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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하나님 나라를 받드는 어린이 (삼상 2:26, 막 10: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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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받드는 어린이 (삼상 2:26, 막 10:13~15)


2009년 어린이주일입니다. 우리 교회와 온 세계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고귀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어린이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를 보장 받고 건강하게 지혜롭게 자라기를 바랍니다. 어린이들의 마음에 품고 있는 희망과 꿈이 꼭 자라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의 어린이들 가운데 미래 한국의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바랍니다. 
  
루터의 스승 투르트페터는 “나는 지금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위인, 학자, 성자를 가르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의 장래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아이들은 미래의 우리교회의 일꾼이며 우리나라의 일꾼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이 제일 좋았습니다. 여선생님이셨는데 저를 굉장히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 때 뭘 배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냥 선생님이 좋아서 선생님이 시키면 뭐든지 다 했습니다. 한 번은 학교에서 배추를 가지고 오라고 해서 제가 아주 큰 배추를 한 아름 안고 갔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선생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께서 미국에서 공부하시고 귀국하셨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뭘 사달라고 하면 언제나 “아버지 오시면 사줄게” 하셨습니다. 또 어떤 때는 “아버지 오실 때 가지고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때 아버지만 오시면 모든 걸 다 가지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오실 때 책만 잔뜩 가지고 오셨습니다. 책을 보고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슈퍼맨입니다. 뭐든 다 할 수 있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아이들에게 어머니는 원더우먼입니다. 뭐든 다 낫게 하고 해결한다고 믿습니다.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맥가이버입니다. 모르는 게 없고, 못 하는 게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나 선생님을 받들 줄 압니다. 그런데 커가면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산타 크로스가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아이들의 이런 순진성이 사라집니다. 성인이 되면 어른도 받들 줄 모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도 옆집 개 부르듯이 합니다. 부모도 나라도 잘 받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강림 하기 이전에는 너무 예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참 눈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옛말에 ‘눈치가 없으면 코치라도 있어야지’라는 말이 있는데 제자들은 코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낌새라도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수난예고를 했지만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너희가 알 것이다”라고 했을 때 “그 길을 모릅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보았지만 한 간질병 어린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기도 외에는 할 수 없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아이들을 만져달라고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이 좋아하는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싫어하는 줄 알고 귀찮다고 꾸짖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분히 여기셨습니다. 제자들의 잘못된 행동을 보시고 강하게 꾸짖는 모습입니다. 어린이에 대한 어른들의 잘못을 주님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 분히 여겨”라는 말은 예수님의 직접적 분노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화를 내신 것은 이곳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분노가 다른 곳에도 있기는 합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분을 내셨지만 아이들 때문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사람에게, 그것도 제자들에게 화를 내신 것은 처음입니다.  
  
영국에서 18세기에 출생하여 미국으로 건너간 사상가 토마스 페인은 “어린아이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교리를 내세우는 종교는 거룩한 종교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어린이의 가치를 귀중히 여기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나 가르침이 그러합니다. 아이들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잭 하일스는 예수님이 어린이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신 것은 그들에게 신비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이 말씀은 후대 교회 유아세례의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아이들을 안으시고 축복하신 것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 등이 유아세례의 근거가 된다고 봅니다. 또한 사도행전 16장에는 루디아와 간수가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에 저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제외한 흔적이 없기에 이 말씀들도 유아세례의 실제적 근거가 된다고 말합니다. 오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어린이가 어떤 어린이인지 보시고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첫째, 어린이들은 사람들의 말을 쉽게 따릅니다. 

13절에는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이라고 합니다.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눈치를 모르고 그냥 따라왔습니다. 야단맞을 것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어른들은 정치적이고, 눈치보고, 시기하고, 계산하지만 어린이들은 ‘다음에 어떻게 될까?’라고 전혀 계산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런 것도 없이 그냥 어른들이 가자니까 따라왔을 것입니다. 
  
