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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을 가진 자의 정결함 (요일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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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을 가진 자의 정결함 (요일 3:1~8)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젊어지는 일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소망과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에 열정을 다해서 드릴 수 있는 예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청춘이란 인생에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한다. 
사람은 신념과 더불어 젊어지고 
의혹과 함께 늙어간다. 
희망과 더불어 젊어지고 
실망과 함께 늙어간다. 

......중략......

하늘로부터 오는 영감이 끊기고, 
그 정신이 냉소주의에 눈에 덮이고 
비탄이라는 얼음에 갇힐 때 
20세도 젊은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머리를 높이 치켜들고 
희망의 파도 위에 올라 있는 한 
80세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

청춘은 젊은 육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 속에 있음을 예찬하는 시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청년인가 아니면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늙은이인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냉소주의는 우리의 용기를 파괴하는 질병입니다. 
우리의 젊음과 용기를 파괴하는 것은 냉소주의입니다. 냉소주의에 붙잡히면 모든 것을 의혹의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나 자신도, 남도 믿을 수 없어서 열등감과 불신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냉소주의는 마음에 기생하는 심각한 질병입니다. 청년 때의 의심은 배움을 향한 호기심으로 긍정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냉소주의로 말미암은 의혹은 인생을 파괴합니다.

냉소주의는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힘이 있습니다.
냉소주의의 소극적인 증상은 ‘귀찮아짐’과 ‘싫증’입니다. 이런 증상은 ‘나는 내 인생에 환멸감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을 가진 것 같아도 이런 말들을 자주 한다면, 스스로 근신하며 깨어나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 상태가 진전되면, 적극적인 증상으로 발전합니다. 냉소주의의 적극적인 증상은 ‘불평’과 ‘미움’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쓴 뿌리처럼 불평과 미움이 쌓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는 비난하며 자기 스스로를 학대합니다. 일방적인 분노와 미움의 역사가 그 사람을 사로잡고 맙니다. 냉소주의 안에는 믿음과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비관하고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냉소주의는 공동체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사회 공동체의 근본부터 무너뜨리는 것이 냉소주의입니다. 냉소주의가 사회 속에 편만하게 되면 사람들이 사나워지고 서로를 탓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사실 이미 문제 해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타인이 무너질 때까지 비난합니다. 누군가가 넘어져서 고통 받는 것을 즐깁니다. 

냉소가 팽배한 곳에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냉소주의는 사람 마음에 비관적인 사고와 패배주의를 키웁니다. 냉소주의는 인간 존재와 사회 전체를 파괴하는 악마의 속삭임입니다. 
그렇다면 냉소주의는 어떻게 생길까요? 처음에는 단순하게 자기의 꿈이 실현되지 않는 현실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다가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와 하나님의 약속을 도저히 받아드릴 수가 없게 될 때 의혹과 냉소주의가 나타납니다. 마음 속에 소망은 현실과 너무나 괴리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실패와 위기를 자주 경험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인생은 냉소주의로 말미암아 전락할 수 있지만, 그 와중에서도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을 택하시겠습니까? 

냉소주의의 위기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 (잠언 13:12)

이 말씀처럼 우리가 기도하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내 마음에 즐거운 생명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낙심의 위기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요? 성경에 블레셋 군대와 맞서는 이스라엘 군대의 마음이 절망으로 녹아내린 일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기골이 장대한 블레셋 군대의 장군 골리앗을 보면서 절망했습니다. 

‘아, 우리는 안 되겠구나.’
‘우리는 졌구나, 우리는 무너졌구나.’
‘우리는 이제 다 죽게 되었구나.’
‘우리는 이제 희망이 없구나.’
‘우리는 이길 가능성이 없구나.’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이미 마음으로부터 실패하고 포기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이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거대한 장애물이 우리 앞에 버티고 서면, 처음부터 포기하고 패배주의에 사로잡힙니다. 아예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다 내려놓습니다. 여러분, 이 순간이 바로 우리가 조심해야 할 순간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냉소주의와 절망에 사로잡힌 것일까?’ 

냉소주의가 생기면 불평과 변명이 생깁니다. 
내가 소망을 가진 사람인지 냉소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냉소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불평’과 ‘변명’을 일삼습니다.

