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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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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19~22)


주님은 우리가 평안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제자들은 두려움 속에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평안이 없었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모인 다락방의 문을 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가장 먼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제자들이 기뻐하자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 평안하기를 원하십니다. 

평강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에이레네’이고 히브리어로는 ‘샬롬’입니다. 이 단어는 ‘평안’이나 ‘화평’, ‘평화’로 해석이 가능한 단어입니다.

지난 달 특별집회에 오신 배지민 목사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사람은 편안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평안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환경이 좋고 돈이 많으면 편안한 생활은 하겠지만 환경이 좋고 돈이 많다고 평안한 것은 아닙니다. 편안은 물질적인 공급으로 육체가 누리는 차원이라면 평안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공급으로 마음과 영혼이 누리는 것입니다. 

육체가 편안 하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영혼의 평안이 있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평안한 삶이 돈이나 권력이나 인기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돈 많은 사람들, 권력가진 사람들, 인기가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돈과 권력과 인기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불행한 인생을 사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돈이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의 평화입니다. 한 노인이 어떤 젊은이에게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저는 건강, 사랑, 재물, 아름다움, 재능, 권력, 명예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젊은이에게 “젊은이, 마음의 평화 없이는 이 모든 것을 즐길 수 없다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참된 평안은 환경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평안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도 주님이 없으면 참된 평강은 없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평안하고 행복한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한 사람이 찾아가서 조용히 물었습니다. “폐하여 지나온 날을 회상할 때 살아온 생에서 행복한 날이 얼마나 됩니까?” 그때 나폴레옹은 잠잠히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하는 듯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전 생애에 걸쳐서 행복한 날은 단 일주일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서 “오대양에 넘실거리는 파도는 세상에 오고 간 사람들의 눈물이고 육대주에 부는 바람소리는 세상을 살아간 인생들의 한숨소리와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한 나라의 황제가 되어 세계를 지배했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에 평안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나폴레옹과는 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와 같은 평탄한 인생을 살 때도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인생을 살 때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평안하고 행복했습니다. 

다윗은 시 4:7,8에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시 3편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윗이 도망을 갈 때 지은 시입니다. 상황으로 봐서는 다윗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답답해서 잠을 자지 못해야 하는 분위기여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상황 속에서 부르짖었고,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평안히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시 3:4-6입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오늘 설교는 본문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기를 원하시는 평강은 어떻게 주어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셔서 가장 먼저 평강을 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손과 옆구리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므로 두 가지를 증명하신 것입니다. 첫째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만 아니라 이렇게 다사 실아났다고 부활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즉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리고 죄로 인해서 파생된 모든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복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찰스 스펄젼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그가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보니까 한 어린 아이가 새장 안에 갇힌 새 한 마리를 몹시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 그 새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그 아이가 대답을 했습니다. “좀 괴롭히다가 죽여 버리려고 해요.” 목사님은 그 새가 너무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돈을 주고 그 새를 새장 채로 샀습니다. 목사님은 그 즉시 새장의 문을 열고서 그 새를 날려 보냈습니다. 그 새에게 자유를 준 것입니다. 그 다음 주일은 부활 주일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빈 새장을 들고서 강단에 섰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원수 악한 마귀는 우리를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엄청난 대가로 지불하고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평강을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인간의 문제가 많고 많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죄 때문입니다. 이 땅에 평안, 평화, 평강을 잃은 것이 언제부터입니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부터입니다. 죄를 범한 이후 평안, 평화, 평강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57:20-21). 