성공학의 창시자인 나폴레옹 히오나는 “인생은 바둑과 같다. 당신의 적수는 시간이다. 만일 머뭇거리거나 행동을 미루면 그 사이에 시간은 다 지나가버려서 당신은 그 바둑에서 지게 된다. 당신의 적수는 당신이 주저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바둑은 시간 싸움이기도 하지만 머리싸움입니다. 하나 앞을 내다보는 사람은 둘을 내다보는 사람에게 지게 되어 있습니다. 바둑을 둘 때는 미리 계산합니다. 몇 수 앞을 내다보아야 합니다. 어린이는 이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다”, “어린 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까? 어린이는 정치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나라는 정치적이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적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린이들이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어른들은 눈치를 보고 자기에게 닥칠 손익을 계산하였지만 그러나 아이들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어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트리고 고소하려고 질문을 던집니다. 정치적으로 시험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칠까요?”라고도 물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이 여자를 율법에 말한 대로 돌로 칠까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들의 세계를 보세요. 이런 재미있는 글들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습니다. “할머니의 생신입니다. 예쁜 카드를 그려보세요”라는 문제에 어떤 아이는 “삼성카드”라고 그려놓았습니다. “친구가 교내 그림그리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어떤 말을 해 줘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어떤 아이는 “꼴에”라고 답을 했습니다. “산에서 밥을 지어 먹으면 안 되는 이유는?”이란 진물에 어떤 아이는 “거지로 오해받기 때문에”라고 했습니다. “화장실을 이용할 때 문을 열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어떤 아이는 “자꾸를 내린다”라고 썼습니다. 아이들 같아요? 어린이 같지 않은 대답들이 많지만 그래도 어린이는 어린이입니다. 그들은 정치적, 외교적, 계산적이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순수한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대답을 그대로 믿습니다. “아기들이 배꼽에서 나온다”고 하면 그런 줄 압니다. 
  
부모의 말은 어린 시절에 절대적입니다. 선생님의 말은 영향력이 큽니다. 어른들의 말은 아이의 평생을 좌우합니다. 그러므로 아이들 앞에서 싸우지 부모가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신호위반하며 마구 건너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심지어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나쁜 일을 시키면 절대 안 됩니다. 
  
“오리발 내민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시치미 뗀다는 뜻입니다. 원래 “닭발 먹고 오리발 내민다”는 말입니다. 어른들은 수시로 오리발을 내밉니다. 정치가들은 오리발을 항상 가지고 다닙니다. 전직대통령이나 거지나 모두가 오리발의 명수들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수영할 때만 오리발을 내밉니다. 
  
법정에서도 어린이의 진술은 받아들입니다. 확실한 물증은 없지만 법정에서 4세 어린이의 증언을 채택하여 용의자 구속한 적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4세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말하지 않습니다. 
  
‘피터 팬 증후군’이란 말이 있습니다. ‘피터 팬’은 1904년의 희곡을 어린이를 위한 뮤지컬, 영화 등으로 만들었습니다. 성년이 되어서도 어른들의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어린아이 같은 남성들이 나타내는 심리적 증후군을 말합니다. 어른이 되기 싫어하는 가족과 자기가 속한 사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심리상태를 일컫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뮤지컬을 보면 오래 전에 윤복희씨가 “어른 되지 말아라”고 노래합니다. 악에는 어른 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피터 팬 신드롬이 아니라 순수하고 동심을 잃지 않는 피터 팬이 되어야 합니다. 정치적이지 않고, 계산적이지 않는 어린이를 인정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이런 어린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배웁시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를 받듭니다. 

15절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받들어야 들어갑니다. 어른 받들기를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습니까? 내가 낮아지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를 어떻게 하면 받들 수 있습니까? 내가 낮아지면 얼마든지 받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내가 낮아지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어린이는 아예 자신이 낮은 것을 아니까 받듭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받듭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슈퍼맨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는 왜 들어가지 못합니까? 당연히 받들지 않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지 않는 자는 절대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받들지도 않으면서 들어가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들어가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고, 거북스러울 것입니다. 
  
“받들다”는 말은 ‘덱세타이’란 헬라어입니다. 이 말은 손 안에 넣다, 환영하다, 영접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환영하는 것이 받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는 것이 받드는 것입니다. 
  
