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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잠 23: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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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잠 23:13~35)


군대에서 '생존훈련'(survival training)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이 훈련은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과 육체가 견디어낼 수 있는 거의 극한 상황까지 도달하게 해 놓은 후에 그런 와중에서도 생존의 능력을 본능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나라의 어느 군대에서 하는 것이든지 간에 지독하게 힘들기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사관학교나 특수부대에서도 바로 이 '생존훈련' 기간 중에 낙오자가 가장 많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지독하고 고통스러운 훈련을 왜 시키는 것이겠습니까?
왜냐하면 그것은 그 훈련을 받는 군인의 목숨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생존훈련'이란 글자 그대로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조종사가 적지에서 격추되어 고립되었다든지 혹은 특수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적후방 깊숙이 투입되면 아무 보급도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목숨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은 자기 한 사람밖에 없는 것이며, 바로 그런 최악의 상황이 실제로 벌어지게 될 때에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서 군대에서는 평소에 그런 '생존훈련'을 혹독하게 실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과 14절에 보면 "13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14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채찍으로 때리면서 훈계하라.' - 이것은 소위 '신세대 부모'들이 듣기만 해도 펄쩍 뛸 끔찍한 말입니다.
매로 때리기는커녕 '기 살려 주어야 한다.'고 해서 큰소리로 야단 한 번 치지 않고 그저 '오냐 오냐'하고 자기 자식을 애지중지하며 키우는 법만 알고 있는 오늘날의 젊은 부모들에게 이런 성경의 말씀은 정말 아주 '귀에 거슬리는' 소리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처럼 '혹독하게 보이는' 교육을 자녀에게 시켜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陰府)에서 구원하리라"는 말씀이 일깨워 주는 사실입니다.
즉 이 '엄한 훈계'는 곧바로 그 자녀의 '영혼의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식의 영혼을 '음부' 즉 지옥에 빼앗기게 될 것인가 아니면 천당에 이르는 '구원'을 얻게 해 줄 것인가 하는 이 최고로 중대한 문제가 걸려 있는 까닭에, 성경 말씀은 자식에게 매를 드는 엄격한 교육을 통해서라도 그 생명만큼은 반드시 살려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녀들의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해내기 위하여 꼭 교육시켜야 할 사실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자녀들의 영혼을 음부에 빼앗기지 아니하고 반드시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 경향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아무리 가르치기 힘들어도 꼭 가르쳐야 하고 아무리 그 자녀들이 배우기를 힘들어 해도 꼭 배우게 만들어야 할 '영적 생존훈련'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부모는 자녀가 쾌락주의에 빠져 망하지 않도록 '여호와 경외의 신앙'을 철저히 훈련시켜야 합니다. 

15절부터 18절의 말씀에 "15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16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 17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18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의 "내 아들아"라는 표현은 그 당시에 스승이 자기가 가르치는 제자를 호칭할 때 썼던 말이지만, 또한 솔로몬이 아버지로서 자기 자식을 직접 교육할 때에도 당연히 썼을 것입니다.
하여튼 이 잠언 기자는 자기의 '제자'나 '자식'의 "마음"이 자기가 가르치는 교훈을 통하여 "지혜로워지고" 그 "입술"이 "정직을 말하게" 되면 그것이 곧 자신을 "유쾌하게" 만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오늘날의 부모들이 자식을 대하여 가져야만 할 자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라나는 자녀를 보면서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부모입니까?
자기 자식이 공부를 잘하기만 하면, 다른 아이들보다 더 예쁘거나 더 건강하기만 하면 그 때문에 자기 마음도 즐거워지는 그런 유치한 부모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마음자세로서는 그 자녀의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애쓰는 부모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자기 자녀의 '영적 상태'가 바로 되기를 가장 간절히 소망하는 부모가 되어야만 그들의 심령을 위하여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우선 '지혜롭고 정직한 자'가 되기를 기뻐하는 부모는 그 무엇보다도 그에게 신앙교육을 똑바로 그리고 철저히 시키게 됩니다.