악한 사람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바닷물이 항상 요동하듯이 그들의 내면은 끊임없는 파도가 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평안을 깨는 장본인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 하는데 자랑이 무엇입니까? 교통사고로 인하여 가해자인 운전수와 피해자가 법정에 섰습니다. 운전수가 "판사님 저는 모범운전 경력이 30년입니다. 저 사람이 잘못하여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럽니다. 그러자 이번엔 피해자가 말을 받습니다. "판사님 저는 안전보행 경력이 50년입니다. 운전사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더랍니다. 여러분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요 주님의 부활입니다. 죄 사함 받고 의롭게 될 수 있는 길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며 사는 길도 십자가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설 수 있는 길도 오직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 6:14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2. 복음을 증거 하라.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고 인류의 구원을 위한 길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예비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보내심을 받고 세상으로 가서 인류구원의 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인해서 주어진 평안을 계속적으로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복음을 증거 하십시오. 우리가 복음을 증거 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평안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믿는 자 안에 계시는 성령님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방향성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이웃과 세계를 향한 봉사와 전도와 선교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성령을 소멸하게 되고 내적인 평안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처럼 섬기고 전도하고 선교하지 않으면 역시 내면의 평안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 노릇을 해야 사람이지.”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와 성도에게 적용하면 “교회면 다 교회냐 교회다워야 교회이지, 성도면 다 성도냐 성도다워야 성도이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의 가장 중요한 사명 중에 하나는 복음증거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는 전도하고 선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하고 선교하지 않는다면 교회다운 교회가 아니고 성도다운 성도가 아닌 것입니다.

마 24:14을 보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며, 천국 복음이 다 전파되면 마침내 이 세상의 종말이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천국 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명이 교회와 성도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행 1:8에 보면 성령께서 임하시면 반드시 주님의 증인 되어 전도하고 선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전도하고 선교하라고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고 선교하지 않는다면 교회답지 못하고 성도답지 못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복음을 전하므로 평안하고 복음은 듣는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므로 변화되어 평화로워지는 것입니다. 존 게디라는 이름의 캐나다 선교사는 기도하다가, 아직도 식인종이 살아있다고 전해진 뉴 헤브라이드 섬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는 식인종에게 잡혀먹을 각오를 하고 그 섬에 들어가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섬사람들의 언어를 배워 신약성경을 번역하고 그들에게 온갖 사랑을 다 쏟으며 헌신했습니다. 

그 결과 선교사의 헌신에 감동을 받은 원주민들이 모두 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이 선교사가 죽었을 때 그의 무덤의 비문에는 [1848년 그가 이 섬에 상륙했을 때 기독교인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1872년 주님의 품에 안겼을 때에는 이 섬에 식인종이 하나도 없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사람을 잡아먹던 식인종들에게 무슨 평화가 있었겠습니까? 자기가 다른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듯이 다른 사람도 나를 잡아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평화도 평안도 없습니다. 그 섬사람들은 늘 불안하고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복음이 증거 되어 섬 전체가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섬이 얼마나 평화롭고 개인은 얼마나 평안 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으로부터 세상으로 파송 받은 자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벧전2:9절에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분의 소유 된 백성 삼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분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나도 평안하고 세상도 평화로워집니다.” 


3. 성령으로 살라.

