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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집에서 효를 행하여 (딤전 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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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효를 행하여 (딤전 5:3~8)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시어머니가 광 열쇠를 며느리에게 넘겨준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당시 집에서의 광이란 쌀이며 땔감 등 여러 생필품들이 저장되어 있던 곳이었으니 그 광 열쇠를 며느리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곧 집안의 경제권과 살림살이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광 열쇠를 며느리에게 넘겨주는 날이 옛날의 어머니들에게 있어서는 은퇴식이나 마찬가지였으며, 그 후에는 그저 자식들이 부모 봉양해 드리는 것이나 편안하게 받으면서 사시는 것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오늘날 식으로 따지면, 아파트 명의나 저금통장 따위를 넘겨주는 것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은 그처럼 자식에게 '광 열쇠를 넘겨주는 것'을 너무 일찍 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부모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물려줄 만한 것을 일찍 다 주어 버리면 오히려 자식들이 부모 봉양을 더 등한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산 받을 것이 좀 남아 있을 때에는 자식들 간에 서로 다투어 부모님을 모시겠다고 하지만, 만약 상속할 재산을 일찍 다 주고나면 명절에 인사하러 들르는 발걸음조차 뜸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자식들이 다 그렇겠습니까마는, 부모 효도라는 것이 점점 더 약해지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잘 반영해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효도조차도 부모가 돈이 있어야 받을 수 있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면 실로 가정의 비극이요 사회의 망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처럼 자식이 진심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 부모가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을 때 제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부모가 더 이상 자식에게 도움이나 힘이 되어 주지 못할 때, 부모가 이제는 자식에게 오직 짐처럼만 여겨지게 되었을 바로 그때야말로, 진짜 효도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바로 그런 경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자기 어머니가 '과부'가 된 경우, 의지할 남편을 잃고 경제적 자립 능력이 전혀 없게 되었을 때에, 그런 어머니를 향한 자식들의 효도가 과연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적어도 신앙의 자녀라면 마땅히 행해야 할 참된 효도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본문의 말씀을 따라서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참된 효도는, 부모에 대한 효도가 곧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 문제와 직결됨을 깨닫는 것입니다. 

본문 3절과 4절에 "3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4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것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지금 디모데에게 하는 것입니다.
즉 나중에 5절에서 나타나는 대로, 과부가 되어서도 더욱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을 목회자로서 존중히 여기고 영적으로 잘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4절에서 그런 과부를 물질적으로 돕는 문제에 있어서는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먼저 그들로 하여금 자식으로서 마땅한 효도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효"라고 우리나라말 성경에 번역되어 있는 말은 원래의 원문에는 '경건'이란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란 말은 직역하자면 '먼저 자기 집에서 경건을 행하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경건'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처신하는 자세'를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바로 그 단어가 "부모에게 보답하는" '효'를 명령하는 말씀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부모 앞에서의 효성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생활의 일부가 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4절에서도 "이것이" 즉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곧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경건생활의 하나라고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8절에서도 이런 효도의 의무를 이행치 아니하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도 똑같은 맥락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부모에 대한 효도는 하나님께서 제5계명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명령하신 것입니다.
제1계명에서 제4계명까지 대신관계(對神關係) 즉 하나님을 섬기는 법에 대한 계명들을 주신 후에, 나머지 대인관계(對人關係)에 대한 명령들 중에서 제일 먼저 주신 것이 바로 제5계명입니다.
하지만 이 십계명을 앞의 5개 계명들과 뒤의 5개 계명으로 똑같이 반반으로 나누는 성경해석자들도 있습니다.
즉 '부모 공경'의 제5계명은 후반부의 '이웃 사랑'에 속한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경외'를 명하는 처음 네 개의 계명들과 '같은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제5계명을 '하나님 사랑'의 계명에 포함시키는 것은 레위기 19장 32절의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라는 말씀을 보아서도 상당히 설득력 있는 해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을 '남의 밑에 있는 위치'에 두기를 본성적으로 싫어합니다.
그런 까닭에 '다른 사람을 받들고 존경하는 것'은 오직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만 배우고 익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선생님을 만나면 반드시 인사해야 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며, 군에 입대한 훈련병들은 장교를 만나면 깍듯이 거수경례하는 것이 아예 반사작용처럼 되도록 교육을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서 제일 처음으로 알게 되는 '윗사람'은 바로 부모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자녀의 관계야말로 모든 인간관계가 다 '평등관계'는 아니며 '상하관계'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 첫 단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여기서부터 안 되는 사람,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조차 '윗사람'으로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자기 스승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될 리가 만무하며 직장의 상사를 충심으로 잘 받들어 모신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 앞에서도 그 정도라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 앞에서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자기를 낳아 주신 부모조차 '윗사람'으로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이 진정으로 저 위에 계신 하나님을 '생명의 주권자'로 경외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길러주시느라고 '센 머리'가 되신 부모님에게조차 효도할 줄 모르는 사람이 저 하늘 아버지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드린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될 소리이겠습니까?

