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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 자신을 안다는 것 (창 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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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안다는 것 (창 3:6∼12)


옛날 어느 주막에 한 과객과 중이 하루저녁을 함께 묵게 되었습니다. 새벽에 일찍 잠을 깬 중이 왜인지는 모르지만 옆에 자고 있던 과객의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빡빡 밀어 버리고 먼저 주막을 떠나버렸습니다. 이 과객이 머리가 시원한 느낌이 들어서 잠이 깼습니다. 그런데 옆에 같이 자던 중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멍청하게 앉아 있던 과객이 반질반질한 자기의 머리를 만지면서 중얼거리기를“이상하다 중은 여기에 있는데...그럼  나는 어디로 갔을까?”하더랍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통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나를 보고 있으면서도 나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현대를 지식과 정보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알아야만 살 수 있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모르고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이기에 모두가 아는 일에 열심입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요즈음은 아이들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조기교육의 열풍 속에 우리아이들이 놀라울 정도로 똑똑해졌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커가면서 모든 지식에 얼마나 해박한지 깜짝 놀랍니다. 누구 앞에서든 함부로 경제를 논하고 정치를 말하고 문화를 이야기 하고 스포츠를 말했다가는 큰 코 다치기 일쑤입니다. 이제는 모두가 만물박사인 시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이 많은 분야에 모르는 것이 없게 살아가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다른 것들을 알아 가면 갈수록 어쩌면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에는 흔히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내가 아는 나와 남이 아는 나, 그리고 하나님이 아는 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가장 정확한 것은 역시 하나님이 보는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나를 전적으로 믿기에는 너무 주관적입니다. 그렇다고 남이 말하는 나만 믿고 살다가는 매사에 소극적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하는 내가 가장 정확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냐를 생각해보면 가장 정확한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의 영적 현주소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의 영적현주소는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운명가운데 현실이라는 시점을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특별히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의 어디까지가 사실입니까? 나도 나 자신이 궁금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것을 굉장히 궁금해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불순종이라는 최초의 죄를 저지르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동산 나무 뒤에 숨어있는 아담을 향하여 아담이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자신의 모습을 볼 줄 아는지를 하나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이 질문에는 몇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아담이 있는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몰라서 답을 얻으려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알고 계십니다. 아담의 형편이 어떤지 그의 정신이 어떤 상태이며 영적인 상태가 어떤지를 알고 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알고 계시지만 자신의 상태를 아담자신이 스스로 알고 고백해주기를 바라고 하시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원하시는 것이 자백입니다. 하나님이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 계시지만 스스로 고백하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치 오늘 아담에게 스스로 알길 바라고 스스로 고백하길 바라고 스스로 정직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언제나 동일한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기대했던 대답은 무엇이겠습니까?“하나님, 제가 먹지 말라는 것을 먹었습니다. 말씀을 거역하는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고백을 듣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끝까지 아담은“내가 먹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담이 숨은 곳은 동산나무 사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아담이라고 하는 실존이 숨기에 이 동산 나무사이가 안심할 수 있는 장소입니까? 일단은 하나님의 시선을 벗어나서 안심하자는 순간적인 생각이었지만 실상 자신이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아담은 피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 죄의 전모를 밝히고 전 과정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눈이 밝아졌다면 하나님 앞에 있는 초라한 자신을 빨리 알고 고백했어야 옳았습니다. 

지금 자기가 하나님을 피하여 숨어있는 데는 그 원인이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걸 생각할 의지도 없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단지 아담은 지금 그 원인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것이 자신의 실체이고 그 때문에 그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자기의 현실에는 두려움이라고 하는 분명한 증상은 있는데 그 두려움의 원인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는 알면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원인은 모르는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생물학에서 하는 말입니다만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쉽게 이해를하자면 이렇습니다. 누가 나를 꼬집었습니다. 이것은 자극입니다. 그리고 아픔을 느끼고“아야!”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것이 반응입니다. 꼬집히고부터“아야!”하고 소리를 내는 그 사이를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고통을 느끼고 고통이 전달되고 어떻게 반응할까를 판단하는 시스템공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이 꼬집어 버릴까?’, ‘허허 웃어버리고 말까?’ 아니면 ‘발로 차버릴까?’ 하고 짧은 공간에 이루어지는 그 결론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격이 없는 사람일수록 이 공간이 없거나 짧아서 자극 받는 그대로 액션이 따릅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 바로 반응해 버리는 것이지요. 그렇게 실수한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내 생각이 짧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아담이 어디 있는지를 아시면서도“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아담이 범죄 한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발견하고 깨닫게 하기 위한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벌을 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동산을 거닐면서 산보하듯이 찾으셨겠습니까? 돌려서 말씀하시지도 않고 바로“너 왜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었느냐!”하고 호통을 치셨겠지요. 그리고 찾아오시는 시간도 보면 그렇습니다. 곧 바로 찾으신 게 아니라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찾으셨다는 것은 그동안에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죄를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동안 아담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변명하고 책임을 전가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고 상황을 구조화하려고합니다. 아담이 하는 말을 잘 생각해보세요. “나에게 그 열매를 준 여자가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아니 사실은 그 이전에 그 여자를 나에게 주신 게 문제의 출발점이지요.” 이러고 있는 이것이 아담의 인생 현주소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아담에게 주셨을 때 너무 아름다워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하고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그때 아담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했다고 합니다.“하나님, 어떻게 이렇게 예쁜 사람을 저에게 주셨습니까?”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 놈아! 그 정도는 예뻐야 네가 사랑하지 않겠냐?”그랬답니다. 그 다음에 아담이 또 하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 사람이 가끔 맹할 때가 있거든요. 그건 왜 그렇습니까?”하고 물었더니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이놈아, 그래야 너 같은 놈을 사랑할 것 아니냐!” 하셨답니다. 