‘나는 너무 나이가 어려.’
‘나는 이제 나이가 많아.’ 
‘나는 머리가 좋지 않아.’ 
‘나는 교육을 받지 못했어.’
‘나는 외모가 못 생겼어.’ 
‘나는 돈이 없어.’ 
‘나는 외톨이야.’ 
‘나를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이런 불평들은 스스로가 단정하고 변명거리를 만들기 위한 구실이 됩니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변명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변명거리를 찾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 순간 스스로 멈추십시오. 내가 스스로 변명하고 있거나 불평하는 것을 발견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이 무너지는 것은 절망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너질 때는 환경이 어려울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너질 때는 고통이 심각할 때도 아닙니다. 
우리가 무너질 때는 우리 스스로 절망할 때입니다. 

절망 앞에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바칠 때 완전히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 절망 안에서 모든 가능성과 새로운 도전의 용기들도 다 사라져 버립니다. 

유명한 토마스 에디슨의 일화가 있습니다. 1914년 뉴저지에 있는 에디슨의 실험실에 대형화제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시가로 200만 달러에 해당하는 거액의 실험 기구들과 그의 모든 실험 결과들을 적어놓은 일지들이 모조리 불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들인 찰스가 불타는 실험실 앞에 서 있던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에디슨은 아들 찰스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찰스, 가서 네 어머니를 불러오렴. 평생에 이런 큰 불구경은 두 번 다시 보기 힘들 텐데, 이것을 놓쳐서야 되겠니?” 

그 다음 날 자신의 꿈과 소망이 새까맣게 잿더미로 변한 실험실 잔해 주위를 걸으면서 에디슨은 말했습니다. 
“재앙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군. 내 모든 실수가 적힌 일지마저 깡그리 묻어가 버렸으니 말이야. 이 나이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 
그리고 그는 다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에디슨의 나이는 67세였습니다. 자기 삶의 영점에서 감사하며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을 어떤 절망이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그 앞에 놓여있는 장애물에 좌절하지 않고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순간에 우리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주저앉게 만들고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자학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가능성을 끊어버리고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별 볼일 없는 존재로 만들고 있습니까? 

소망을 가진 사람은 정결하게 살아갑니다.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한일서 3:3)
주님을 향하여 가진 소망은 부활의 소망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기를 절제하며 정결하게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믿음의 사람들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살면서 환경과 상황을 피해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하늘의 소망을 품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소망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히브리서 6:19)
닻은 파도치는 바다 위에서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붙들어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망은 우리의 영혼이 흔들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붙잡아 줍니다. 소망은 거대한 바람과 파도가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고 맞설 수 있는 힘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닻인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소망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끈입니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의 태아가 탯줄 하나로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절망은 소망에 저항하는 죄악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의 줄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놓치면 그때부터 사탄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고, 우리를 어둠과 죽음의 길로 몰아갑니다. 가룟 유다가 3년이나 예수님을 쫓아다녔으면서도 그를 배반하고 판 것은 이제 더 이상 자기의 욕심을 예수님에게서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는 늘 절망과 소망이 교차되어 다가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다운 결정을 하며 선언해야 합니다. 
‘나는 생명을 택하리라’
‘나는 어둠을 택하지 않고 빛을 택하리라’
‘나는 절망을 택하지 않고 소망을 택하리라’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절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대를 배신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절망은 소망에 대하여 저항하는 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소중한 존재라고 하시는데, 스스로 자학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절망에서 벗어나 소망에 이르십시오
크리소스톰이라는 초대 교부는 우리를 멸망에 빠뜨리는 것은 죄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절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잘못하여 죄를 지으면 회개하고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절망하는 것은 악을 행하고 그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절망이 우리를 피폐하게 만들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절망의 파괴력은 사람이 지닌 지성과 달란트와 용기를 소용없게 합니다. 절망은 인간을 무섭게 타락시키고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절망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거절하십시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나가십시오.

대선지자 엘리야도 낙심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할 때는 승리와 희망의 영으로 넘쳤습니다. 그런데 아합과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려고 할 때, 그는 절망의 영, 패배주의 영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광야의 로뎀나무 밑으로 도망하여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를 호렙산으로 보내셔서 말씀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진 희망을 빼앗아 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진 용기를 낙담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들에 물러서지 말고, 다시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십시오. 냉소주의와 절망에 굴하지 말고, 하늘에 두신 소망을 품고 나아가는 축복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너무 빨리 불평하고 낙심하고 절망한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늘의 소망, 주님을 향한 부활의 소망을 갖고 오늘 다시 주저앉았던 우리의 발걸음에 힘을 주시고 일어서게 하옵소서. 멈춰 섰던 우리의 모든 생각과 발걸음을 주님께서 주신 약속을 향해 도전하며 나아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과 더불어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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