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가족 구원 (딤전 5:8)

  • 잡초 잡초
  • 1024
  • 0

첨부 1


가족 구원 (딤전 5:8)
  

지난 주간 말씀성회를 통해서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특히 ‘말씀 따라 가나안으로’라는 주제의 말씀을 해 주셨는데, 출애굽하여 광야40년의 삶과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연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죄악에서 구원받은 과정과 신앙생활 속에 겪게 되는 여러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훈련하시는지 잘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말씀을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구원을 위한 복음은 들을 때마다 새롭고 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알고 있는 말씀이지만, 이 복음을 듣고 또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늘 새로운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도서 기자의 말씀처럼 ‘해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같은 복음도 우리가 새롭게 들으면 새 것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복음 중의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을 하신다면 우리는 모두 멸망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므로 우리가 그 은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해 주시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값없이 주어진 것이지만 결코 값싼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의 생명을 희생하는 비싼 값을 치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구원을 받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존귀하게 여깁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께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그렇게 구원받은 줄로 확신하십니까?
그런 확신이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런 확신을 지금 이 시간 다시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은 구원의 감격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감격이 또한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길 축원합니다. 
그러나 혹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린 분들이 계십니까?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입니다. 
이에 대한 처방으로 5절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행위를 가지라”
우선 처음 사랑에서 떨어진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를 회개하십시오.
다음에는 처음행위를 가지라고 권합니다. 
처음 구원의 확신을 가졌을 때 그 때 했던 일들을 다시 하기 바랍니다. 
우선 모든 집회에 열심히 참석하고, 말씀을 사모하며 기도에 힘쓰십시오.
특히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님께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게 해 달라고 구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든지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회복하기 바랍니다. 

구원이 이렇게 기쁘고 감격스러운 것이라면, 상대적으로 구원 받지 못한 자의 슬픔은 대단히 큰 것일 것입니다. 특히 그 사람이 육신이 가족이라면 우리는 그의 구원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우리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빛을 비춰주셔서 믿지 않는 가족의 영적인 상태를 깨닫게 하시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방법을 알려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한 마을에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런 자녀를 둔 화가가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림의 소재를 찾아 가족을 남겨 두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뜨거운 햇살에 몸이 지칠 무렵 그는 훌륭한 저택 문 앞에 서 있는 신혼부부를 만났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는 얼굴을 붉히면서 ‘그거야 물론 사랑이죠.’라고 대답했습니다. 
화가는 즉시 그 신부의 얼굴과 그 얼굴에 빛나는 사랑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길을 떠나 한참을 걷다가 그는 피곤에 지친 몸으로 이제 막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군인을 만났습니다. 그의 얼굴은 상처투성이였고, 기력을 잃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군인은 화가의 물음에 지체하지 않고 ‘평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화가의 머릿속에는 무서운 싸움터가 곡식이 누렇게 익은 밭으로 변하고, 
농부들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추수하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감흥이 사라질세라 곧 붓을 들어 그려 보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그는 자기가 생각했던 아름다움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실망한 화가는 자신의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습니다. 
저만치 집이 보이는 길목에 들어섰을 때, 그의 어린 자녀가 달려와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반겨 주었습니다. 
그가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을 때는 그의 아내가 따뜻한 웃음으로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식탁에 둘러앉아  남편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를 마친 아내의 얼굴에는 사랑과 신뢰와 평화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는 마음속으로 외쳤습니다. 
“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그 그림에 붙인 제목은 바로 “가정”입니다. 

인간은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태어나 거기서 세상을 배우며 자라갑니다.
가정은 인생의 항해를 떠난 항해자들이 온갖 풍파를 헤치며 살다가 
언제든 찾아가서 편히 쉴 수 있는 보금자리이자 육체와 영혼의 피난처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을 가지게 되면 그 가정은 그에게 영혼의 피난처가 아니라 치열한 선교현장이자, 엄격하게 신앙을 시험받는 장소가 됩니다. 
바로 믿지 않는 가족들과의 영적 전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가정을 생각하면 그 눈에는 눈물이 맺히고, 가슴에는 서러움이 북받쳐 오릅니다. 
가정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이제는 아픔이 짙게 배인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들은 명절이 되어도 고향에 가는 것을 꺼려합니다. 
왜냐하면 가족들이 예수 믿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고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흩어졌던 가족과 친지들을 만나는 것이 괴롭기까지 합니다. 
교회에 오면 열심히 봉사하고 활기차게 생활하는데, 
명절에 가족들을 만나면 괜히 초라해지고 왜소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집안에 예수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은 바울 사도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다.
초대교회 때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많은 박해가 있었던 시절입니다. 
그 시절에 배교의 문제는 가장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일은 배교하는 일과 마찬가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멀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술 마시고 놀러 다니는 일에 점점 흥미를 잃게 되니까 
그런 사람들과 계속 어울리는 일이 힘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믿는 사람들과 은혜 안에서 서로 교제하는 일이 즐거워집니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가족의 문제는 조금 다릅니다. 
가족을 돌보는 일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 겁니다.
하나님은 먼저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교회가 되길 원하십니다. 
가장이 제일 먼저 믿어 가족을 구원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먼저 믿은 사람이 그 가정의 신앙세대주가 되는 것입니다. 
가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신앙세대주입니다. 
먼저 은혜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이 가정 구원을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가족을 구원하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가정에서 나를 제일 먼저 예수를 믿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전혀 알지도 못하는 다른 어느 누가 우리 가족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그 귀중한 사명을 왜 다른 어느 누군가가 할 것이라고 미룬단 말입니까?
우리는 바로 가족을 섬기라고 먼저 부르신 사명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족을 돌보지 않는 것은  믿음을 배반한 것이며, 불신자보다 더 악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은 바로 먼저 믿는 성도들입니다. 

믿지 않는 가족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 어려워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많은 분들이 자신의 온전하지 못한 삶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믿고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보다 성숙한 삶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완전해 질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결코 우리의 행위로 된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믿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 우리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를 돌본다고 할 때, 이미 거기에는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으로 복음을 전하기도 해야 하지만, 우리의 삶으로 섬겨야 합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가족의 구원을 위해 이미 섬겨왔을 것입니다. 
많은 희생과 수고를 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잘 안 되니 낙심하고 있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족을 구원하지 못한 것 때문에 끊임없는 가슴앓이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러한 설교가 그런 분들에게는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가족 구원은 아프다고 해서 피해 갈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다시 한 번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면서 돌보기를 결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들을 섬길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혼구원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그런 섬김과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