하여간 이렇게 예쁘고 아름답고 좋았는데 이제 와서 죄를 짓고 나서 한다는 소리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저 여자가 문젭니다.” 그러고 있단 말입니다. 책임적 인간의 자기 정체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탓하기 전에 나를 볼 줄 알아야합니다. 환경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볼 수 있어야합니다. 이웃을 탓하지도 말고 누구를 원망하지도 말아야합니다. 인간에게 원망이란 자꾸 상승작용을 해서나중에는 하나님께 까지 올라간다는 것을 오늘 아담을 보면서 깨달아야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아담의 어리석음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숨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디에도 하나님을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곳이 없는 그 동산에서 아담은 숨는 방법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고 했단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그래서인지 오늘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짓고 나서 숨는 것으로 정당화하고 숨어버리는 것으로 합리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애드가 앨런 포우]의 단편소설 중에<고자질 하는 양심>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어느 날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 집의 지하실에 시체를 묻었습니다. 자신은 완전범죄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 사람의 심장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입니다. 귀를 막아도 잠을 자려고해도 마치 죽은 그 사람의 심장소리같이 뚝뚝하고 들리는 것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서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집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그 소리는 지하실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바로 자기의 심장에서 나는 고동소리였습니다. 결국 [애드가 앨런 포우]는 아마도 용서받지 못한 죄책감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이렇게 묘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러분, 죄는 숨긴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숨어 있다고 용서되는 것도 아닙니다. 양심에 들리는 소리로 오직 하나님께 내어 놓고 용서받고서야 양심에서도 자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002년 월드컵을 통해서 유명해진[히딩크]감독의 리더십을 배우자는 운동이 한때 유행했습니다. [히딩크]의 리더십 중에 유명한 것이“실수와 실력은 별개다.”라는 철학입니다. 즉 실수를 했다고 해서 실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보면 분명히 큰 실수를 한 선수인데도 또 기용을 합니다. 실수는 실수일 뿐이지 그것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실력을 믿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땠습니까? 그 선수가 실력으로 보여줬습니다. 한 번만 실수를 해도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우리들과는 사뭇 다른 철학을 가르쳐 준 사람이 [히딩크] 감독입니다. 

자, 오늘 아담이 실수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그것을 알고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그래서“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그 상황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아담이 변명하고 숨기려고 했습니다. 만약에 그때 아담이“하나님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하고 회개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다시 시작하라고 기회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담은 자신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자신의 상황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미국의 캘리포니아 해안구조대에 물에 빠진 사람의 SOS신호가 왔습니다. “당신을 구하러 갈테니 당신의 포지션을 알려 달라.”는 질문에 “나는 한국의 은행장이다.”는 답이 돌아옵니다. “아니 현재 당신의 위치가 어디입니까?”, “글쎄 나는 은행장이라니까!” 질문을 잘못 알아듣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이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생각해 보면 잘못 알아들을 것도 없습니다. 죽어가는 상황에 은행장이면 무엇하고 대통령이면 뭐 할 것입니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 생각 자체가 죽기 알맞은 생각이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도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네 영혼이 어떤 상태냐? 네 신앙은 괜찮으냐?”고 묻는 하나님의 질문에 우리 인생은 늘 이런 식으로 대답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물으시는 나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짓지 않을뿐더러 용서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잘 알려고 하면 깊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십니다. 더 이상 숨길 것이 없는 나를 내가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숨는 것으로 나를 정당화하거나 나를 합리화하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전부를 내놓는 것이 나를 가장 잘 아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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