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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자녀를 바르게 양육 (잠 13:24, 23: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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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바르게 양육 (잠 13:24, 23:13~14)
 

시작하는 말

꽃이 참 예쁘죠. 꽃이 너무 예뻐서 밖에 그냥 둘 수 없어서 이 제단에 여기에 세워 두었는데, 문제는 꽃이 너무 예쁘니까 사람들이 꽃만 쳐다 보게 될 것 같아서 여러분, 꽃보다 남자를 보시고 오늘도 강단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에 큰 은혜되는 시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잘 아시듯이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이 주일은 어린이를 귀하게 여기도록 강조하는 주일입니다. 어린이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는 주일입니다. 어린이날 하면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입니다. 그 분은 어린이 인권 운동가요, 아동문학가요, 어린이 교육가로서 어린이를 위해 일생을 바치셨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만한 20세기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위인입니다. 그 분은 아동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린이'라는 존칭어를 만들었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여 지켜오다가 1938년 일제의 탄압으로 잠시 동안 폐지되었습니다. 8·15해방 이후, 1946년부터 날짜를 5월 5일로 바꾸어 어린이날 기념행사를 재개했는데, 1957년 제35회 어린이날을 기점으로 당시에 내무부, 법무부, 문교부, 보건사회부의 4개 부처 장관의 명의로 어린이헌장을 공포하여 어린이에 대한 기본사상을 재정립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어린이 교육은 많이 강조되고 있지만 "어린이 신앙교육"은 교회나 가정에서, 특히 믿는 자들의 가정에서도 강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나라의 희망은 아이들입니다. 교회의 희망도 아이들입니다. 가정의 희망도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육체를 소유한 자녀는 부모의 희망이며, 행복한 가정의 시작입니다. 자식농사의 실패는 곧 가정 실패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자식들로 희비가 교차되고 가정의 내일을 결정하게 됩니다. 모든 부모가 자식에게 희망을 걸고 그 자식으로 가문의 장래를 위임하지만 잘못된 자식으로 부모의 희망을 상실하기도 하고 가정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요즈음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아끼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이 도서관에 있고 학원 안에 있으면 훌륭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충실하게 보내면 이후에 대단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수학을 잘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공부를 잘한들 무엇에 쓰겠습니까? 나중에 부모를 알아보겠습니까? 하나님이 두려운 줄을 알겠습니까? 자녀를 신앙인으로 키우기 위해 하나님 방법의 양육이 필요합니다. 그 방법을 함께 생각하며 오늘 주신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우려 보시기 바랍니다. 

몸 말

심리학자들은 말합니다. 일상생활 중 90% 이상의 행동은 습관으로 움직인다고 합니다. 우리가 비슷한 행동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습관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특히 어릴 때 길들여진 습관은 어른이 되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말하기를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나봅니다. 이처럼 한 번 길들여진 습관을 고치기란 쉽지 않으니 어릴때부터 좋은 습관을 길러 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신앙적인 측면에서 매일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 주어야 합니다. 

습관은 인생을 움직입니다. 우리의 행동 중 90%이상이 습관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러한 일상의 습관이 우리의 미래를 창조합니다. 습관을 보면 그 사람의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습관을 결코 가볍게 볼 것이 아닙니다. 습관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습관이 되기 전에 바른 행동을 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의 본문의 말씀은 사랑의 매를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가르치기 위해 사랑의 매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다스려 절제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 사랑의 매가 필요합니다. 어려서부터 좋은 신앙의 습관을 길러 주기 위해 사랑의 매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잠언 13장 24절은 자식을 징계하지 못하는 자와 그 자식을 징계하는 자에 대한 평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여기에서 초달(楚撻)은 ‘종아리 칠 초’와 ‘종아리 칠 달’이 합하여진 단어입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버이나 스승이 징계를 하기 위하여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매를 아낀다’는 것은 징계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매를 든다는 것은 자식을 엄히 교육한다는 의미입니다. 

