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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막 11:12~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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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막 11:12~14, 20~25)

 
오늘 말씀에는 배경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예루살렘 동쪽에 붙어있는 베다니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3~4km 정도 붙어있는 마을인데 예수님은 이 마을과 예루살렘을 자주 왕래하신 기록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베다니에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한 가정이 있습니다.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가정입니다. 

마가복음 11장 말씀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베다니를 오고가면서 일어났던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일로 마가가 이렇게 기록을 남긴 것입니다. 이 사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에 처음 가셨을 때 사람들이 나와 “호산나 만세”를 부르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날은 아주 큰 행사를 치룬 날이 됩니다. 

그날 저녁 일행은 예루살렘에서 숙박하지 않고 해질 무렵에 다시 베다니 마을로 가서 주무셨습니다. 그 이튿날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 성전 방문이 약속되어 있어 그곳으로 가는 길입니다. 여기 보니까 “갈 때에 시장하진지라.” 갈 때에 일행이 배가 고팠던 것 같습니다.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혹시나 시장기를 면할 만한 열매가 있는가 하여 살펴보았으나 아무 열매도 없음을 보시고 예수님이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의 무화과나무는 식량의 한 부분이 되어 이쪽 지역에 가면 끝이 없는 무화과 과수원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이런 말씀을 하시고 지나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예루살렘성전을 심방해 보니 굉장히 큽니다. 