그 첫 단계가 바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도록"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그저 학교 성적만 좋고 좋은 대학에 진학만 잘하는 학생, 즉 세상적으로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불신급우를 결코 부러워하거나 모델로 삼지 않도록 자녀에게 가르쳐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기초적인 것인데도 교인들 중에는, 아니 교회의 중직자들 가운데서조차 자기 자식을 일단 '세상에서 출세하는 사람'이 되게 하려는 데에만 전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녀가 고등학생이 되면 주일예배나 SFC성경공부 따위는 잠시 제쳐놓고 일단 대학에만 붙게 하는 것이 제일 급선무이며, 신앙교육은 나중에 가서 해도 늦지 않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깊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자기 자신부터가 '우선순위'를 완전히 뒤바꾸고 있는 부모가 '나중에 가서'라고 해서 자녀에게 제대로 신앙교육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부모는 그 자녀에게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나중에'가 아니라 말귀를 알아들을 때부터 그리고 특히 '고3' 때일수록 그 무엇보다도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을 철두철미하게 교육시켜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섬길 줄 알게 하는 것' - 이것이야말로 신자부모의 자녀교육에 있어서 '핵심 중의 핵심'이요 다른 그 무엇보다도 '급선무이며 최우선'인 것입니다.
아무리 모든 과목의 과외공부, 온갖 좋다는 예능교육 다 시키고 아니 소문난 영재교육이란 영재교육은 다 시켰다 하더라도 '여호와 경외 신앙 교육' 이것 하나를 결핍하면 그 자녀교육은 '100퍼센트 실패'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름지기 자식의 '영혼'을 책임 맡은 '부모'라는 이름을 받은 자는 절대로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처럼 '하나님 중심'의 신앙교육을 최우선으로 가르치지 않을 때 그 자녀는 어떤 위험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계속되는 19절 이하 21절에 기록하기를 "19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로 인도할지니라 20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21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잠언 기자는 다시 한 번 "내 아들아"라고 부르면서 그 듣는 자로 하여금 "지혜를 얻게" 하고 "그 마음을 정로로 인도"하려 합니다.
그러면서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를 멀리하라고 그에게 경계했습니다.
나중에 29절 이하 35절의 말씀에 보면 바로 이런 '술독에 빠져서 자기 인생을 망치는 자'들의 행태를 더욱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를 배우지 아니하는 자는 결국 이처럼 '먹고 즐기고 놀기' 위하여 사는 쾌락주의자들과 "더불어 사귀는" 한통속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쾌락주의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대표적인 세속적 인생관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가장 알아듣기 쉽고 가장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인생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대부분의 청년들은 '5일의 근무'는 주말에 마음껏 놀기 위한 것이고 젊을 때 돈을 많이 모아 두어야 여생을 여유 있게 즐기면서 살 수 있다는 따위의 생각만으로써 자기 인생의 계획과 목적을 다 채워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자기 영혼의 '장래'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조차 두지 않게 되며 따라서 그 내세에 대한 '소망'은 전무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디모데전서 5장 6절에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쾌락주의는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이런 말씀이 세상의 모든 문화생활을 다 배격하고 살아야 한다는 뜻을 결코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일의 분복'을 누리면서 각종 문화생활과 여가활동을 즐기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쾌락주의의 문제는 이것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놀고 즐기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결국 "가난하여지고 해어진 옷을 입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생산하는 것'보다 '소비하는 것'을 더 중요히 여기는 인생에게는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오로지 그 "마음을 정로"에 두고 사는 자만이 실로 금세뿐 아니라 내세에서 진짜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18절에서도 이 '여호와 경외'를 제대로 배운 자녀는 "정녕 장래가 있겠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녀들이 '어떤 대학교에 들어가느냐'에 그의 "장래"가 걸려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 아들딸이 장차 '어떤 배우자를 만나느냐'에 그 인생의 "소망"이 달려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오로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앙인이 되느냐 아니냐?' 하는 바로 이 한 가지에 내 자식의 모든 '미래와 희망'이 다 걸려 있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자녀들이 청소년 때부터 불신앙의 쾌락주의자들에게 빠져 들어가지 않도록 다른 그 무엇보다도 '여호와 경외의 신앙'만큼은 확실하게 책임지고 똑바로 가르치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모는 자녀가 음란문화에 사로잡혀 죽지 않도록 '부모 공경의 도리'를 엄중히 교육시켜야 합니다. 

본문 22절부터 25절까지의 말씀에 "22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23진리를 사고서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24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25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기록했습니다. 