바로 그런 까닭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라면 이 세상의 생활 중에서 다른 그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필수적으로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 바로 부모공경이 됩니다.
이처럼 부모 공경이란 분명히 윤리 문제이기는 하지만 신앙 문제와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신앙 문제와 거의 직결되어 있는 윤리임을 깨닫고, '집에서 효를 행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경건생활을 보여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참된 효도는, 신앙의 부모를 특별히 귀중한 부모인 줄 알고 더욱 공경하는 것입니다. 

5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에 "5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6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7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고 기록했습니다. 

과부라는 단어 자체가 제일 먼저 연상시키는 것이 바로 '외로움'입니다.
평생 사랑하고 살아 왔던 남편을 잃은 외로움, 이제 육신적으로 의지할 사람 없이 살아야 한다는 그 고독감 속에서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 당시 대부분의 과부의 처지였습니다.

그처럼 인간적으로 볼 때 가장 절망적인 처지에 있을만한 것이 과부였지만, "참 과부"된 자들은 그런 "외로운 자"가 된 상황 속에서도 정말 놀라운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면서" 사는 생활이었습니다.
남편에게 걸었던 소망의 몫까지 이제는 아예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사는, 남편 사별 후에 더욱 하나님 앞에 신실한 신앙생활을 보여 준 '참 과부'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자식 입장에서는, 과부 된 어머니가 세상 한탄만 하고 자식 앞에서 불평하고 짜증만 낸다면 그것 또한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러지 않고 그런 외로움 가운데서도 과부 어머니께서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의연하게 여생을 사시는 모습을 보여 주신다면 자식으로서는 정말 자랑스럽고 감사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면에 "일락"(향락)만을 찾으면서 살려고 하는 과부도 있었습니다.
마치 무엇을 못해 보고 죽으면 자기 인생에 엄청난 손해나 될 듯이 여기면서 이것저것 욕심을 부리고, 남편 죽은 것을 무슨 새로운 기회와 자유가 주어진 것처럼 여기면서 자기 인생을 마음대로 즐길 일에만 몰두하는 과부도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런 과부는 자식 앞에서 제일 못난 어머니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교회 안에 바로 그런 단정치 못한 과부가 생기지 않도록 "이것을 명하여 그들(과부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의연한 여생을 보여 줄 줄 모르는, 그래서 자식들 앞에서 그런 못난 어머니가 되는 과부들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잘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란 불신 자녀들에게도 가장 기본적인 윤리입니다.
자기에게 피와 살을 전해 준 가장 가까운 혈육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 자녀들은 그처럼 불신자들이 자기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보다 갑절 이상 효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네들보다 훨씬 더 훌륭한 부모님들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부모보다 더 훌륭한 부모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신앙의 부모는 우리에게 영생구원이라는 인생 최고의 보배를 유산으로 남겨 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는 부모를 둔 덕분에 어릴 때부터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중심으로 양육 받게 된 것은 정말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반면에, 술에 대취한 아버지에게 구타를 당하면서 자란 불신가정의 아이들이 매일 밤마다 겪는 고통이 어떻겠습니까? 
춤바람 난 어머니로부터 외면당하면서 저녁 밥상조차 자기가 직접 차려서 동생들을 먹여야 하는 소위 '소년소녀가장'들이 그 성장기에 겪는 아픔이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순전히 믿는 부모님을 둔 이것 하나 때문에 이 사회에 대부분의 유아들과 청소년들보다 얼마나 행복하게 자라났는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그런 신앙의 부모는 노년에 가서도 자식에게 '이래라 저래라'라 하면서 까다롭게 요구하지 않고 그저 천당소망을 간직하면서, '백발의 면류관'을 자랑하면서, 여유 있게 노후를 보낼 줄 압니다.
자식 편에서 볼 때 그런 부모가 얼마나 고마운 부모입니까?

꼭 배우자를 일찍 사별하지 않더라도 노인이란 어차피 외로움을 점점 더 많이 느끼고 더 자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노년의 외로움 중에 살면서도 오히려 더욱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늘 기쁨과 감사만 충만한 가운데 사시는, 참 멋진 부모님들이 계시는 것입니다.
자식들은 그런 정말 훌륭한 신앙의 부모님을 모시게 되었을 때 정말 '마땅히 배나 존경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멋지고 훌륭하신 부모님을 모시게 된 자녀라면 '그래.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하나님만 소망하고 사신다니 하나님한테만 다 맡겨 두자.'하고 자기는 불효할 수 있겠습니까? 
나이 드셔도 당신의 여생에 대하여 '세상의 일락'을 찾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시며 또한 당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해 주시는 이 고마운 신앙의 부모님들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불신자녀들이 하는 것보다 갑절로 효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참된 효도는, 부모 봉양이 자식에게 주어진 본연의 의무인 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8절에 "8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과부는 그 당시의 사회에서 가장 약자요 최하층 계급에 속했습니다.
당시에는 여자가 할 수 있는 안정된 직장은 아주 제한되어 있었고 연금, 생명 보험, 사회보장제도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므로 생활비를 벌어 오던 남편이 아무 재산도 남겨 둔 것 없이 세상을 떠나 버리면 경제적으로 살 길이 전무했던 것이 바로 과부의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초대교회들은 그처럼 의지할 데 없는 과부들을 위한 구제활동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루살렘교회에서 첫 일곱 집사들을 선출하게 된 동기 중에 하나도 바로 그런 "공궤" 즉 '구제사업'의 규모가 아주 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자식들 중에서 자신의 과부 어머니를 돌보지 않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자식들이 멀쩡히 있으면서도 과부가 된 자기 어머니의 생계를 교회에 완전히 떠맡기고 자기네들은 전혀 "돌아보지 아니하는", 실로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불효자들이 명색이 교인이라는 사람들 중에서도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의 생계는 그와 혈통적으로 가장 가까운 친족과 가족에게 제일의 책임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과부 어머니의 경우에는 자식들이 가장 가까운 혈육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무리 '핵가족 시대'니 뭐니 해도, 자기 부모에 대한 자식의 봉양 의무는 결코 변할 수 없는 기본적인 인륜이며 하나님의 법도인 것입니다.

