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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사와 성도간의 바람직한 관계 (갈 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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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성도간의 바람직한 관계 (갈 4:12~20)

 
신앙생활이 교회생활이라고 한다면 교회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인간 관계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일년 다니고 그만 둘 것이 아니고 평생을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지속해야 한다면 교인과 교인과의 관계, 더 나아가서 목사와 교인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형성해 나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건강한 교회상을 만들기 위해서 목사와 성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성서적인 바람직한 관계가 필요합니다.

성경에서는 목사가 성도에게 가져야할 태도와 성도가 목사에게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그리고 여러 번에 걸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험으로 미루어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을 몇 년 이상 해 오신 분이라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목사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아실 것입니다.  자기의 영적 지도자와의 관계가 신앙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신앙생활을 진지하게 해 본 사람들은 모두 뼈저리게 경험했을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와의 관계가 막혀버리면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기쁨이 없습니다.  성장이 없고 축복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바가 아닙니까?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과의 관계가 막혀버리고 잘못되어 있으면 아무리 열심히 목회를 하고 그 교회가 부흥된다고 하더라도 그 목회에는 보람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들 이런 말을 합니다.
"주님 보고 교회 나오지, 목사 보고 교회 나오느냐?"
또 어떤 사람이 성도 사이에서 시험에 빠지면 우리는 찾아가서 이렇게 상담해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고 교회 나가야지, 사람 보고 교회에 나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그 집사님 때문에 그렇게 시험 들지 말아라."
물론 옳은 말이고, 좋은 교훈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결코 문자적으로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만일 주님만 보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교회는 필요 없습니다.  기도원이나 혹은 집에서 혼자 수도하면서 신앙생활을 얼마든지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것이 아닙니다.  교회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혹은 부름 받은 모든 성도들의 교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란 말씀과 성령으로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참 하나님을 참으로 인식하고, 옳게 예배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냥 제공된 모든 은혜에 신앙으로 동참하는 사람들의 교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땅의 교회 안에는 주님과만 신앙생활을 영위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어떤 목사님은 '막대기 신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앙은 결국 넘어지기 쉬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만드신 이유는 목회자와의 관계,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수많은 관계 속에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수평적인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한 자리에 한 몸으로 불러 모으셨던 것입니다.
 
솔직히 교회 안에 5년, 10년을 다니고도 한 번도 옆에 있는 사람과 진지한 기도를 해보지 않은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번도 목회자와 마음을 터놓고 상담하며 중보하지 않고 고립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결코 그에게는 신앙생활의 기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참된 교회 생활에서 오는 축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중요한 관계를 깨달아서 우리의 남은 신앙생활을 보다 성숙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본문의 말씀은 세 가지 뼈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목사와 성도에게 주시는 공통적인 말씀이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성도가 영적 지도자인 목사에게 가져야 할 몇 가지 태도에 관해서 13절부터 1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19절과 20절 두 구절은 목사가 성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 가지 구조에 의해서 간단히 말씀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목사와 성도가 공통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에 관한 말씀이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목사와 성도에게 공통적으로 주시는 권면의 말씀은 영적 지도자와 성도간에는 모든 것에서 같이 되고 모든 일을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간단한 말씀입니다.  때로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운 교육의 철학과 성경의 사상이 다른 것을 몇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차이점 가운데 하나라고 하면 '가르치다'와 '배우다'의 개념입니다.
 
세상에는 가르치다와 배우다의 동사가 따로 존재합니다.  단어도 다르고 개념도 다릅니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따로 있습니다.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이 다릅니다.
 
저는 가르치고 성도는 배웁니다.  그래서 성도는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가만히 앉아서 졸아도 됩니다.  누가 뭐라고 합니까?  그런데 제가 졸 수 있습니까?  이 자리에 있으면서 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저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한 주간을 고민하면서 준비합니다.  만일 성도가 저의 심정으로 말씀을 듣는다면 아마도 듣는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가르치다'와 '배우다'의 차이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신명기 4장 1절과 5장 1절을 읽어보면 그 대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4장 1절에는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라고 했고, 5장 1절에서는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의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4장에서는 '가르친다'의 의미를 히브리어로 '멜라메드'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가 하면 5장에서 '배우며'라는 단어를 '블라메테템'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배우다'라는 단어와 '가르치다'의 단어의 어원이 '라마드'라고 하는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히브리어 단어가 '배우다'는 뜻도 되고, '가르치다'는 뜻도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성경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배움과 가르침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결합되어 있고 한 몸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는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같이 걸어가야 합니다.  모든 것에서 모든 일을 같이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고 같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세상 교육의 비극은 가르침과 배움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12절 상반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같이 함'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여러 가지로 요약 할 수 있겠지만, 그의 삶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이 '같이 함'의 원리를 몸소 실천해 보이셨습니다.  그는 원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와 같이 되시고자 스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육신의 교리가 왜 위대합니까?  그는 결코 우리와 같이 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와 교통하기 위해서,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서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시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같이 함의 원리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목사와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같이 되어라!"
 
