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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당신의 자녀가 어떤 길을 가기 원하는가? (잠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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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자녀가 어떤 길을 가기 원하는가? (잠언 4:1~9)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가정에 선물로 주신 주의 자녀들 특히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어린이들을 천국 시민의 대표적 모델로 제시합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하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어린 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누구든지 이런 어린 아이들과 같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천국에서 큰가 질문했는데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들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마18:1-4).

제자들에게는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 그것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히 얻어놓은 것이고 거기에서 누가 더 높은 사람이 될까 그것이 궁금했었습니다.   그냥 궁금한 정도가 아니라 천국에서 누가 크냐라는 주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 복되고 아름다운 천국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있을 것인가를 놓고 얼굴에 벌겋게 열을 올리며 목에 핏줄을 세우며 서로 말다툼을 벌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의 속 마음을 아신 주님은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고 어른들의 모델을 삼으셨습니다.  

어른들 앞에 불려 나온 어린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수줍어 몸 둘 바를 몰라 몸을 비비 꼬고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갑자기 어른들 틈에 불리어 나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리번거리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긴장하여 엄마를 찾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 아이는 지금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높고 낮은가 그런 것 의식할 줄 몰랐습니다.   뭇사람들에 둘러 쌓여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일이 이렇게 신나는 일이구나 하는 의식 같은 것은 전혀 없습니다. 

어린 아이의 이런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여주신 주님은 말씀하기를  ‘너희가 (자기가 높아지려고 남을 끌어내리는 그런) 마음을 바꾸어 이런 어린아이들과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베드로, 요한, 그 누구라도…) 이 어린아이들과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하셨습니다.  남보다 높아지고 큰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것보다 먼저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남을 섬기는 그 사람이 천국 시민으로서 가장 좋은 자세라는 교훈입니다.   주님이 모델로 보여주신 이런 어린이들에게서 하나님 나라를 배우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은 잠언의 말씀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는 인생 교훈입니다.   자신이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지혜의 말씀을 이제 자신의 아들에게 전달합니다.  ‘나도 어렸을 때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고 어머니에게 유약한 외아들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나에게 말씀하기를 “내 말을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잘 살게 되리라” 하신 그것을 이제 내가 너에게 전하고 있으니 너도 이 말씀을 따라 살아가라’는 아버지의 교훈입니다.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교훈의 중심은 지혜를 얻고 명철을 얻으라는 것인데, 잠언의 말씀을 정리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언 9:10) 하였습니다. 

자녀들을 향한 부모의 마음은 언제나 기대감으로 가득합니다.   자식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 잘된다는 목표가 무엇이고 잘되기 위하여 어떻게 준비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교우 여러분들은 자녀들이 어떤 길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빠른 길?  옳은 길?  아니면 욕심을 내어 빠르고 좋은 길로 가기를 원하시지는 않습니까?   

요즘 잘 나가는 우리 나라의 세계적 운동 선수 김연아와 박지성, 신지애로 만들고 싶어 어린 아이 손 잡고 실내 스케이트장으로, 골프 연습장으로, 축구교실로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별로 드러나 보이지도 않는 아이의 재능 테스트를 하고 있는 부모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다 자식 잘되라고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라 스스로 만족해 하고 대견스러워 합니다.
  