아까 4절에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란 말에도 '교회에 누를 끼치지 말고'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맥락으로 나중에 16절에서도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고 한 것입니다.
4절을 다시 보면, 그런 효도의 의무는 "자녀"뿐 아니라 "손자"들에게까지 있다고 했습니다.
즉 직계자녀가 없고 손자들만 있는 경우에는 그 손자들이 자기 할머니를 자식이 어머니에게 하듯이 봉양할 의무가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4절은 또다시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물질적으로 봉양하는 것은 부모가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의무가 아니라, 애당초 부모에게 받은 사랑의 빚이 한이 없는 자식으로서는 당연히 행해야 할 '보답의 행위'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이라는 사람 중에서 '자기 친족과 가족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 즉 '배교자'라고 했습니다.
아니 한술 더 떠서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성경 말씀은 추상같이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부모 봉양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신자의 자격이 있고 없고 정도가 아니라,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아예 '인간 말종'이나 다름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을 키우실 때에 사회보장 제도에 의지해서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부모가 은퇴한 후에 용돈도 채 안 될 쥐꼬리만한 연금만 가지고서 생활하시라고 내버려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몰염치하고 불효한 자식들은 사도 바울의 표현 그대로 '지옥 갈 불신자보다도 더 악한 자'라고 해도 조금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저와 여러분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낼 때에 교회의 구제금을 받아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부모가 교회에 등록된 신자이니 교회에서 구제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자기 자신은 친자식으로서의 마땅한 의무를 게을리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식 되었다는 사람이 자기 부모를 봉양하는 의무를 두고서 '그런 일은 교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하고 교회에 짐 지우려 하는 사람은 본문 말씀 그대로 실상은 이미 '믿음을 배반한 자' 즉 자기 자신부터가 교인 명부에 이름이 있을 자격조차 없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 봉양'은 자식으로서의 가장 기본적 의무입니다.
그것은 '자녀 교육'보다도 더 중요한 '친족 간의 제1의 의무'인 것입니다.
아니 이것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부모 봉양의 의무는 이행하지 않으면서 무슨 사회에서 성공한 훌륭한 사람이 된다느니, 혹은 온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구호 활동을 한다느니 하는 것은 가장 파렴치한 위선자입니다.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사회나 교회에게 주어진 의무가 아니라, 바로 그 부모에게 양육을 받고 자란 그 자녀에게 주어진 의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본인이 반드시 이행해야만 할 가장 기본적인 본연의 의무인 것을 결코 잊지 않고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아담은 배꼽이 없었다.'라는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배꼽은 어머니 태에서 출생할 때 생기는 것인데, 아담은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셨기 때문에 배꼽이 필요 없었을 것이라는 논리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첫 사람'을 지으실 때 '배꼽' 하나라도 결핍된, 불완전한 사람을 만드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담도 물론 배꼽이 틀림없이 있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다 아담처럼 직접 만드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어머니 몸에서 어디 '배꼽'만 받아서 나옵니까?
사지백체 오장육부가 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우리 모두를 각각 자신의 부모를 통해서 그 육신이 조성되고 그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나도록 만드셨습니다.
즉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부모를 통하여 세상에 태어나서 살게 만드시고 그 부모라는 사람과 제1의 인간관계를 맺고 살도록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 신앙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제일의 위선 행위일 뿐인 것입니다.
불신 자녀들도 자기 부모만큼은 정말 하늘처럼 받들어 모시는데, 하물며 신앙의 자녀들은 그것보다는 몇 갑절 더 진실하고 정성스러워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부모가 은퇴하고 육신에 병이 생기고 정신이 약해질 때, 바로 그때야말로 자식이 진짜 효도, 최고의 봉양을 해 드려야 마땅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부모 앞에서의 효도가 곧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생활인 줄을 아는 자녀, 예수 잘 믿는 부모님을 모시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자녀, 물질로써 부모 봉양하는 것이 사람의 대인관계에 있어서 제일 첫째 의무인 줄을 아는 자녀만이 그런 참된 효도를 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 효를 행하는' 생활, 바로 집안에서 하나님 앞에 보여 드려야 하는 경건생활,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부모를 지극히 공경하고 정성껏 봉양하는 효도를 통하여 실로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약속의 축복까지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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