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린이주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갈 4:19)

  • 잡초 잡초
  • 308
  • 0

첨부 1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갈 4:19) 
 
 
5월 첫 주일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이루게 될 어린이들이야말로 교회가 보유하고 관리해야 될 가장 큰 자산이요, 또한 축복입니다. 교회는 영아부에서부터 청소년부에 이르기까지 각급 주일학교를 통하여 이들을 돌보며 가르칩니다. 성도의 가정에서도 귀여운 아이들을 사랑과 정성으로 반듯하게 양육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양분으로 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이상적인 인물이 되게 하려는 뚜렷한 목표가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부모나 선생들은 해산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지게 하려는 목적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1. 성경적 어린이

성경은 어린이를 어른과 다름없는 인격자로 인정합니다(마 18:10). 또 어린아이를 신앙인의 모범으로 삼게 하였습니다(벧전 2:2). 

1)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열매입니다.

솔로몬은 그의 시편에서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고 하였습니다(시 127:3).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축복하실 때 여인의 임신과 해산하는 일을 가장 큰 복으로 여겼습니다(출 23:26). 남자와 여자가 연합해서 가정을 이루고 거기서 자녀를 생산하게 되지만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해야만 됩니다. 자식이 하나님의 기업이요, 상급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면 이를 인위적인 산물로 생각하고 자기 의지대로 키우려고 합니다. 엘가나의 아내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여 사무엘을 얻게 되었고, 아이를 낳은 다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구별되게 키워서 훗날 이스라엘 역사에 기여하는 훌륭한 인물이 되게 하였습니다(삼상 1:9-20). 

2) 천국 시민의 표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천국백성의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마태복음 18:3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린이가 가지는 특징 중에 겸손한 성품이 곧 천국 시민의 성향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8:4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어린이의 특징 중에
순수하고 단순하며 진실된 모습을 귀하게 여긴 것입니다. 어린이는 어른들처럼 꾸밈이나 거짓된 행동을 하지 않고 보고, 느낀 대로 감정표현을 하는 단순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마 21:16). 때묻지 않는 맑은 영혼을 간직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도 순전한 모습을 지닙니다(벧전 2:2).

3) 하나님 나라의 희망입니다.

시편 110:3에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고 하였습니다. ‘새벽 이슬’은 희망과 축복을 상징합니다. 성도의 가정에서 경건하게 자라나는 어린이들이나 교회에서 가꾸는 크리스천 청소년들은 장차 하나님 나라와 인류역사에 기여하게 될 꿈나무들입니다. 예수님 당시 어른들은 어린이를 무시하고 사람의 숫자에도 넣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풍토을 개탄하시며 제자들을 나무랐습니다. 마태복음 19:14에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고 하시며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2. 이상적인 어린이 예수

부모들은 자녀의 인격이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를 수 있도록 또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여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 밝고 건강한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2:40에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또 52절에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앞의 구절은 예수님의 아기 때 모습이고, 뒤에 구절은 열두 살 소년시절의 모습을 소개한 것입니다. 아기 때는 자라며 강하여졌다고 했고, 소년 때는 지혜와 키가 자라갔다고 하였습니다. 곧 건강한 몸과 밝은 지혜로 잘 커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신적인 면에서도 모범이 되신 분입니다. 자라가는 어린이들이 공부에만 몰두한 나머지 건강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한편 몸은 건강하고 외모는 잘 생겼어도 건전한 지혜와 맑은 정신력을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도 곤란합니다.

2)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40절에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은혜의 근원자입니다. 바울 서신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는 말로 예수님이 은혜의 근원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엡 1:2). 본문 성경을 기록한 누가의 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님을 덮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소년 시절의 예수님이 성전에 올라가서 나이 많은 율법학자들과 진리에 대한 문답을 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통달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눅 2:46-47).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하였습니다(눅 2:48-49). 이사야 56:7에는 성전을 “만민의 기도 하는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씀과 기도로 사는 사람은 은혜가 충만케 되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2:52에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요소 가운데 ‘사랑’보다 더 값지고 귀한 것은 없습니다.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다 가지고 있어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을 받더라도 누구의 사랑을 받는가가 중요합니다. 대부분 부모에게서나 가족에게서 받기는 쉽습니다. 그렇지만 나와 상관없는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세상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모든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본문 말씀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해산하는 수고’는 여인이 아기를 낳는 수고를 뜻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힘든 고통이지만 또 가장 희망적이고 보람 있는 수고입니다.

1) 가정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가정에 자기의 기업으로 또는 그의 상급으로 귀여운 자녀를 주실 때 막중한 책임도 부여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6:4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양육한다’는 것은 자양분을 공급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곧 식물에게 거름을 주고 영양분을 공급해서 잘 자라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신명기 6:4-5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서 그대로 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적인 가정교육은 로이스와 유니게로 통하여 디모데에게 이어지듯이 모범적인 삶을 통하여 자녀들에까지 실천되게 하는 것입니다.

2) 교회의 책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지상명령(至上命令)에 세상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주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좇아 교회는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자라나는 세대와 모든 사람들에게 올바로 가르쳐서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잠 22:6). 교회는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는 기관입니다. 나라의 교육 기관에서 학문을 가르치고 기술과 지식을 길러주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른 믿음과 삶의 도리를 가르칩니다. 그것이 사람이 행할 마땅한 도리이기 때문입니다(전 12:13).

3) 사회의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6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극단적인 표현을 하신 것을 보면 인간이 저지르는 사회악 가운데 어린이를 실족케 하는 것을 가장 큰 죄로 간주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날 무책임하고 타락한 사회가 깨끗하고 밝게 자라야 될 어린이들을 실족시키고 있습니다. 잘못된 세상문화가 어린이를 오염시켜 바른길에서 탈선하게 만듭니다.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어린이를 밝고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사회와 하나님 나라의 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