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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 (빌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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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 (빌 4:6~7)


염려하지 말고

우리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가난, 병, 실패, 이별, 죽음 등 많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보다 더 힘든 것은 ‘염려’라고 생각합니다. 가난에 대한 염려, 병과 건강에 대한 염려, 죽음에 대한 염려, 일이나 사업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염려, 내일 일이나 미래에 대한 염려, 자녀의 공부나 미래에 대한 염려 등이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염려나 걱정거리가 하나씩은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어 그것이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사람은 어떻게든 적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난이면 가난, 병이면 병. 그러나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이 우리를 더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중에 ‘염려’라는 단어를 가지고 있고 ‘염려’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하는 피조물은 인간밖에 없을 것입니다. 생각하고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었지만 그런 축복에는 그림자가 하나 깃들여져 있습니다. 그것은 염려라는 그림자입니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그것을 미리 앞당겨서 염려를 합니다. 동물들은 오늘 하루 배부르면 만족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 그렇게 되질 못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그래서 참새에 대한 설교를 많이 했고 “한 마리의 참새가 능히 우리에게 훌륭한 설교자가 될 수 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하루 먹을 것만 있으면 만족할 줄 아는 참새의 믿음과 몇 달치를 쌓아놓고도 염려하는 인간의 불신앙을 비교하며 꼬집은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염려하는 것들 중에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들도 많습니다. 『느리게 사는 즐거움』 이란 책에서 어니 J 젤린스키는 우리가 염려하는 것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들에 대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구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염려이다.’ 이것은 염려한다 해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22%는 사소한 사건들에 대한 염려이다.’ 이것들은 염려할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한 것들이다.’ 이것들은 염려한다고 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결국 나머지 4%만이 우리가 염려해도 되는 진짜 염려거리이고, 96%의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다.’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불필요한 염려로 우리 생명 에너지를 갈아먹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염려를 처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마 전쟁터에서 죽는 숫자보다 근심과 염려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염려에 대한 주님의 처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글을 통하여 주님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이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도 주님은 염려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6:25) 요한복음 14장에서도 주님은 근심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염려와 근심에 대해서 주님은 단호히 명령으로 금하셨습니다.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행위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에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죄였다면 신약시대에는 염려하는 것이 죄입니다. 염려한다는 것은 주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는 “염려의 시작은 신앙의 끝이요, 신앙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이런 단호한 명령 앞에 염려하지 않기로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 환자는 불안증에 시달려 손을 가만히 두질 못하고 주변에 있는 종이를 자꾸 찢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이 불안증이 너무 심각해서 결국 이 사람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상담을 받으면서도 그 의사의 책상에 있는 종이를 자꾸 찢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차트까지 찢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는 정신과 의사가 화가 나서 “찢지 마!” 하고 큰소리로 명령하였답니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이 환자가 깜짝 놀라 종이 찢기를 그만 두었고, 그 일 이후 이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단호한 말 한마디에 병이 치료된 것이지요. 주님은 이제 여러분을 향하여 명령합니다. “염려하지 마!” 여러분 염려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자꾸 염려가 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주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두 번째 처방을 내리십니다. 6절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 대신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십니까? 네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염려가 떠오르는 순간 그것을 기도로 바꾸십시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성공할지 자꾸 염려가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사업이 성공할지 염려가 됩니다. 이 사업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로 바꾸십시오. 물질적인 문제로 염려가 됩니다. 그 염려가 밀려오는 순간, “주님 제가 물질이 필요합니다. 물질을 주십시오.” 하고 기도로 바꾸십시오. 우리 신앙인들에게 염려거리란 없습니다. 오직 기도제목만이 있을 뿐입니다. 