수 많은 부모들은 내 자녀들에게 남보다 한 발 먼저, 한 단계 빨리 정상에 오르는 기술을 가르치느라 온 정신을 쏟습니다.   ‘누구 집 아들 딸은 어느 회사에 다니면서 연봉 얼마를 받는다더라.’   ‘내 친구 아들, 딸은 직업이 무엇인데 그 집안 식구들은 다 그 일을 한단다.   그러니 너도 아빠 엄마 얼굴 세우고 우리 집안 체면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에 들어가고 어서 빨리 그런 자리를 차지해라….’   뭐 이런 식의 대화로 자녀들을 달달 볶는 부모님은 없는지요.   <아버지와 나침반>이라는 작자 미상의 짧은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소개해 드립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걷고 있었다. 
“아버지, 언제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요?” 
아들이 머리 위에 있는 태양을 바라보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얘야. 그것보다 앞을 잘 보고 걸어야 한다.” 
아버지는 지도와 나침반을 연신 펼쳐 보며 아들에게 말했다. 
주위에는 바위와 자갈이 늘려 있었고, 그 틈새로 선인장이 가시를 드러내고 서 있었다. 
“이러다간 평생 이곳을 못 벗어날 거예요. 벌써 며칠이 지난 줄 아세요?" 
아들의 얼굴은 불안으로 창백해지고 있었다. 
아들은, 대답 대신 나침반만 내려다보며 방향을 확인하는 아버지에게 화가 났다. 
“아버지, 좀 더 빨리 걸어야겠어요. 걸음을 재촉하세요.” 
그때 아버지는 오른팔을 뻗어 가리키며 아들에게 말했다. 
“얘야, 이쪽이다. 우리는 다른 방향의 길을 걷고 있었던 거야.” 
두 사람은 방향을 바꾸어 다시 며칠을 걸은 후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 날 저녁 어스름 녘에 아버지가 아들을 불렀다. 
“얘야, 시간이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란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방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하마터면 우리는 영원히 사막에서 헤맬 뻔했구나.” 
아들은 아직도 사막 어느 곳에서 헤매고 있을 자신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나침반을 아들에게 내밀었다. 
“자, 이걸 너에게 여행의 선물로 주마.” 
그러자 아들이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아버지 앞에 건네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이건 제가 스스로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때까지만 아버지께서 보관해 주십시오.” 

우리 부모 된 어른들은 지금 내 자녀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요?   나침반과 시계 어느 것을 자녀의 손에 쥐어주겠습니까?   이 세상은 ‘무엇이 효율적인가?’라는 가치관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가급적 빠른 시간 내에 최대의 효과를 보겠다는 철학입니다.   이웃집 아이보다 한 발 앞서 배우고 더 많이 배워 얻은 정보를 가지고 사람들의 머리가 되도록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 부모의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행학습’ 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저는 영국에 몇 년 있다가 한국에 돌아가서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 바보스럽게도 무슨 ‘착한 일’을 가르치는 학습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반대의 의미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남보다 먼저 수학과 영어를 배워 1등이 되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학습방법이고 그런 것만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원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나침반’을 보면서 ‘무엇이 올바른 길인가?’ 물으며 사는 사람을 찾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상입니다.  ‘무엇이 올바른 교육인가?’ 보다는 ‘어떻게 하면 점수를 좀 더 얻을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되어 너도나도 점수 올리기에만 마음이 급합니다.   

물론 공부하는 학생은 최선을 다하여 좋은 성적을 얻어야 합니다.  공부해야 할 학생이 빈둥거리고 허송세월을 하면서 이 다음에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한다면 그런 불성실한 자세로 어찌 좋은 세상을 이끌어 갈 성실한 일군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우리의 자녀들이 점수 올리기 위한 방법과 요령만 터득하는데 바쁘고 이 사회에서 성실한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가져야 할 인간의 도리 같은 것은 무시하는 분위기에서 자란다면 그런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런 사회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요?   

어려서부터 그런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정치를 하면 ‘무엇이 올바른 정치인가?’ 고민하는 대신에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빨리 더 큰 권력을 누릴 것인가?’에 관심이 있게 될 뿐입니다.  우리의 사회의 기준이 ‘무엇이 올바른 길이고 가치 있는 일일까? 대신에 ‘어떻게 하면 돈을 쉽게 더 많이 벌 것인가?’로 기울어져 사람들이 제대로 망가져 가고 중병에 걸렸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좀 다를까요?  교회 역시 세상과 친구하여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가?’ 대신에 ‘어떻게 하면 번창하고 성공할 것인가?’ 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이는 큰 교회, 더 큰 건물과 편리한 시설을 갖춘 교회를 향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인양 오해하고 삽니다. 

교회에서 조차 ‘나침반’ 대신 ‘시계’가 지배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주일예배와 주일학교에 참석시킬 것인가 아닌가의 결정도 시간적인 효율에 따라 결정하지, 신앙적 중요성을 따라 결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우들 가정 상황은 어떤가요?   신앙교육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요?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위하여 시계를 들고 있습니까 나침반을 들고 있습니까?   주일학교와 주일예배를 기준으로 자녀들의 신앙훈련 상황을 점검해봅시다.   주일예배는 어떤 일보다 항상 우선순위에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중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고민할 필요도 없고 주저함이 없이 쉽게 희생시킬 수 있는 차선의 일인가요?   