낮은 자가 받듭니다. 높은 자는 짓누릅니다. 빌립보서 2:8에는 예수님을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십니다. 마태복음 18:4에는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합니다. 어린이는 자신을 낮추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받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됩니다. 순결, 겸손, 신뢰, 이런 요소가 하나님의 나라 시민의 성품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 때문에 천국을 받들 수 있습니다.  
  
미국 텍사스에 ‘알라모’라는 요새가 있습니다. 1836년 텍사스 주민들로 구성된 민병 수비대 185명이 6,000명의 멕시코 정규군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민병대는 13일 동안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원이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마사다’에 대하여 잘 아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사해 남동해안에 있는 높은 언덕 위의 천연 요새입니다. 서기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쳐들어왔을 때 반기를 든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로마군에게 대항하였습니다. 그 곳에 있던 열심당원들은 어린이까지 고작 1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은 로마 제10군단 15,000명의 군인들과 싸우며 2년을 버티다가 거의 모두가 자살하였습니다. 나라를 받드는 충성심이 돋보이는 곳입니다. 지금은 학생들이나 군인들이 반드시 일 년에 한 번은 찾는 곳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나라를 받든 사람들을 열사라고 합니다. 열사는 자신의 뜻을 죽음으로 펼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준, 유관순, 전태일 등을 열사라고 합니다. 의사는 직접 행동으로 항거하고 죽은 사람을 말합니다.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등을 의사라고 합니다. 열사나 의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의분과 용기입니다. 
  
목숨을 바쳐 하나님의 나라를 받든 사람을 순교자라고 합니다. 순교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용감한 마음이 아니라 어린이 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잘 받드는 어린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순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찬송가에 “구주의 은혜 주시는 대로 영원히 받들어 섬기겠네. 찬송하겠네 찬송하겠네 생명을 주시는 구주로다”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주님을 받들어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고, 교회를 받드는 어린이로 만듭시다.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성자 23명중 단 한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18세 이전에 깊은 신앙생활을 했던 분들입니다. 이런 신앙의 어린이가 국가를 위해 죽을 수는 용기가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배출한 월남 이상재선생, 이준열사, 육당 최남선선생, 송암 함태영목사님과 같은 인물을 많이 키우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어린이들을 애국과 신앙으로 키웁시다. 

결론 
  
초등학교 학생의 시험지입니다. “눈이 녹으면 무엇 될까요?”라는 문제에 대부분의 어린이가 “물”이라고 썼습니다. 어떤 한 아이가 “봄”이라고 썼습니다. 아마 선생님이 요구한 답은 아닐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감수성을 키워줍시다. 우리시대는 감성 시대입니다. 감성을 가진 어린이로 키워야 합니다. 우리시대는 영성 시대입니다. 영적인 어린이로 키워야 합니다. 이런 어린이가 우리시대에 필요한 어린이입니다. 
  
어린이를 만져주심을 바라고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의 축복은 데리고 온 부모의 기대보다 몇 배나 큽니다.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을 주십니다. 안고, 안수하고, 축복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만져주세요”라고만 했는데 안고 축복했으니 엄청나게 복을 받은 것입니다. 
  
아이들을 많이 안아 줘야 합니다. 안고 축복해줘야 합니다. 야곱에 애굽에 가서 요셉의 아들들인 손자,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만났습니다. 눈이 어두워진 야곱은 “이들이 누구냐? 내가 그들을 축복하리라”고 합니다. 아이들을 안아주고, 만져주고, 축복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어른들의 도리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아무도 만져 주지 않으면 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죽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병원에서 시간을 나누어서 교대로 간호사들이 갓 태어난 아기를 안아준다고 합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모체접촉이 많은 아이들이 안정감 속에 삽니다. 지능이 굉장히 발달합니다. 병에 대한 면역력이 강합니다. 
  
예수님처럼 아이들을 안아줍시다. 축복해줍시다. 만져줍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든 어린이들이 안정적으로 자라고, 건강하게 자라고, 은혜로 자라고, 영적으로 자라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상 2:26에는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고 합니다. 우리 모든 어린이들이 사무엘처럼 똑똑하고 이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는 위인들이 다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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