오늘 중간에 안 읽었지만 예루살렘 성전이 시장바닥과 똑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켜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예루살렘 성전을 어떻게 이렇게 하였느냐?” 예수님은 극한 표현을 쓰셨습니다. “강도의 소굴과 같이 되었도다.”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이 화가 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 성전 관리는 제사장들이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상인들이 성전에 들어와서 장사를 합니까? 제사장들이 타락해서 이권이 개입한 겁니다. 그러니까 좋은 자리를 주고 자릿세를 받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뭐냐? 하나님의 성전이?” 그렇게 야단을 치시고 그래서 그 날도 굉장히 큰 행사를 치르시고 베다니 마을로 다시 가시게 되었는데 지나가다가 저주한 그 무화과나무 앞을 다시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마음에 큰 의심이 생겼지요?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나무가 말랐나이다.” 베드로의 질문의 의미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성이 사람이 아닌 식물성에도 적용이 되는가? 무화과나무는 식물에 불과한데 어떻게 예수님의 말을 알아듣고 말씀의 권위로 눈에 볼 수 있는 가시적 현상으로 이 나무가 이렇게 금방 하루 만에 말랐는가?’ 그래서 놀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때에 예수님은 우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를 가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주는 시간을 갖고 계신 겁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을 몇 가지로 우리가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의심의 부분이 나타나는 대목이 있습니다. ‘열매의 때가 되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왜 저주를 하셨는가? 그때는 마땅히 열매가 열릴 시기가 아닌데 시장하시다고 해서 멀쩡한 나무에 예수님이 감정을 폭발하셨는가? 왜 나무를 말라 죽였는가?’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무화과나무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무화과나무 잎이 푸르려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라.” 이것은 영적 의미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는 말씀이고, 구약 사사기 9장에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신 나무들이 나타나는데 감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라고 했습니다. 이 나무를 왜 하나님이 기뻐합니까? 이 나무에 비유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24장과 29장에 이 나무를 가르쳐 “먹을 수 있는 좋은 나무와 먹을 수 없는 악한 무화과 열매”라는 비유가 다 이 무화과나무를 보고 하신 것은 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신 영적 의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 예루살렘을 복음화하기 위해 큰 기대를 가지고 역사적 행진을 하셨던 예루살렘에서 호산나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 근방에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인류 구원의 사명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온 예루살렘, 그 중에서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던 모리아산 중앙에 자리 잡은 예루살렘 성전이 세계에 하나의 영적 센터로 이렇게 세워졌는데 너희가 어쩌자고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느냐? 제사장들이 허락했기 때문에 타락해 이권이 개입하고 상인들을 다 불러들여 자릿세 받아먹고 이렇게 하지 않았느냐?” 지금 야단을 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잎만 무성하지 열매가 없다는 뜻으로 이 나무를 저주하신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 나무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그랬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세계에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열매를 절대로 안 맺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 나무를 우리가 보면 얼마나 잎이 무성합니까? 지금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46년에 걸려서 건축했다고 했습니다. 성전 건축 5년 안에 다 끝나고 웬만하면 3년 안에 다 끝나는 것이지 46년 동안 건축한 성전이 얼마나 웅장하고 얼마나 장엄하겠습니까? 그래서 보는 사람마다 예수님한테도 이 성전의 규모를 보라고 자랑하는 말이 성경에 나옵니다. 이렇게 잎이 무성하고 전 국민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아주 무성합니다. 거리에 나가보면 걸치고 다니는 옷들이 거의 종교적 의미의 의상을 입고 다닐 정도로 겉보기에 무성합니다. 몇 블록마다 회당을 건축해 놔서 안식일에 누구나 다 걸어서 성전에 갈 수 있도록 무성한 입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설주마다 신명기 말씀을 메달아 놓고 만지면서 들어가고 나갑니다. 겉보기에는 매우 무성해 보이는데 하나님이 그 백성을 향해 목적하신바 절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열매가 도대체 뭔가? 이 아브라함 후손의 선택 의미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내게 받은 것을 온 세상에 나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택한 백성을 세우시는 겁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 구원의 선물을 막고 있습니다. 세계 만민을 구원하기는커녕 저주하고 멸시하고 절대로 너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함을 선언합니다. 아주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목이 곧은 백성이요, 교만한 백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누어주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가지고 잎만 풍성하게 자라는 열매 없는 무화과! 그때부터 지금까지 열매를 못 맺습니다. 안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강도의 소굴같이 되어버렸잖아요?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시는 도중에 길가에 있는 이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해서 영적 저주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온 세상에 절대로 나누어 주지 않는, 지금까지도 못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영원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뭔지 아십니까? 다른 종교는 수양 종교로 내 마음에 수양만 하면 그만입니다. 이것을 전할 의무도 없고 전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인들이 지하철에서 “불교 믿으세요.” 전도하는 것 봤습니까? 불교인들에게 “절에 많이 다니세요.”하는 전도지를 받으신 적 있습니까? 안 해도 괜찮습니다. 기독교는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남에게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도 열심히 주고자 노력하는 것이며 약간의 기독교인들에게 극성스러운 면이 나타나는 게 이 이유입니다. 

왜? 다른 사람의 종교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갖습니다. “교회 나가십니까? 교회 나오십시오.” 열심히 하잖아요? 기회만 주어진다면 어디에서나 전도합니다. 택시를 타도 기사 아저씨한테 “아저씨, 교회 나가세요?” 남의 종교를 뭐 하러 물어봅니까? 택시 탔으면 요금만 내면 될 텐데 물어봅니다. 어떤 때는 민망스러운 일이 좀 발생하기도 합니까? 저는 택시를 타고 가다가 한번 전도했다가 쫓겨서 내린 적이 있습니다. “당신 택시 탔으면 요금만 내면 됐지, 남의 종교를 왜 물어봐요? 나는 당신 같은 손님 태울 수 없습니다.” 막 화를 내서 “그러세요? 그러면 내가 내리겠습니다.” 문 닫으면서 “그러나 당신도 예수 믿으세요.” 그런 적도 있습니다. 받은 것을 남에게 주어야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선택하신 이유가 뭡니까? “내가 준 것을 너희가 나가서 노력해서 온 세상에 전하라.” 만약 그것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사명의 촛대를 다른 민족에 옮기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셔서 그대로 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그 열매를 못 맺고 영원히 못 맺게 하셨습니다. 지금 다른 나라 백성들이 그 사명을 받아 우리 대한민국이 온 세계에서 제일 크게 쓰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많이 준 자에게 많이 찾겠다고 했습니다. 잎이 무성한 만큼 열매가 커야 합니다. 열매가 하나도 없으니까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겁니다. 

