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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드러내는 교회 (몬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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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드러내는 교회 (몬 1:8~20)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그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아주 담대하게 명령할 수도 있지만, 우리 사이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그대에게 간청을 하려고 합니다. 나 바울은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이요, 이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로 또한 갇힌 몸입니다.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얻은 아들 오네시모를 두고 그대에게 간청합니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 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대와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는 바로 내 마음입니다. 나는 그를 내 곁에 두고 내가 복음을 위하여 갇혀 있는 동안에 그대를 대신해서 나에게 시중들게 하고 싶었으나,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대가 선한 일을 마지못해서 하지 않고, 자진해서 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잠시 동안 그대를 떠난 것은 아마 그대로 하여금 영원히 그를 데리고 있게 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부터는 그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그대의 곁에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가 나에게 그러하다면, 그대에게는 육신으로나 주님 안에서나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생각하면, 나를 맞이하듯이 그를 맞아 주십시오. 그가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 있거나, 빚진 것이 있거든, 그것을 내 앞으로 달아놓아 주십시오. 나 바울이 친필로 이것을 씁니다. 내가 그것을 갚아 주겠습니다. 그대가 오늘의 그대가 된 것이 나에게 빚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형제여, 나는 주님 안에서 그대의 호의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마음에 생기를 넣어 주십시오. 


• 갇힌 거룩함
중국 당대에 단하(丹霞)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추운 겨울날 낙양의 혜림사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습니다. 단하 스님은 그 절의 살림을 맡은 원주 스님께 따뜻하게 거할 곳이 없느냐 물었습니다. 그런데 원주 스님은 마땅한 곳이 없다며 굳이 자려면 법당에서라도 자라고 말하였습니다. 한겨울밤의 법당이라…. 생각만 해도 냉기가 몸속을 파고드는 것 같습니다. 단하 스님은 불을 지펴야겠다 생각하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좋은 땔감을 하나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도끼를 가져다가 불을 지피기에 좋게 장작을 패서 화롯불을 지핍니다. 원주 스님이 궁금해서 법당 안을 살펴보니 화롯불이 지펴있고 온기가 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법당 중앙에 부처님상이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단하가 도끼로 팬 장작이 바로 부처님상이었던 것입니다. 갑자기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고 두 사람 사이에는 설전이 오고갑니다.
“아니, 당신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부처님을 태워서 사리를 얻으려 했습니다.” 
“아니, 나무로 만든 부처상인데 어찌 사리가 있겠는가?”
“그럼 사리가 안 나올 바에는 그냥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부처는 무슨 부처입니까?”

단하 스님에게 그 법당의 부처상이 한갓 장작꺼리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 부처상이 유난히 볼품이 없거나 쓸모없어 보였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그 혜림사의 원주 스님이 보인 쌀쌀맞음이, 그의 비인간적인 냉담함이 그렇게 보이게 만들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추위에 떨며 따뜻하게 거할 곳을 찾는 이에게 무정하게 대하는 사람이 모시는 부처라면 그 부처는 참된 부처일리 없다고 단하는 판단한 것입니다. 그의 그런 판단은 크게 잘못 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리를 찾기 위해 부처님의 다비식을 진행했다는 그의 말은 통쾌하게까지 들립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교회들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의 건물들은 대리석으로 둘러싸여 1,000석 규모다, 5,000석 규모다, 10,000석 규모다 자랑하지만, 또한 십자가는 더없이 높아 가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 안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거룩한 분의 현존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열심히 경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공부하지만 그 하나님은 성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갇힌 하나님’처럼 느껴집니다.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세인트 조지 교회 부속 공원에는 저녁 7시가 되면 종소리가 울립니다. 저녁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입니다. 하루 종일 굶주림 속에서 구걸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듭니다. 예배는 시종 엄숙하고 거룩해 보이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됩니다. 예배 말미 봉헌시간에 사람들은 일렬로 줄을 지어 앞으로 나옵니다. 그리고는 사제가 거룩한 모습을 연출하며 들고 있는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은쟁반 위에 그날 하루 동안 구걸해서 얻은 돈의 상당 부분을 헌금합니다.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예배당 문은 닫히고 커다란 문빗장까지 채워집니다. 집도 절도 없는 사람들은 예배당 벽에 붙어 소나기와 새벽의 한기를 피해 보지만 밤사이에 한 두 명의 여리고 어린 생명들은 유명을 달리 합니다. 