마음속에 자꾸 생겨나는 염려를 의지로 누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기도로 바꾸어 자기 형편을 낱낱이 아뢰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는 순간 염려가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순간 염려는 일곱 길로 흩어질 것입니다. 염려를 다스리지 않고 계속 키우고 묵상하면 좌절과 낙담과 더 큰 염려만 생깁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도로 바꾸면 평화와 감사가 임하고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집니다. 왜 쓸데없고 아무 소득도 없는 염려를 하려 하십니까? 그 시간 기도로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염려하는 습관을 기도하는 습관으로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사도 바울은 기도하되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를 하라고 명령합니다. ‘모든’ 일입니다. 기도할 때 가리지 마십시오. 기도해야 될 것과 기도하지 말아야 할 것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가 있고 그렇지 않은 기도가 따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기도와 사소한 기도 또한 따로 있지 않습니다. 될 만한 기도와 불가능한 기도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기도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 구두 한 컬레를 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모든 일에 간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가진 신앙의 놀라움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어린아이는 아빠나 엄마에게 학교나 유아원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시시콜콜히 이야기합니다. 그 마음속에 원하는 소원을 가능하든 그렇지 않든 다 요구합니다. 기도가 마치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쏟아 놓을 뿐이고 그것에 응답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책임까지 떠맡을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구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입니다. 세상에 어느 종교에서 자기가 믿는 신에게 이렇게 시시콜콜히 요청하고 떼쓰고 그럽니까?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민족의 문제나 죄의 문제나 또 가끔 축복을 간구했을 뿐이지 지극히 사소한 일로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었을까요? 구약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 저 지금 화가 나 있습니다.’ ‘하나님 지금 저 누구의 말 때문에 상처 받았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불교나 회교에서 누가 이런 사소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런 문제로 기도합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사에 기도의 사람으로 요명한 조지 뮬러가 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5만 번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5만 번 기도 응답 중에는 놀라운 기적도 많았지만 사소한 것도 많았습니다. 한 번은 자기 아내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뮬러의 아내는 배멀미를 자주 하기 때문에 뉴욕에서 아내가 사용하던 의자를 보내달라고 미리 편지를 써놓았습니다. 그러나 배가 출발하기 30분전까지 그 의자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던 사람 중 하나가 그 의자가 시간에 맞춰 도착하는 것은 어렵다고 하며 다른 의자를 구입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뮬러는 “꼭 그 의자가 필요하고 우리는 그것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에 맞추어 그 의자를 보내주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뮬러가 지나치게 믿음을 강조하여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배가 출발하기 10분전에 마차 한 대가 도착했는데 그 위에는 뮬러가 기도했던 그 의자가 실려 있었습니다. 뮬러는 그 의자를 전달받으며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로부터 선물을 받는 듯 기뻐하며 감사했다고 합니다.

저는 뮬러의 예화에서 그 기도 응답의 놀라움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앉을 의자와 같은 극히 사소한 것을 놓고도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런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뮬러가 하늘에 계신 분을 그의 아버지이심을 믿었고, 그만큼 하나님과 친밀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소한 것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사소한 문제에도 관심이 있고 듣기를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그 모든 일을 하나님 아버지께 고하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감사함으로

간구하되 사도 바울은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합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기도는 어떤 기도를 말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심을 믿으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염려거리가 생긴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문제지만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문제이기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들을 통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믿기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기도는 그래서 즐겁게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우리 소원을 아뢰는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생긴 문제로 인하여 이렇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저는 가난합니다. 저의 빈곤함을 인하여 주를 찬양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주님 저에게 필요한 것들이 많습니다. 저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 저는 지금 아픕니다. 이 고통을 인하여 저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것이 저에게 좋은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께 간구하오니 원하신다면 저를 고쳐주시옵소서.” “주님 저는 큰 어려움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어려움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비록 겉으로는 나쁜 것 같아도, 그 속에 축복이 들어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여 제게 임한 이 어려움이 지나가도록 도와주옵소서.”

하나님은 우리 모든 기도를 들으시고 그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기에 우리는 미리 감사함으로 기도드립니다. 주님은 마가복음 11장 24절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감사함으로 기도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 가운데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기도 하면서도 들어주실지 아니 하실지 불안해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또 사실 우리는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감사와 관련되어 이런 글이 있습니다. “10대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옷이 몸에 조금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고, 깎아야 할 잔디, 닦아야 할 유리창, 고쳐야 할 하수구가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집이 있다는 것이고, 주차장 맨 끝 먼 곳에 겨우 자리가 하나 났다면 그건 내가 걸을 수 있는데다 차도 있다는 것이고, 난방비가 너무 많이 나왔다면 그건 내가 따뜻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 교회에서 뒷자리 아줌마의 엉터리 찬송가가 영 거슬린다면 그건 내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이고, 세탁하고 다림 질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면 그건 나에게 입을 옷이 많다는 것이고,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한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고, 그리고 이른 새벽 시끄러운 자명종 소리에 깼다면 그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불편해 하고 염려하고 있는 것은 뒤집어 보면 우리가 그만큼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아뢸 수 있습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

