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린이주일] 진정한 부모의 역할 (막 10:13~16)

  • 잡초 잡초
  • 344
  • 0

첨부 1


진정한 부모의 역할 (막 10:13~16)


고대 사람들의 어린이에 대한 생각은 부모의 소유물 정도에 불과하였다. 스파르타라는 도시 국가에서는 아예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병든 자, 장애인 등 건강하지 못한 아이는 절벽에 올라가서 내어버렸다. 전쟁을 위한 용사로 키우는데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어린 아이의 인권이 보장되지 못하고 많은 어린이들이 부모들의 성취욕에 시달리며 희생되고 있다. 5월 5일, 어린이 날을 만든 이유도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접하자는데 있지만 여전히 어린이는 부모의 소유물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크리스챤 부모로서 어린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1. 어린이를 주님께 데리고 오는 부모가 되라. (막10:13)

막10:13 말씀에도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라고 기록하였다. 어린이를 주님께 데려와 축복 받게 하려는 것은 정말 잘하는 일이다. 어린이들이 유년 시절에 교회에 나오고 주님께 인도되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역할이다. 부모가 자녀를 출산하지만 영적 생활에 무관심하면 부모도 주님께 나오지 않고 자녀도 데려올 생각을 못한다. 자녀들에게 옷을 잘 입히고 좋은 신발을 사주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는 것으로 부모의 역할을 다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평소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 동행의 삶을 만들지 않다가 어린이 날이 되어서 부모들은 급하게 자녀들을 에버랜드로, 과천 대공원으로 데리고 간다. 인파에 밀려서 짜증나는 거리에서 많은 시간을 지체하면서 어린이 날 치르기 행사를 한다. 그리고 부모의 역할을 해낸 것처럼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어린이들에게 기도의 옷을 입히거나 말씀을 먹이는 일이 아니다. 이러한 일들은 영적 변화의 기회를 주지 못한다. 

지금까지 어린 아이들을 자기들 멋대로, 마음대로 뛰놀게 방치하며 살던 삶에서 달라져야 할 것이 있다. 부모들은 나의 자녀에 대한 영적 구원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자녀들을 주님께 데리고 오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주일은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게 하고 어린이들이 주님 앞에서 자라게 해야 한다. 부모들은 주님께로 이끄는 일에 전력해야 한다. 어린이를 데리고 오는 것이 모든 것 중에 먼저여야 한다. 공부, 학원, 체육관 가는 것보다 먼저여야 한다. 그것이 억지가 아니고 즐거움이 되도록 부모 자신이 신앙에 깨어 있어야 한다.


2. 어린이를 돌보고 보살피는 교회가 되라. (막10:14)

막10: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라고 하였다. 

주님께서 보신 장면은 어린 아이들과 그 부모를 꾸짖는 제자들의 모습이었다. 제자들은 주님의 제자답지 못하였다. 주님이 어린 아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잘하는 일인 척 주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인 척 주님께로 나아오는 부모와 아이에게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그 꾸지람의 소리는 주님의 마음에 노하심을 일으키게 했다. 주님은 어린 아이를 꾸짖는 것을 싫어하시고 어린이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신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라.” 어린 아이는 수용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용납은 글자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미숙하고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발달이 완성되지는 못했어도 어린이들을 환영하라는 것이다. 교회는 어린 아이가 오고 싶은 곳이어야 한다. 교회학교 교실이 두렵고 비난 받고 꾸중을 듣는 곳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처럼 교회학교 교사나 직원들 중에는 꾸짖는 특허를 낸 사람들이 꼭 있다. 그래서 주님의 생각과 반대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의 고백 중에 뒤늦게 교회에 오게 된 성도들의 간증을 듣다보면 어린 시절 교회에서 놀다가 실수를 했는데 목사님, 장로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상처를 받아서 교회를 떠난 이들이 많다. 교회학교에 오고 싶어도 꾸지람을 주신 이의 얼굴이 생각나고 무서워서 수 십년을 방황한 사람들도 많다. 꾸짖는 일은 상처가 되기 쉽다. 칭찬은 격려가 되지만 꾸지람은 다섯 번의 칭찬에 해당되는 힘을 갖고 있다. 꾸짖는 것은 온유함과 조심함으로 해야 한다. 어린 아이에 대하여 주님이 용납을 선언하시고 금하지 말라 하셨으니 교회와 부모들은 ‘하지 말라’는 금지의 말을 버리고 ‘하라’는 허용의 말을 많이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기도하라. 예배하라. 사랑하라.”


3. 어린이들 모두 사랑 가득한 축복을 받도록 하라. (막10:16)

주님은 주께로 나아온 자들의 어린이를 축복하신다. 막10:16을 보면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주님의 이 축복의 손내밈 앞에서 우리는 축복 기도 받는 일에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학교에 입학하는 날이 되면 아침 일찍 일어나게 하여 목에다가 술이 달린 망토를 걸치게 한다. 그리고 율법을 낭독하고 랍비에게로 가서 축복의 안수 기도를 받는다. 

우리는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의 이름으로 안수를 받는 기회를 만들고 장소를 만드는가? 아이가 태어나면 교회로 데리고 오라. 엄마의 품에 안고 처음 교회로 오는 날, 하나님의 집에서 아이의 일생을 위한 축복 기도를 받으라. 어린이의 생일이 되면 아이들의 이름으로 감사 헌금을 드리고 강단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축복의 기도를 받으라. 아이들이 연약할 때 아버지들이 주님의 이름의 권세를 믿고 적극적으로 축복 기도를 하라. 그래서 어린이들은 삶의 축복과 승리가 나에게서 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하라. 잘 되었을 때 나를 과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축복 기도의 응답임을 감사할 줄 알도록 해야 한다.