그 다음에 놀라고 있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이때를 통해서 이러한 능력이 나오는 힘을 사도들이 가져야 한다고, 그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데 기도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을 믿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적습니다.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도를 안 하는 사람은 기도의 능력에 대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안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기도한 것을 하나님이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믿는다면 절대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은 것 때문에 놀라느냐? 너희들은 기도해서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들 그렇게 해라. 사도들은 그런 권리가 있어야 한다.” 왜 기도를 드리는가? 인간 능력의 한계를 우리가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초월자의 능력을 우리가 믿기 때문에 나에게는 절대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 힘을 빌리기 위해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들 생각합니다. 옛날 구약 시절에는 기적이 참 많았다고, 홍해도 갈라지고 기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현대에는 그 기적이 전부 없어졌다는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저는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모르는 소리이지 지금은 옛날보다도 기적이 훨씬 많아진 시대에서 우리가 삽니다. 

우리가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2000년 전 사도 시대, 유대 땅을 한번 심방을 가보자고요. 저와 우리 갈보리교회 집사님, 권사님들 비행기를 타고 갈릴리 지방, 예수님과 베드로가 지금 열심히 행하고 있는 그 현장을 우리가 찾아갔습니다. 거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2000년 전 열심히 전도하고 있고 기적을 베푸는 현장에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갔다고 생각해 보세요. “베드로 선생님, 정말 수고 많이 하십니다. 우리는 당신을 보기 위해서 여기 왔습니다.” “당신들은 누구요?” “네, 저기들은 한국 사람들입니다.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갈보리교회 교인들입니다. 여기 베드로 선생, 또 예수님 만나기 위해서 여기 왔습니다. 저는 갈보리교회 이필재 목사라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하시는 그런 일을 저도 지금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반갑습니다.” “아니, 그러면 당신들은 지구 끝에서 왔는데 여기까지 어떻게 왔소?” “네, 날아왔습니다.” “아니, 사람이 공중으로 날아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요?” “네, 지금은 바빠져서 하나님이 그런 하늘을 날수 있는 기적을 보편적으로 많이 주셨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하늘을 날아갈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을 날아다니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것은 놀라운 기적인데?” “네, 21세기에는 그렇게 기적이 많아졌습니다.” 또, 베드로 선생이 그곳에서 병자를 고치고 계십니다. 우리 교인 중에 베드로 선생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선생님! 이렇게 병을 고치시는군요. 저는 심장이 다 망가져서 죽을 사람인데 심장을 갈아 끼어서 이렇게 건강하게 삽니다.” “아니, 심장을 갈아 끼다니? 그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 아니요?” “네, 지금은 환자들이 세상에 인구가 많아져서 한두 사람의 기적 운동으로는 다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학의 기적을 베푸셔서 심장이 나쁘면 갈아 끼고 얼마든지 건강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이 훨씬 더 기적이 많은 것이지요. 다만 영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기 때문에 기적이 없다고 그러는 것이지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죽어가는 사람이 기도해서 벌떡 일어난 것만 기적이고 내가 죽을병에 안들은 것은 기적이 아닙니까?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죽을병이 안 들어서 여기 나와 있는 그 자체가 기적인 것을 보지 못합니까? 

여러분, 사도행전에 하루에 3천명이 예수를 믿고 세례 받았다고 했습니다. “베드로 선생님! 정말 훌륭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루에 3천 명씩 세례를 주고 설교를 하십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적입니다.” “네, 그런데 지금은 기적이 더 많아져서 저도 며칠 전에 논산 훈련소에 가서 6천3백 명을 세례 주고 왔습니다.” “뭐요?” 여러분, 기적이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앞으로 기도는 우리 인간 세계에 지금 우리가 상상도 하기 힘든 사실을 현실로 기적으로 다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훨씬 더 기적이 많아졌습니다. 