사람들의 절박한 필요에 응답하지 못하는 모습, 허울뿐인 거룩함으로 사람들을 적당히 위로하려는 모습, 사람들의 종교성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배만 불리려는 모습은 에티오피아의 세인트 조지 교회만의 모습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성사(聖事)
오늘로 우리 교회는 설립 101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01주년. 그 긴 시간 자체가 ‘거룩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것은 수령이 100년이 넘은 아름드리나무 앞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과 비슷합니다. 수많은 위기와 시련이 있었을 터인데 그 모진 풍파 다 견뎌내고 대지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서서 하늘을 향해 푸르른 이파리를 나부끼는 나무는 그 존재 자체로 하나님을 느끼게 해줍니다. 

저는 가끔 사무실의 분주함을 피해 혼자 2층 예배당에 올라와 가만히 앉아있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이 예배당이 거룩하게 느끼지는 정도는 지금의 이 예배시간보다 그때가 더 크다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을 독대하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저는 그분께 저의 진심을 말하고 있고,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아도 그분은 제게 위로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새로운 길의 방향을 말씀해주십니다. 

‘성사(聖事)’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룩한 물건, 사건 등을 의미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세례(洗禮), 견진(堅振), 성체(聖體), 고해(告解), 혼인(婚姻), 성품(聖品), 병자(病者) 성사를 소위 칠성사라고 하여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그중 세례와 성찬을 성례전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보프라는 신부님이 「성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을 통해 보프는 거룩한 것이란 불가시적 존재인 하나님을 이 세상에 계시하고, 상기 시키고, 지시하고 안내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거룩한 것인가? 그것이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겉모습이 종교적이고 거룩해 보여서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 존재와 사건이 하나님을 담고 있을 때, 하나님을 가시화할 때 비로소 거룩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보프는 자신의 성사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피우셨던 담배꽁초가 자신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거룩한 성사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보통 꽁초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프의 꽁초는 그런 꽁초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의 마지막 체취가 담겨있습니다. 그 안에는 먼 타향에 떨어져 지내며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와보지 못한 아들을 위한 가족의 위로가 담겨있습니다. 그 안에는 이제는 돌아가셔서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는 그 무엇인가가 담겨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꽁초는 보프에게 있어 ‘아버지의 성사’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성사 중의 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당하게 자신을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9) 실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는 그분의 말씀과 삶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었고 지금도 볼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성사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보자면 예수님은 투명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신 분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죄악과 탐욕으로 물들어 불투명하기만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든지 하늘을 비춰 보일 수 있는 투명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 빌레몬서
빌레몬서는 바울서신 가운데에서 가장 짧은 서신이고 그 내용도 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수신자는 빌레몬으로 되어 있습니다. 빌레몬은 골로새에 살던 그리스도인으로 바울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게 된 사람입니다. 그는 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수 있는 넓은 집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부자로 추정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진 영적인 권위와 많은 나이를 들어 그에게 명령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간청한다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하나 꺼내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름 아닌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라는 이에 관한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서신의 내용으로 짐작해 보건데 빌레몬의 종으로 지내며 그에게 얼마간의 재산적 손실을 입히거나 그의 물건을 탈취하여 도망을 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만났는지 제 발로 찾아갔는지 모르지만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나게 되었고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그 당시 감옥에 갇혀있던 바울을 충실하게 돕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네시모의 그런 충심어린 모습에 바울은 그의 진정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를 감옥에서 얻은 ‘아들’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이 오네시모를 내 곁에 두고 계속해서 나를 섬기게 해도 좋지 않을까? 