22절에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숨을 내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평안을 누리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성령은 평화의 영입니다. 갈 5:22에 보면 성령은 ‘사랑, 희락, 화평’의 열매를 주시는 분입니다. 투명한 병 속에 콜라가 들어가면 병 색깔이 검정색으로 보이고, 포도 주스가 들어가면 보라색으로 보이고, 오렌지 주스가 들어가면 노란색으로 보이듯이 사람 속에 성령이 들어오셔서 충만하게 역사하시면 성령의 색깔이 그 사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성령의 색깔 중에 첫 번째 색깔이 사랑이고, 두 번째가 희락이고, 세 번째가 화평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사랑하게 되고, 내적인 기쁨이 충만해지고, 샬롬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하고는 평화롭고 자신의 내면은 평안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파스칼이 말했습니다. “사람이 혼자서 결혼하지 못하는 것처럼 혼자서 크리스천이 될 수 없다.” 교회에 10년, 20년을 다녀도 성령을 받지 않으면 교인은 맞지만 신자는 아닙니다. 아무리 60년, 70년을 교회 다녀도 성령 받지 못하면 거듭나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가지 못합니다. 자기 아버지가 목사님이라도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영생을 얻지 못하고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성령을 받아야 영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후’ 하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창세기 2장과 짝을 이루어 성령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을 가르쳐주시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흙덩어리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마치 마네킹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그 코에 ‘후’ 하고 생기, 영혼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영혼을 불어넣어 주지 않으셨으면 지금도 흙덩어리일 것입니다. 영혼을 불어넣어 주셔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후’ 하고 부신 것은 흙덩어리에 불과하던 사람에게 영혼을 불어넣으시니 살아났던 것처럼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영적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격려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루게 하시는 분입니다. 덴마크의 한 아이가 글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글씨도 형편없고 내용도 없어서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열한 살 때 마음을 써서 글 하나를 써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보여 주었더니 그것을 읽어 본 아주머니들이 “얘야, 이런 글은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너는 글 쓰는 일을 하지 말고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한 아주머니는 “얘야, 네가 시간만 낭비했구나.”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글을 쓰고 싶은데 자기의 글을 보는 사람마다 악평을 하니 하루는 집에 가서 막 울었습니다. 엄마가 우는 아들에게 꽃을 보여 주며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아직 꽃봉오리가 맺히지 않은 거야. 이제 시작하는 거야. 꽃봉오리가 맺히고 그 다음에 꽃이 피는 거야. 너는 이제 열한 살이야. 아직 꽃봉오리도 맺히지 않았어. 앞으로 꽃봉오리가 맺히고 꽃이 활짝 필거야. 그때 네가 쓴 글은 좋은 글이 되는 거야. 엄마는 너를 믿는다.” 엄마의 말에 아이가 힘을 얻어 계속해서 글을 썼습니다. 그가 누구인줄 아십니까? 세계적인 위대한 작가 안데르센입니다. 어머니가 옆에 계셔서 격려해 주어도 위대한 사람이 되는데, 하나님의 성령 즉 위대하신 상담자가 되시는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도와주시니 우리가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언제나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안데스 산맥을 지나가던 여객기가 난기류를 만났습니다. 비행기를 자주 타 보신 분들은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실 것입니다. 비행기가 때로는 30미터 아래로 툭 떨어지면서 쿵 하는 소리도 납니다. 땅에만 아스팔트처럼 포장된 평탄한 길이 있고 비포장 된 험한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도 평탄한 길이 있고 험한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데스 산맥의 난기류가 심해서 몇 십분 동안 비행기가 100미터, 200미터 아래로 뚝 뚝 떨어지곤 했습니다. 승객들 모두 죽음의 공포로 두려워 어쩔 줄 모르는데, 한 아이만 비행기가 아래로 떨어질 때마다 까르르 까르르 웃었습니다. 비행기가 나중에 안정을 찾고 나자 사람들이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무섭지 않았니?” 아이가 대답합니다. “우리 아빠가 이 비행기 조종사예요.” 그 아이는 자기 아빠가 비행기 핸들을 잡고 재주를 부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 아빠의 비행기 조종 실력을 믿으니 무서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우주, 이 지구촌의 개인과 가정의 행복은 하나님께서 잡고 계십니다. 우리가 죽고 사는 것, 흥하고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어려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님과 깊은 교제를 해보십시오.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이 자신 안에 가득하게 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저는 이번 주에 양산에 있는 감림산기도원에서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이번 집회기간 동안에 저는 15분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설교가 끝나면 15분 씩 통성으로 기도를 시켰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면 15분 기도를 했고, 이렇게 하루에 세 차례의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숙소에서는 다음 시간에 전할 원고를 봤습니다. 그리고 원고를 보고나면 다시 15분 기도를 했습니다. 하루에 세 차례씩입니다. 또 잠자리에 들기 전에 15분 기도를 하고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15분 기도를 했습니다. 15분의 기도는 긴 기도는 아니었지만 하루 종일 여러 번 반복적으로 15분씩 기도를 했더니 제가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설교도 잘했고 저 자신도 너무나 평안했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성령께 지배를 당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사십시오. 놀라운 평안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평강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확신하십시오. 복음을 증거 하십시오. 성령으로 충만하십시오. 그래서 평안이 가득한 인생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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