주님은 안수하실 때 막10:16의 말씀을 보니까 “그 어린 아이를 안고” 안수하셨다. 넉넉한 사랑의 안수인 것이다. 보호하고 지켜주는 안수인 것이다. 사실 안수란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기도의 방법 중의 하나다. 특별한 목적으로 안수 기도를 하는데 안수의 종류도 여러 가지다.

① 제물을 위한 안수가 있다. 
- 레위기 16:21을 보면 제물에게 죄를 전가시키기 위한 행동이다.

② 병 고침을 위한 안수가 있다. 
- 복음서의 예수님은 마9:18에서 안수를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치료의 능력이 안수를 통해 이동하는 것임을 나타내준다.

③ 증거를 위한 안수가 있다. 
- 레위기 24:4에 잘못된 행위를 인한 죄를 그 장본인에게 돌리고 공동체의 책임을 해제하는 것이다.

④ 후계자를 위한 안수가 있다. 
- 민27:18, 23 여호수아는 안수를 받음으로 모세의 후계자가 되었다. 신약에서도 교회의 임직자들은 안수로써 구별하여 세웠다.

⑤ 성령을 받게 하기 위한 안수가 있다. 
- 행8:17 초대 교회 개종자들은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았다.

⑥ 그런데 또 한 가지 안수가 있다. 
바로 오늘 말씀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대로 축복을 위한 안수다. 

창48:14을 보면 야곱은 아들들에게 안수를 하였다. 이삭도 아들 야곱에게 안수를 하였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은 축복을 받으려는 사람에게 손을 얹으셨다. 예수님도 오늘 본문 막10:16에서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안수는 받아도 되고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받기 위해 안수를 받아야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어린 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는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히6:1~2을 보면 안수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라고 하였다. 이 도의 초보에서 벗어나 완전한대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안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도의 기초가 되는 것을 모르니 아이들도 안수 기도 한번 해주지 않고 어른으로 자라는 것이다. 집에서 자녀들을 위해 안수하고 기도하라. 학교에 입학할 때, 직장에 출근할 때, 결혼을 하게 될 때 안수하라. 유대인들은 금요일이면 안수를 한다. 

우리는 아무한테 안수를 받지 말고 부모에게, 목사에게 조심함으로 안수를 받으라. 안수를 통한 축복을 믿으라.


4. 어린이를 귀한 존재로 여기라. (막10:14)

주님은 어린 아이를 하늘 나라의 모델이라고 막10:14에 언급하셨다. 어른은 어린이들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못하기에 더욱 어린이를 높여 주셨다. 받든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드린다는 뜻이다. 어린이는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받든다. 의심하지 않고 일러주는대로 하나님 나라를 섬긴다. 그러므로 어린이는 어른들을 깨우치는 귀한 존재다. 어른이 어린이를 깨우치는 것 같아도 어린이가 어른을 신앙적으로 깨우친다. 어린이는 하늘 나라에서 볼 때 천국에 합당한 자다. 이제부터 어린이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

지난 시대에서는 어린이가 약하기 그지 없어 그 어린이를 학대하고 폭력을 휘두르며 팔아 먹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시대의 어린이에 대한 편견을 뛰어넘어 천국에 합당한 자는 어린이지 어른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래서 주를 따르는 초대 교부들은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과 그 말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였다. 천국에 가까운 자들의 말에서 영적 교훈을 얻으려 했다. 진정한 겸손인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에는 어린이를 귀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 왜곡되어 우상이 되어 버렸다. 주님이 원하시는 어린이에 대한 이해가 아니다. 어린이는 귀하다. 그러나 우상이 되어 부모가 부모의 역할을 잘못하면 안된다. 

자녀 조기 교육 바람이 불어 미국으로, 영국으로 유학을 간다.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가고 오직 내 자식의 성공을 위해 남편은 버려두고 간다. 외롭게, 고독하게 살아가는 아빠들이 부지기수다. 혼자서 살아가는 아슬아슬한 아빠들, 결국 가정이 깨어지는 경우도 많다. 요사이는 펭귄 아빠가 더 많다고 한다. 기러기는 그나마 날기라도 하지만 펭귄은 아예 날 수 없어서 무능한 존재로서의 아빠가 자녀와 아내가 사는 곳에 얼씬도 못하는 가장이다.

교육열도 좋지만 아이들이 우상이 되어 남편을 버려두고 가는 선택이 꼭 맞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신앙의 열심을 갖고 천국의 주인공으로 키우는데 땀을 흘리자. 어린이를 어린이답게 키우고 부모들이 가정에서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삶의 역할을 제대로 보여주자. 

어린이 날, 어린이 주일이 없어도 어린이의 마음과 영혼 속에 주님을 만나게 해준다면 신앙 교육이 분명하게 이루어진다면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최고의 날들을 만들어 준 것이다. 크리스챤 부모가 된다는 것, 그것은 건강한 아이를 낳아 잘 기르고 입히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집, 교회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책임을 다하는데 있다. 진정한 크리스챤으로 이 진정한 부모의 역할을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새롭게 다짐하기를 축원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