성경은 부모공경을 항상 두 가지 측면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식이 부모를 공경함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도 자연히 배울 수 있게 된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부모공경이야말로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서 땅에서 축복받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자식의 영혼과 육신이 정말 잘되기를 원하는 부모라면, 바로 이 부모공경의 교육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그 부모공경을 두고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아버지는 자식 쪽에서 보기에는 '잔소리와 꾸중이 더 많은' 부모입니다.
즉 어머니의 부드러운 달램이나 충고보다는 아버지의 엄하고 강한 명령과 훈계가 자식으로서는 훨씬 더 반감이 솟기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본문에서는 "아비에게 청종하라"고, 즉 '그런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바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기본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는 말씀도 현실에 꼭 들어맞는 명령입니다.
부모가 힘이 있을 때에는 별 수 없이 순종하던 자녀도 그 부모가 연세가 들어 힘이 없게 되면 홀대하게 되기 쉽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아버지보다도 상대적으로 더 약한 존재인 까닭에 자식은 "늙은 어미"를 더 "경히" 여기기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리를 사고서 팔 수" 없듯이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자녀는 신앙교육을 통하여 얻게 된 '진리'를 그 어떤 경우에도 팔아먹어서는 아니 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신의 부모를 통하여 듣고 배운 '지혜와 훈계와 명철' 역시 소중히 여기고 평생토록 간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녀로 하여금 부모를 공경하도록 교육시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이제 어린 자녀에게 부모가 되어 있는 본인부터 자신의 연로하신 부모님을 지극히 공경하고 정성껏 봉양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녀들은 그들이 지금 우리를 통하여 보고 배우고 있는 그대로 장차 우리에게 행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젊은 부모가 되어 있는 저와 여러분은 아직은 '능력 있는' 부모인 까닭에 그래도 우리 자녀들이 우리를 부모로서 공경하는 것은 비교적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연로하시고 '힘을 잃으신' 우리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들을 조금이라도 '경히' 여기지 않고 극진히 모실 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부모공경의 시험장'입니다.
어쩌면 잔소리처럼만 들리는 '말씀이 더욱 많아지신' 우리의 부모님들을 '청종'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 자신부터가 제대로 지켜야 할 '부모공경의 현장'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부모님들 앞에서 자식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고 부모공경의 본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바로 우리 자신에게 똑같이 돌아올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자기의 '늙은 아비에게 청종하지 아니하고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 나중에 자기의 아들딸들에게서 당할 일을 스스로 불러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오로지 "의인의 아비,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만이 장차 "크게 즐거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녀에게 신앙교육을 바로 시키고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 지혜를 바로 가르친 부모가 되어야만 장래에 "그를 인하여" 즉 '그 자녀를 인하여' 진짜 큰 기쁨을 얻게 될 날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에게 '부모공경'의 도를 가장 잘 교육시킬 수 있는 길은 그 자녀의 부모 된 자신이 먼저 자기의 "부모를 즐겁게 하며" 자기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는" 이 한 가지 방법뿐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깨닫고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부모공경'의 교육에서 실패할 때 그 자녀에게 어떤 일이 생기게 됩니까?
바로 이어지는 26절로 28절의 말씀에 "26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27대저 음녀는 깊은 구렁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라 28그는 강도 같이 매복하며 인간에 궤사한 자가 많아지게 하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현실적으로 받는 가장 큰 유혹은 바로 '성적 타락'입니다.
"음녀는 깊은 구렁"이라고 한 것은 그런 성적 타락에 한번 빠지면 다시는 헤어나기 힘들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라고 한 것은 그런 성적 타락이 얼핏 보기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보이지만 실상은 치명적인 멸망의 길인 것을 뜻합니다.
잠언 곳곳에서 이 유혹의 위험에 대하여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청소년들의 성적 타락을 점점 더 문제시하지 않고 있으며, 아니 '성적 타락'이라는 표현조차도 아예 쓰지 않습니다.
청소년들의 혼전 관계는 대다수의 부모들에게까지 '으레 그러려니' 하는 현실로 인정되고 있는 형편인 것입니다.
모르기는 하지만 부모들 자신부터도 그러했고 어쩌면 지금도 그러한 까닭에 'X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랄 수 없는' 입장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음란문화'는 치명적인 '함정'이요 평생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이라고 엄히 경고합니다.