그런데 이는 빌레몬의 종으로 지내던 이가 아니던가? 그런데 또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사이는 이미 크게 벌어지지 않았던가? 그럼 이 둘을 화해시켜야하나? 그냥 오네시모를 내 곁에 두면 안 될까?’ 그러나 바울은 그 마음을 거두어들입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 고민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오네시모 안에는 용서 받지 못한 불편한 마음이, 빌레몬에게는 미움과 분노가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며 오네시모가 바로 자신의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내 마음입니다.’ 공동번역성서에서는 ‘내 심장을 떼어 보냅니다.’라고 좀 더 절실한 표현을 썼습니다. 바울의 간곡함이 묻어나는 대목입니다.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 그가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게 되는 빌레몬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그의 눈매에서는 날카로움이 느껴집니다. 바울은 그 날카로움을 예견하면서도 간청을 이어갑니다. ‘그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종 이상,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받아주십시오.’ 오네시모로부터 편지를 전해 받아 읽어 내려가던 빌레몬은 이 대목에서 침을 꿀꺽 삼키며 읽기를 멈추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신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김세윤 박사가 이 부분을 언급하며 바울이 마르크스주의자보다 더욱 변혁적이고 혁명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요구는 주인과 도망친 노예의 관계인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생각해볼 때 참으로 무리한 요구처럼 보입니다. 그 당시 도망친 노예는 주인에게 잡힐 시 죽임을 당하거나 거의 죽기 직전까지 매질을 당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혹시 빌레몬이 자신이 입은 물질적 피해 때문에 오네시모를 다시 받아주기를 꺼려할지 모르다 하여 그 손해부분까지 자신이 추후에 감당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재차 빌레몬의 호의를 구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면서 마음이 많이 닳게 된 것 같습니다. 물론 빌레몬이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오네시모를 환영해줄 것을 생각하면서도 ‘혹시 그가 오네시모를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에 애가 탔던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받아들여줄 것을 바라며 그렇게 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의 마음에 다시 생기가 돌 것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성사가 된 사람, 성 바울
오네시모. 그 이름의 뜻은 ‘유익한’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순간의 실수로 그는 빌레몬에게 무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결단을 합니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결단은 자신의 마음속에 빌레몬의 얼굴이 떠오르면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자기 자신은 다시 ‘무익한 자’가 되고 맙니다. 예수를 통해 바라보던 새로운 하늘의 문이 닫혀져 버립니다. 빌레몬 앞에 다시 서지 못하는 한, 그에게 죄를 용서 받지 못하는 한 자신이 온전히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가 빌레몬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그에게 가해질 혹독한 형벌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을 품었지만 그가 넘어서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운 현실의 벽 앞에 주춤거리는 오네시모를 바울이 도와주었습니다. 물론 성서는 그 뒷이야기를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뒷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었던 간에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며 충심어린 변호를 아끼지 않았던 바울을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오네시모에게는 ‘거룩함의 체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바울 자신도 감옥에 갇힌 몸인데도 불구하고 도망친 노예에 지나지 않는 자신을 위해 애쓰고, 자신이 주인에게 입힌 물질적인 피해까지 보상해주겠다는 바울. 오네시모에게 바울은 하나님을 계시하고 상기시키고 지시하는 성사 같은 사람, 성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2009년은 가톨릭에서 정한 바울로의 해입니다. 바울의 탄생 2000년을 기념하여 그렇게 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바울의 이름 앞에 ‘성’, 영어로는 세인트 Saint라는 말을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성 바울로’. 한 사람이 성인의 반열에 오르려면 그의 덕성이 지극히 높고 순교를 하거나 기적의 이사가 나타나야합니다. 물론 바울은 이 셋을 모두 충족시킨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 앞에서 순교를 한 것도 아니고 기적을 베푼 것도 아니지만 오네시모는 바울을 성스러운 사람, 거룩한 사람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네시모는 바울을 통해 하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단하 스님 같은 분이 손에 도끼를 들고 오늘날의 교회들을 향해 ‘이 교회 안에서 예수가 나오는가 한 번 보자’하며 도끼날을 휘두른다면 한갓 장작꺼리로 화하지 않고 예수를, 하나님을 내보일 수 있는 교회들은 애석하게도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우리교회를 떠올리면서, 여러분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그 마음이 흐뭇해지고 하늘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교회가 100년, 101년이라는 시간의 오래됨만으로, 교회의 건물과 집기들이 드러내는 그럴듯한 종교적인 분위기만으로 거룩함을 이야기하는 교회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교회에 속한 우리들 각자가, 우리 안의 작은 모임들이, 그리고 그런 모임의 연합체로서의 우리교회가 온전히 하나님을 드러내는 성사가 되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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