그러므로 성도와 목사는 서로 같이 해야 합니다.  목사는 성도와 잘 어울려야 하고, 성도는 목사와 잘 어울려야 합니다.  그것이 좋은 교회생활의 첫걸음입니다.  목사는 성도들을 멀리하고, 성도는 목사를 멀리하는 것, 이것은 신앙생활의 비극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목사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목사는 교인과 같은 목사가 되어야 합니다.  교인은 어떤 교인이 되어야 하는가?  목사 같은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가 능력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교회 건물은 커져가고 사람들은 모이지만,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에 주셨던 엄청난 영혼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목사 같은 교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을 붙잡고 물어봅니다.
"성도님, 교회 일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그야 목사님이 하는 거지요."
"그러면 전도는 누가 합니까?"
"그야, 목사님이 해야지요."
"양육은 누가 합니까?"
"그야, 목회자들이 해야지요."
"예배 인도는 누가 합니까?"
"그것도 당연히 목사님이 하셔야지요."
 
제가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집사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우리는 헌금하잖아요.  그리고 나와서 예배드려 주고요.  봉사하잖아요.  식당에서 밥도 하고요."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가 병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까?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주님이 어떻게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주님께서 처음 교회를 세우면서 주신 명령은 성도가 목사가 되어야 한다, 전 성도가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의 일은 무엇입니까?  목사는 코치입니다.  전 성도들이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시켜주는 일이 목사의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교회는 어떤 모습입니까?  마치 목사는 운동시합의 선수와도 같습니다.  목회라는 농구시합장에서 시합이 벌어집니다.  교인들은 관중석에서 관전을 합니다.
"목사님, 아무개 집사님이 낙심해 있습니다."
목사는 달려갑니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나도록 상담을 합니다.  그러면 그 집사님이 일어나서 다시 신앙생활하기 시작합니다.  관중들은 "와! 우리 목사님 최고다!"라면서 박수를 칩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는데 자꾸 교인이 줄어듭니다.  시합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관중들이 야유를 보냅니다.  마치 젖병 목회입니다.  우는 아이에게 젖병을 물리는 것처럼, 시험에 빠진 성도들을 찾아다니면서 그 입에 젖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런 가운데 목사는 쇠진하고 탈진해 버립니다.  교인들은 그저 일주일에 한번 와서 멋있는 예배, 쇼를 보고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역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힘을 잃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1절과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봉사의 일은 누가 해야 합니까?  성도가 해야 합니다.  목사의 일은 무엇입니까?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한다는 말은 '구비한다'는 뜻입니다.  군대 가면 훈련을 시킵니다.  그것은 군사들이 나가서 전쟁을 잘할 수 있도록 선수들을 구비시켜 줍니다.  농구코치가 농구 게임을 잘할 수 있도록 선수들을 구비시켜 줍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할 일입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 사역은 성도가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오해하는 부분은 봉사의 일에 대한 개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봉사라고 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예배 끝나면 빨리 2층 주방에 가서 음식을 차려야 하는데, 교회 청소를 해야 되는데...'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성경에서 말하는 봉사의 일에는 그런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봉사는 예배 인도요, 사역입니다.  누가 믿지 않는 영혼에게 찾아가서 전도해야 합니까?  성도가 해야 합니다.  누가 그들을 성숙한 교인으로 양육해야 합니까?  성도가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역은 하지 않고 관중이 되어서 교회 예배당만 왔다 갔다 하는 성도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교회가 힘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관중으로서의 교인이 아니라 모두 사역을 감당하는 교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어린 영혼들을 돌볼 수 있는 목자 같은 교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성도가 영적 지도자인 목사에 대해서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영적 지도자인 목사에 대해서 가져야 할 태도와 관련해서 구체적으로 네 가지를 권면합니다.  목사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첫 번째, 성도는 목사를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13절과 14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여기에 보면 바울이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육체의 약함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한 가지 공통된 사실은, 갈라디아 지방의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볼 때 모두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큰 질병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가 보통 전도하는 사람들이 큰 질병을 가지고 있으면 전도 받는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자기 몸 하나도 추스르지 못하고 무슨 전도냐?  자기 병이나 고칠 것이지"  이렇게 시험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사도 바울을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병에 걸리면 그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루는 제자들이 길을 걸어가다가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이 된 것이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그들이 그렇게 물은 것은 병은 곧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갈라디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을 업신여기지 않고 그를 받아주었습니다.  받아줄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혹은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세상에서 승진과 출세는 곧 외모입니다.  외모와 승진은 비례한다고 해서 요즘 남성 미용실까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은 이발관과 달리 남자들이 누워서 오이 마사지를 받는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여자들은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성형수술을 한다고 합니다.  외모가 출세에 비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위험한 생각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영적 지도자를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는 탤런트가 아닙니다.  목사는 배우가 아닙니다.  목사는 성우가 아닙니다.  때문에 그의 훌륭한 목소리와 그의 화법과 그의 외모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목회자를 볼 때마다 그의 영을 보아야 합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열심을 가지고 있는가?  주의 복음을 향한 열정이 있는가?  성도를 사랑하는 열심이 있는가?  성경은 그러한 것들을 눈여겨보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교우 여러분들이 그런 점에서 참으로 소중하고 귀한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서울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님처럼 그렇게 잘 생기지도 못했고, 잘 빠지지도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더 잘 알 듯이 저는 키가 작습니다.  머리는 큽니다.  거기에다가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목사로 받아들이고 저와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코 목사를 외모로 평가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는 믿지 않는 영혼을 깨우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목회자, 영적 지도자를 볼 때 외모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의 영을 깊이 보는 눈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성도는 영적 지도자인 목사에 대해서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성경은 갈리디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예수님과 같이 영접했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우리는 목사에 대한 존중을 보기가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목사가 너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열 교회에 목사님이 한 분밖에 안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일 년에 교회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은 한두 달이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집사님들이 설교하고 교회를 지켰습니다.  그들을 조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일 년이 지나서 목사님이 오시면 그 날은 축제입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온 동네가 떡을 하고, 정말 천사와 같이 목사님을 영접했습니다.
 