결국 오늘 말씀은 영성 훈련의 첫째가 뭐냐? ‘기도하는 것이다.’ 이 첫 번째 교육을 깨닫는 것이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하며 그것에 대한 실천이 삶의 변화에 가능성을 주었기 때문에 교회는 끊임없이 기도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목회자들이 끊임없이 끈질긴 기도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일 년에 1천 번 설교를 해야 합니다. 어디서 그 많은 말이 나오지? 그것을 영감이라고 합니다. 조용히, 기도하면서 영감이 떠올라야지 그 많은 말을 무슨 책을 보고 다 옮겨 쓰겠습니까? 어떻게 해서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를 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나에게 영감의 문을 열어주셔서 나로 하여금 이 생명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선포하여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이 기도를 며칠이라도 그치면 도무지 설교가 안 됩니다. 이 영감이 끊어지면, 영적 능력이 떨어지면 설교를 준비할 수도 없고 설교를 해도 교인들이 절대 은혜를 못 받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끝까지 붙들고 나와 성령의 교통함을 위해 기도합니다. 내재성이 항상 이루어지는 영감이 떨어지면 아무것도 못하게 됩니다. 맥 빠진 설교하는 목사와 혼자 사는 할머니의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둘 다 영감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한번 성경에서 살펴봐요. 예수님은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에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님은 철야기도를 드리셨어요. 누가복음 6장 12절에 “이에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 기도를 다니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46절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예수님은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2절에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예수님은 혼자 기도하러 다니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3절에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 기도하는 모습도 다양합니다. 누가복음 22장에 무릎 꿇고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또, 마태복음 26장에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더니 땀이 떨어지는데 핏방울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고민하고 슬퍼하사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기도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안수 기도도 해주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 29절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안 해보신 기도가 없습니다. 다 해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영성 훈련의 첫째 훈련이 되는 기도생활을 아예 제도화해야 됩니다. 한 가정의 한 사람은 새벽기도 나오십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할 때 이 기도가 온 세상을 변화시키고 우리 가문의 복이 되고 나의 생에 풍성함이 됩니다. 저는 기도 부탁을 많이 받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목회하면서 기도 부탁을 받았을 때 그냥 흘려버린 사건은 단 한 건도 없습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과 약속하고 교인과의 약속,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새벽기도 나오면 부탁받은 기도부터 먼저 하고 내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이 쉬운 줄 압니다. “가만히 명상하는 게 뭐?” 여러분, 한번 해보세요. 8시간 노동하시겠습니까, 8시간 기도하시겠습니까? 해 보세요. 어떤 것이 힘든가? 8시간 일하는 것은 쉬는 시간에 커피 마셔가면서 농담하면서 점심시간 지나고 이럭저럭 일하면 8시간 금방 지나갑니다. 8시간 기도해보세요. 몸이 마릅니다. 진액이 마릅니다. 왜? 마음을 써야하기 때문입니다. 고민하고 슬퍼하면서 땀방울이 떨어지도록 기도해야 기도이지 기도를 국어책 읽듯이 중얼중얼하고 맙니까?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오는 힘이 있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그러더니 어떻게 됩니까? 기독교 역사가 그때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잖아요? 고넬료가 항상 기도하더니 환상 중에 천사를 만나 베드로와 연결됨으로 로마 사람으로 최초로 예수 믿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로마가 복음화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고 이방 종교의 문을 첫 번째로 여는 공로가 생깁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기도하다가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육안의 눈으로 봤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서 기도하더니 옥토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혀서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하니까 천사가 옥에 갇힌 베드로를 데리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할 때 유명한 말을 남긴 것이 지금까지 전해옵니다. “내가 하루에 새벽 2시간 기도하지 않으면 승리는 마귀의 것이다.” 그래서 2시간씩 새벽마다 기도해서 종교개혁을 성공했잖아요? 