이렇게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응답해주십니다. 응답을 주시는데 하나님은마음속의 평강으로 응답을 주십니다.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평강은 평강인데 여기에 수식어가 두 개 붙어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은 어떤 평강을 말할까요? 모든 지각이라는 것은 어떤 이성으로도 우리의 감각이나 의지로도 이해할 수 없는 평강을 말합니다. 그냥 하늘에서 내려주신 평강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속에 염려와 불안이 있어서 기도했는데 갑자기 평화가 임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내 환경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내 마음은 왜 이리 편하지 모르겠습니다. 이해가 안 갑니다. 이것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입니다. 이 평강은 인간이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의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여러분도 이 평화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성도님들이 문제가 생겨서 기도하는데 언제까지 기도해야 하느냐고 물어보면 저는 마음속에 평강이 임할 때까지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평강은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셨다는 응답의 사인으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평화가 주어지는 순간 우리는 문제들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불리는 사람으로 제이시 페니가 있습니다. 제이시 페니 백화점은 미국에서도 선두권에 있는 매우 유명한 백화점입니다. 2003년도 통계를 보니 매장이 1천여 개, 직원이 15만 명에 이르고 년간 매출액이 150억 달러에 이릅니다. 그렇지만 모든 성공한 사람에게는 어둡고 힘든 과거가 있었듯이 제이시 페니도 그랬습니다. 그가 벌였던 사업이 1929년 대공황을 맞아 부도가 나 파산 위기를 맞고 말았습니다. 빚쟁이에 시달렸고 친구들은 그를 버렸습니다. 페니는 가족적으로도 불행했습니다. 이미 두 아내를 병으로 먼저 보내야 했기에 가정에서도 안정을 취할 수 없었던 그는 그만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너무 심한 우울증이라 호주머니에 유언장을 써놓고 다녔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결국 미시간 주에 있는 배틀크릭이라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병원 안을 거닐고 있는데 귀에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가 지친 몸을 이끌고 찾아간 곳은 병원 안에 있는 작은 예배당에서 열리고 있었던 기도회였습니다. 그가 뒷자리에 앉아 있는데 자기가 친숙하게 듣던 찬송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찬송가 432장이었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이 순간 그의 마음속에 있던 염려와 불안이 갑자기 사라지고 마음속에 평화가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지쳤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세요.” 그때의 일을 그는 이렇게 술회하였습니다. “그 일은 나에게 갑자기 일어났다. 그 순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다. 단지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나는 순간적으로 지하세계의 어두움에서 따뜻하고 찬란한 태양 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권능을 느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염려에서 벗어났다. 그 아침의 20분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극적이고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여러분 이것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이런 간증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은 염려과 근심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평강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평강만 임하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잠언서에서는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고 말씀할 정도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성을 지키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심으로 우리 마음을 지키게 하십니다. 여기 지킨다는 단어는 군사용어입니다. 경계병이 보초를 서며 지키듯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지킵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습니다. 경제 위기, 육신의 고통, 인간 관계의 위기 이런 위기 앞에서 우리는 절망하고 심지어 자살하고픈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면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생각도 지킵니다. 어려운 때에는 딴 마음 먹거나 불의를 행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강을 주심으로써 우리 생각을 굳건히 지켜 의의 길을 가게 만드시고,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산과 깊은 절벽 앞에 두려워하지 않게 만듭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바로 이 평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신체는 사슬에 묶여 고통스럽습니다. 재판 결과는 어떻게 날지 알 수 없어 염려가 됩니다. 그 때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기도하자 그 마음 가운데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임했습니다. 평강이 임하자 두려움도 염려도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맛보았던 이 하나님의 평강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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