물론 그 분들의 인격이 훌륭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 초대 한국 교회는 목회자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것이 부흥의 결정적인 요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먼저 목사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우리 통합 교단만 해도 일년에 목사가 천명 가까이 나옵니다.  그래서 목사 보기를 너무 가볍게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성경에서는 성도들이 영적 지도자들을 마음 깊이 존중하고 귀하게 여길 때 축복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두 가지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선생님 욕과 목사 욕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자녀 앞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만약 자녀 앞에서 선생님 욕을 한다면 그 자녀가 학교에 가서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만약 자녀들 앞에서 영적 지도자인 목사를 험담한다면 그 자녀가 교회 가서 어떻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지도자가 불완전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로서 그에 대한 험담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제 짧은 목회 경험 동안 뼈저리게 느낀 것입니다.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성도 여러분의 신앙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거기에는 결코 은혜가 없고, 축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짧은 말씀이지만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귀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여호와의 증인이나 이단들이 기성교회를 비난하면서 곧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만인제사장직"
"모든 성도들이 다 만인제사장이라고 했는데 왜 목사가 있는 것이냐?  칼빈도 평신도였지 않느냐?  그래서 기성교회는 잘못되었다."
 
그러나 여러분,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똑바로 알고 말해야 합니다.
 
칼빈은 평신도가 아닙니다.  칼빈은 1521년 열두살 때부터 누아용 대성당에 있는 라 제시느 제단으로부터 나오는 수입의 일부를 받았습니다.  그가 다녔던 몽때귀대학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정통주의 요새로서 혹독한 신앙훈련을 시키는 곳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는 1534년 5월 4일에 그의 고향인 누아용에서 사제직을 로마 카톨릭교회에 반환함으로써 로마 카톨릭교회와 공식적으로 결별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칼빈이 평신도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물론 우리 개혁교회는 만인제사장직을 따릅니다.  확실히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왕과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께 영적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당시 종교개혁자들은 '만인제사장직'과 '교역자직'은 구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제사장직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고 있지만 교역자직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교황의 제사장직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제거시켰다고 해서 교회의 교역자직을 폐지시킨 것은 아니다."  당시 종교개혁자들은 교역자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무도 교역자들의 영예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의 신앙과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서라도 부탁드립니다.  목사를 존경하십시오.  이것이 안되면 지금부터라도 여러분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서 목사를 존경하는 훈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성도는 영적 지도자인 목사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이 본문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 바울이 정말 눈이 나빴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눈을 빼주려고 했다는 해석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이것을 관용어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아기를 보고 '얼마나 귀여운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눈은 굉장히 중요한 것을 나타내는 관용어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의미하든 간에 이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향해서 굉장한 사랑을 쏟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저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유익을 위해서 말씀드립니다.  목회자를 사랑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같은 서신인 갈라디아서 6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목회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신앙에 유익이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사도 바울을 향한 갈라디아 교인들의 극진한 사랑, 그것은 사도 바울의 복이 아니라 갈라디아 성도들의 복이라고 그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이요, 성경의 내용입니다.  저는 가끔 선물을 받을 때마다 황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끔 평신도가 되어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평신도였다면 저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아까운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 자기 일같이 기도하고 생명의 말씀을 주는 그 영적 지도자에게 아까운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성도들이 목사를 사랑하고 목사가 성도를 사랑할 때, 그것이 목사와 성도에게 서로의 유익이 되고 교회가 부흥하는 지름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는 강단에서 목사의 입을 통하여 전해지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무슨 말입니까?  