예를 들어, 시험을 앞두고 있는 학생들이 주일에 한 번 드리는 예배를 어떤 자세로 맞이합니까?   좀 더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라면 주일 예배는 가볍게 생략하고 넘겨버리는 쪽은 아닌가요?   ‘이번 주에 시험이 있으니 나는 오늘 교회 가지 않을래요’ 하면 ‘그래, 그게 좋겠다’ 하고 서슴없이 동의하는 부모님으로부터 자녀들은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요?   이런 부모로부터 신앙훈련을 받은 자녀들은 주일예배는 언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가볍게 생략하고 지나가도 되는 일로 여기게 됩니다.  집에 남아 공부하는 것이 교회 다녀오는 것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한다면 그 아이들 손에 나침반 보다는 시계가 들려있는 셈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과연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녀가 나오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잠3:5-7)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그리고 말씀하기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9:9-10)  하였습니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희망’이야기입니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고 서평을 읽어보았는데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니키 그림스가 쓴 <약속의 아들, 희망의 아이 버락 오바마> 라는 책이 우리 말로 번역되어 나왔답니다.  이 책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그의 헌신과 노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가 힘들 때마다,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방황할 때마다 ‘희망’이 그를 격려하고 일으켜 세워 줬던 이야기들이 기록되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희망’은 상처와 증오, 흑인과 백인,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이며, 오바마가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는 나침반이었습니다.  오바마는 이 일을 위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시카고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배우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오바마는 봄에 씨를 뿌리는 농부처럼 ‘그럼요,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라는 믿음의 씨앗을 뿌리며 참을성 있게 기다렸습니다.  어느 주일날 버락 오바마는 트리니티 교회에 앉아 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버락, 조급해 하지 말고 느긋한 마음을 가지렴. 주위를 둘러보렴. 그리고 나를 보렴. 희망은 일평생 너와 함께 한단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희망, 그 약속이 그의 길을 안내하는 나침반이었습니다. 

시편119편을 기록한 시인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119:105)고 노래하였습니다.  불빛이 없는 깜깜한 밤길을 걸을 때 작은 손전등 하나가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는지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어두운 밤길을 걸을 때 저 멀리 뒤편에서 달려오는 자동차의 불빛이 앞길을 환히 비추는 경험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두운 밤길과 같은 인생의 발걸음을 안전하게 바르게 가도록 비추는 등불이고 내가 가는 그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내 삶에서 만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 길을 지도하시는 빛이 되어주시고 그 말씀이 나침반이 되십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제사장 엘리의 망나니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기도의 어머니 한나의 아들 사무엘의 인생은 커다란 대조를 이룹니다.   모세는 애굽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어 왕자의 신분으로 궁중에서 애굽식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몸 속에는 히브리인의 심장이 뛰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친 엄마이면서도 엄마라고 드러내지 못하고 유모가 되어 아들에게 젖을 먹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요게벳은 어린 모세가 알아듣지도 못함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안고 젖을 물릴 때마다 히브리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가르쳤고 기도로 양육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어머니로부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이라는 위대한 출애굽의 인도자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칭찬할 때 ‘너에게 있는 거짓이 없는 믿음은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 있더니 이제 너에게도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믿음의 어머니들이 우리들 가운데 많이 나올 수 있기 바랍니다.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잠4:18,19)  오늘 잠언을 통해 사랑하는 아들에게 지혜를 전하는 아버지는 인생을 먼저 살아온 경험자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얼마나 복 있는 길인가 강조합니다.   ‘내 아버지가 나에게 말씀하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하였습니다.   ‘살리라’는 ‘잘 살 것이다’는 말입니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 아침에 다시 한번 생각하고 내 자녀들이 이런 삶을 살도록 참 지혜를 전하는 신앙의 부모로 삽시다.   

좀 더디게 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자녀들이 옳고 바른 길로 가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부모이길 바랍니다.  남보다 더 세고 강해야만 성공한다는 성공철학보다는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며 함께 사는 것이 천국시민의 삶이라고 용기 있게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는 부모로 살아갑시다.  그래서 우리 가정에서부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실천하도록 자녀들을 양육하는 부모가 되길 바랍니다.   

성경은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 넓고 편한 길과 좁고 협착한 길, 그러나 영생의 길을 함께 소개합니다.   우리 자녀가ㅡ 어떤 길로 가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를 위하여 예수께서 앞서 걸으셨던 그 길을 뒤따르는 제자의 삶을 힘있게 살아가는 좋은 부모님 그리고 자녀들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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