이것은 마치 개인의 자유요 성인의 선택 문제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실상에 있어서는 한 사람의 인생을 그 출발선에서부터 발목을 잡아채고 그의 전 인생을 털어 먹는 "강도"이며 오늘날의 인간사회에 "궤사한 자"를 양산해 내는 대표적인 원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조차 서로의 과거를 속이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부부지간에서조차 서로 정조와 신의를 지키지 않으면 그런 '궤사한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사회와 국가가 결국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릴 때부터 '부모공경'을 바로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자녀들이 그런 타락의 길에 빠지지 않기 위한 기본과목을 이수시키는 것과도 같습니다. 
자식이 부모와 맺는 관계는 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타인과 맺게 되는 '대인관계'들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인터넷 세계에서 '일촌'이라는 것이 유행하고 있지만 진짜 '1촌'은 오로지 부모자녀 사이 이것 하나뿐입니다.
그러니 이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부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그런 자녀는 다 인륜보다는 충동적인 기분에, 진정한 사랑보다는 자극적인 감성에 이끌리는 '저질적인 관계'에 끌리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혼한 부모를 둔 자녀들의 이혼율이 훨씬 더 높고 어릴 때 아동학대를 받고 자란 아이들이 나중에 문제아나 범죄자가 될 확률이 훨씬 더 높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소중한 아들딸들이 이 세상의 '음녀'에게 사로잡히고 '궤사한 자'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는 타락한 인생이 되지 않도록, 그들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인 부모부터 진심으로 공경하고 사랑하는 법을 자신부터 먼저 솔선수범하는 본을 통하여 확실히 가르쳐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녀의 미래에 좋은 일을 위한 것이라면 정말 무엇이든지 할 부모가 아니겠습니까?
좋은 학군을 위해서 이사도 마다하지 않고, 이빨 모양이 좋지 않으면 미리 치아교정을 시켜 주려고 가계부를 짜냅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멀리 해외유학도 기꺼이 보내고, 결혼자금을 위해서 지금부터 적금을 들어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녀들의 생명이 걸려 있는 문제를 어찌 간과할 수 있겠습니까?
'그 영혼이 음부'에 들어갈 수 있는 위험을 두고도 그냥 방심하고 넘어간다면 어찌 부모라 불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일단 세상에서 잘 사는 인생이 되어라.'는 식의 출세지향적 교육을 당장 내버리고 오로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중심'의 신전인격자로 훈련시켜야 합니다.
'성적 타락'은 사람을 최하 수준으로 이끌어 내리는 멸망의 지름길인 것을 바로 지금 우리 자녀들이 아직 어릴 때 철저히 교육시키면서, 다른 모든 대인관계에 앞서서 먼저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자녀'로 키움으로써 건전하고도 착실한 사회생활의 기반을 갖추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부모들은 '자식에게 매를 들어서라도 바른 신앙과 바른 윤리를 가르치는 것'은 소위 '세련된 현대인'으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야만적인 교육'이라고만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부모들 때문에 이 사회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고 술독에만 빠진 탕자'들과 '부모조차 공경할 줄 모르고 자기 인생만 제멋대로 즐기는 플레이보이'들만 점점 더 늘어가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저 '자녀를 사랑하고 잘 돌보아주는 것'만이 부모의 의무라고 착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자녀에게 '하나님 앞에서 어떤 신앙인이 되어야 하며 부모 앞에서 어떤 자식이 되어야 마땅한지를' 가르쳐 주는 것 역시 부모의 필수적인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와 친구들과 노는 이웃 주변에는 '술을 즐겨하는 자'와 '음녀'의 유혹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나중에 독립하여 나아가게 될 이 세상사회에는 '탐식하는 자'와 '궤사한 자'들이 도처에서 강도처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는 아직 기회가 있을 때에, 우리 자녀들이 그런 위기상황을 맞이하기 전에 미리 그들에게 '영적 생존훈련'을 철저히 시켜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는' 부모는 그 자녀를 잃게 되는 날 바로 자신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신앙교육, 교회생활교육을 철저히 시키는 부모는 바로 그 아들딸들로 인하여 '크게 즐거워할' 날을 반드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내 품 속에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을 자기 혼자서 맞서게 될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 경외'의 신앙과 '부모 공경'의 도리, 이 두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써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해 내는' '부모다운 부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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