장로교의 창설자 역할을 한 존 낙스는 “하나님이여, 나는 하나님의 뜻이 내 손에서 성취될 때까지 기도하겠습니다.” 성취되었잖아요? 감리교 창설자 요한 웨슬레는 “새벽을 깨워 기도하는 자는 누구도 당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자다. 못 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후원이 있는데 누가 당할 것이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30년 간 목회한 야고보 감독은 어찌나 무릎을 많이 꿇고 기도했는지 무릎이 낙타 무릎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이런 사람들 때문에 이루어진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 대한민국이 무엇으로서 세계 제일의 교회가 되었는가? 이 나라가 땅 덩어리가 큽니까, 지하자원이 많습니까? 아니면 외국 사람보다 키가 큽니까, 머리가 좋습니까? 어떤 겁니까? 기도 때문입니다. 다른 세계 어떤 나라보다도 우수한 것이 대한민국은 기도하는 겁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기도 소리와 함께 하루가 시작되고 기도 소리와 함께 하루가 닫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대한민국에 그 많은 기도 소리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 교회가 세계 우뚝 서서 21세기에는 대한민국 교회 아니면 세계 선교가 안 되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새벽 5시면 대한민국 어떤 교회라도 한두 명은 다 나와서 기도합니다. 천막 치고 예배드리는 그런 교회도 한 두 사람은 기도하고 있고 대형 교회도 수천 명씩 나와서 기도합니다. 대한민국 교회가 서구 교회와 같이 몰락할 것인가? 아닙니다. 서구의 교회는 그렇게 기도를 안했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안 됩니다. 기도하는 무리가 있는 한 절대로 그렇게 안 됩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교회의 희망입니다. 

지금은 유대인이 하나님을 믿는 숫자보다 대한민국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숫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400명의 훈련된 군사를 거느리고 자기를 죽이러 오는 에서에게 야곱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야곱이 얍복강으로 달려가서 밤새도록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새벽녘이 되니까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야.” 죽이러 왔던 사람이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반갑게 맞이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시려면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소서” 모세의 기도가 히브리 민족을 완전히 구원했잖아요?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하나님이여 내게 힘을 주소서.” 

국가 위기에 소년 다윗이 돌멩이 몇 개 가지고 나가서 블레셋을 물리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벽을 대고 기도하여 자기 생명을 15년 연장했다고 성경에 나와 있지요? 바울과 대결했던 엘리야의 기도는 유일신 하나님의 권위를 이스라엘에서 회복시켰습니다. 기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기도로 풀어가세요. 교회는 모든 사역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을 맺어야 합니다. 이 줄을 붙잡고 놓지 마세요. 어떤 결과가 나타나나 한번 해보세요. 저는 지나간 44년 목회생활 가운데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습니다. 

여러분, 왜 기도를 안 하십니까? 성경에 예수님이 설교하는 법을 가르치신 적이 없고 찬양하는 법을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구체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영성훈련의 첫 번째 관문이 되므로 너는 기도하라. 이 산을 옮겨 바다에 빠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나 좋은 방법입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가르치시고 구체적으로 행동하신 이 기도 문제를 왜 해결하지 않으시는지 난 알 수 없습니다. 왜 그러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생애에도 자녀들에게 이것 하나만 철저히 가르쳐 놓으세요.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했나요? 오늘 받을 은총 위해 기도했나요? 나의 일생 다 하도록 기도하리라 주께 맡긴 나의 생애 영원하리라.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리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세요!”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우리들에게 세상을 이기는 방법을 기도로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자는 기도 생활을 했으며 믿음이 없는 자는 기도를 그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의 교회를 세계 제일의 자리에 두신 것은 이 민족이 하나님 앞에 고난 중에도 열심히 기도한 응답이라고 저희들은 고백합니다. 계속 하여 온 세계를 비추는 열매를 맺게 하여 주시고 우리 성도들은 자기 개인의 삶의 문제를, 우리 교회는 교회의 모든 문제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맺는 아름다운 주님의 영적 축복이 임재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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