 되고 축복의 재료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난과 아픔 중에도 원망하지 말고 선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때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나 환경, 누구를 향해서도 원망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선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힘든 처지를 원망하면 고난의 물줄기는 더욱 굵어지지만 현재의 힘든 처지에서도 감사하면 하나님은 고난의 물줄기를 축복의 물줄기로 극적으로 되돌리실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라”(고전13:4-7)고 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진실로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십니까? 가정에서 부부나 부모 자식 간에 서로 원망하지마시기 바랍니다. 심판하실 하나님께서 문 밖에 계십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서로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거룩한 집입니다. 심판하실 하나님께서 문 밖에 계십니다. 선하신 하나님 앞에 범사에 감사하며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길이 참아 사랑의 복된 열매, “주께서 주시는 축복의 결말”을 보고 누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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