갈라디아 교인들과 사도 바울이 이렇게 좋은 사랑을 나누었는데 갑자기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모든 교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중에 몇몇 교인들이 사도 바울과 원수처럼 지내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도 바울이 참된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바른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주의 말씀으로 주의해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즉, 기록된 말씀과 선포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기록된 말씀은 성경이고, 선포되는 말씀은 설교입니다.  그러니까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비록 사악한 교역자가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하더라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알고 그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갈리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과 유대주의를 좇아갔을 때 사도 바울이 아주 강한 어조로 설교하고 책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몇몇 성도들이 그 사랑을 버리고 사도 바울과 원수처럼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마음에 거슬리는 설교를 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목회를 하면서 간혹 교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제 설교를 하지 마세요!"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손을 얹고 말씀드리지만, 어떤 사람을 개인적으로 놓고 설교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제가 설교할 때 자신을 향해서 설교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지면 그것을 저의 편협함으로 여기지 말고 성령의 인도함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저를 사용하셔서 성도 개인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에 어긋남이 없다면 이 강단에서 저를 통하여 선포되는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은 목사가 성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19절과 20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목사가 성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본문은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먼저는 19절에서 목사는 성도들에 대해서 해산하는 수고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해산하는 수고에는 사랑과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목사는 성도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한 생명을 낳기가 그렇게 힘들지만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영혼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인내해야 합니다.  사실 목사도 인간입니다.  어떨 때는 속을 썩이는 교인을 보면 짜증도 나고, 그 앞에 대놓고 하고 싶은 말을 확 내 뱉어 버리고 싶을 때가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인내해야 한다!"  나와 뜻이 맞지 않는 교인들, 내 뜻대로 성장하지 않는 교인에 대해서 한없이 참고 인내해야 될 것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20절에서 목사는 성도들에 대해서 담대함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20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19절에서는 어머니를 비유한 것 같고, 20절에서는 아버지를 비유한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제 내 언성을 높이려 한다고 합니다.  이제까지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너희가 교리적으로 잘못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언성을 높이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회자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성도를 책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을 바르게 훈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목사의 마음을 헤아려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책망하고 권면하는 그 목사의 마음도 결코 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을 사랑하기에, 그 성도를 지극히 사랑하기에 그를 위해서 책망하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성도는 영적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믿음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교회의 한 몸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목표는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 성장함에 있어서 목사와 성도의 관계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목사와 성도가 주님 안에서 좋은 관계,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갈 때 그 교회는 반드시 부흥할 것입니다.  그의 심령은 영적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관계에 대한 교훈들이 우리 신앙의 지침이 되어서 우리를 날마다 성숙하게 하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아름다운 성도로 세움 받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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