교육의 목적은 분명히 바르게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훈계의 채찍을 드는 것은 부모의 의무입니다. 부모들은 자녀의 어떤 행동은 허락할 수 있으나 어떠한 행동은 제지하는 결단과 초달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부모들은 자신들이 교훈하고자 하는 것을 바르게 확신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떨때는 기분이 좋을 때는 그냥 두었다가, 기분이 나쁘면 못하게 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지 말고 분명한 자기자신이 가지고 있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체벌하는 깊은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식이 잘못하였을 때 초달을 하고 매로 치고 채찍으로 자식을 다스리는 일은 곧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같이 자식에게 초달을 하는 일은 잠언 23장 14절에 보면 자식을 음부에서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매를 들어야 할 때에 사랑이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체벌하는 문제에 대해서 찬반의 논의가 있습니다. 물론 초달을 하고 매를 들어 체벌하는 일이 교육수단으로써 최선의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자녀들을 생명을 위협하는 혼란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자녀를 참으로 사랑하는 부모는 어린 자녀들이 바른 행실을 익히고 복된 삶을 살도록 회초리와 질책, 징계와 훈육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잠언 23장 13,14절을 보면 자녀를 사랑한다고 자식의 욕망대로 키우지 말고 훈계하며 키우라는 말씀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함은 부드럽고 달콤하게 대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잘못에 대해서는 깨달을 수 있도록 엄격한 훈계와 초달을 하며 키우라는 것입니다. 잘못에 대한 적절한 징계는 바른 길로 인도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애정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부모들은 인정에 치우쳐 자녀들의 욕망을 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 쯤은…󰡑이라고 묵인하고 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작은 잘못의 묵인이 모아져 훗날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무감각한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요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함은 편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녀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어떠한 환경 속에 있든지 주님의 손이 닿는 자녀로 키우는 것이 가장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으로 길러야 하지만, 자녀에 대한 사랑을 옳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그저 보호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훈련을 시키는 것이며, 거기에는 체벌이 따르게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 23:13~14)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자녀들을 훈계할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 의미는 단순히 "교훈"의 의미가 아닙니다. 일종의 징계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녀를 교육함에 있어서 매를 사용할 것을 말합니다.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매질하는 문제는 신중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훈계와 체벌이 강조되면 자녀들이 위축되고 마음속에 반항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체벌을 무시하면 버릇없고 무례한 아이로 키우게 됩니다. 그래서 훈계와 사랑을 어떻게 조화 있게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4절에서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교육적인 방법이 아니라 주의 가르침인 성경의 말씀에 따라 양육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자녀들이 훈계가 없이 자라나게 됨으로 아이들이 예절도 모르고 위에 있는 권위도 무시하는 것을 종종 보곤 합니다. 때로는 너무 억압을 당하여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찬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청소년 범죄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가는 것이 오늘날의 현상입니다. 오늘날의 부모들은 자녀가 잘못을 범하였을 때 거기에 대하여 너무 관대합니다. 예의범절이 없어도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체벌을 모르는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자녀에 대하여 부모의 교육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래서 자녀문제는 사회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모들은 훈계를 잘 사용하여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 잠언 13장 24절과, 23장 13-14절은 이렇게 자녀나 학생의 교육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훈육의 방법으로 이 두 본문은 공통적으로 ‘매’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매’ 는 권위의 상징이자 징벌의 도구입니다.

징계는 하나님이 그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주요 교육수단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징계의 하나님입니다. 자신에게 죄를 지은 자들을 징계하여 고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할 때마다 하나님은 이방 민족이라는 매를 사용하여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였습니다. 앗수르도 바벨론도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한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였습니다.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던 이들 나라들이 하나님이 정한 정도를 넘는 징계 행위를 가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오히려 이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통하여서 ‘매’는 단순히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제한적으로 시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이 체벌의 정당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이때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첫째 ‘매’가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매’가 선한 목자의 손에 들려질 때만이 생명을 가져다주는 도구가 됩니다(시23:4). 이것은 부모이든 교사이든 가르치는 자가 학습자를 어떻게 대하느냐를 간접적으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둘째, 성경에서 체벌 대상은 지혜없는 자(10:13), 아들(13:24), 거만한자(19:25), 어리석은 자(17:10), 젊은이(22:15)로 말합니다. 이들에 대한 체벌 요구는 말로만 이루어지는 교육에 효과가 없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체벌은 일반적인 교육방법이 아니라 수정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고통이 수반될 때에야 비로소 행동을 수정하고 개선하게 되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체벌은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교육수단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를 든 사람의 더 크고 중한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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