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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끄럽지 않은 소망 (롬 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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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 않은 소망 (롬 5:5~11)


악성(樂聖)으로 불리우는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이 남긴 편지 가운데 동생인 칼에게 쓴 편지는 너무도 유명합니다. 그 편지는 유서처럼 남아 있습니다. "아우야, 나는 귓병이 언젠가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이제는 버렸다. 나는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을 피하고 있다." 음악가로 귀가 먹었다면 어떻겠습니까? 작곡가로서 자신이 작곡한 곡을 들을 수 없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러나 베토벤은 귀머거리가 된 후 전원 교향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베토벤이 지은 곡은 언제 들어봐도 어두움을 뚫고 나가는 밝음과 빛이 있습니다. 베토벤은 편지 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 속에서만 기쁨이 태어난다. 우리는 그것을 얻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는 소망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박사는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 이란 저서에서 6백만 유대인이 포로 수용소에서 죽어갈 때 생존자를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마음에 희망을 포기한 사람보다 소망을 잃지 않는 사람이 마지막까지 살아 남았음을 증언한 것입니다. 또한 절망하는 동료에게 소망을 갖도록 격려하던 사람들도 모진 고문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소망을 잃어버리면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아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으면 환경이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살아 남게 됩니다.  

본문을 통하여 바울은 우리의 실존을 고발합니다. 이유는 우리가 별 볼일 없는 존재임을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 얻을만한 수준에 있는 존재가 아님을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구원에 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경우 환멸(幻滅)의 비애를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소망은 환멸의 비애를 느끼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운 때에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아니함' 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고 우리가 가진 소망이 부끄럽게 되는 때는 언제입니까? 본문을 통해 보니 우리가 약할 때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때에도 우리의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하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망을 이기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첫째로 사랑을 부으십니다  

스위스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죽기 전 미국에서 지냈습니다. 그가 어느 모임에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박사님께서 지금까지 신학자로 연구한 것 중에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엇입니까?" 질문자는 심오한 신학적 답변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바르트는 한동안 생각하다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죄인된 나를 사랑하셨고, 내가 그 사랑을 안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발견입니다. 예수가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그 사랑의 사실을 안다는 것보다 더 위대한 발견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의 사랑 때문에 살고 있음을 분명히 고백해야 합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질 때 가치 없던 존재가 가치 있는 존재로 바뀌어 지게 됩니다. 부끄러운 존재가 아름다운 존재로 바뀌어 집니다. 의롭지 못하던 존재가 의로운 존재로 바뀌어 집니다. 이기적 존재가 남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이타적 존재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본문 5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어졌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히시기 바랍니다. 이미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그 사랑을 확증하셨노라 본문이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십자가 사건으로 끝났지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현재에도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부어지기에 우리의 소망은 결코 부끄럽지 아니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4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의 작사자 리먼(F.M.Lehman)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말로다 형용 못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마지막 후렴 부분은 병원의 벽에 휘갈겨져 쓰여져 있던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후미에 이 글을 붙이지 않으면 도저히 자신이 쓴 가사가 완성될 수 없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십니까?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바 되었음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바로 능력이며 위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가진 소망은 부끄럽지 아니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구원을 베푸십니다

김영길(金永吉) 박사는 한동대학교 총장이며 창조과학회를 만든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 유학 중에 부인을 따라 교회를 다녔지만 예수가 누구신지, 그의 죽음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교회를 나가도 전혀 감동이 없는 형식적인 출석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큰 깨달음이 왔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 또한 죄인인 자신이 구원을 얻으려면 죄 없는 누군가가 대신 죽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이 죽을 수 없기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셨다는 사실, 그 아들 예수가 자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을 모두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는 순간 그의 어두웠던 마음이 환하게 밝아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예수를 영접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주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이 시간 저의 모든 죄를 주님 앞에 내어놓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기도하며 자신에게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출근을 하는데 하늘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어제 본 그 하늘이 아닌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웠으며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는 구원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분명히 가지게 되었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무엇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는가 본문은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죄인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길은 자신의 노력과 공로로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과 점이 없는 어린양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죄인된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우리가 예수의 피로 인해 정결케 되었으며 동시에 구원받게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보혈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며 구원을 얻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이 결코 부끄럽지 아니함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화목을 주십니다 

미국 상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부통령까지 역임했던 험프리(Hubert H. Hunmphrey)는 미정계의 대표적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죽어 장례식을 행할 때 당시 닉슨 대통령이 험프리 미망인 옆에 앉았습니다.이는 일대 센세이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닉슨과 험프리 사이가 나뻤었기 때문입니다. 고양이와 개처럼 원수같은 사이였습니다. 닉슨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 가장 괴롭혔던 사람이 험프리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장례식에 닉슨이 험프리 부인 옆에 앉은 것입니다. 그렇게 된데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험프리 의원이 죽기 며칠 전에 평소친분이 있던 제시 잭슨 흑인 목사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닉슨 대통령을 만나게 해 주시오." 잭슨 목사는 놀라며 물었습니다. "닉슨이라면 당신이 원수처럼 여겼던 사람이 아닙니까? 왜 하필이면 그를 만나려 합니까?" 험프리가 대답합니다. "그와 원수지간이 되어 있는 한 내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죽기 전에 한 번 만나 사과하고 싶습니다." 소식을 들은 닉슨은 곧 바로 달려왔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고 용서하였습니다. 원수와 같은 관계가 청산된 것입니다. 그 후 험프리는 며칠 동안 평안한 상태에서 지내다가 죽었습니다. 사람 사이도 화평의 관계가 깨어지면 미움과 증오로 평안함이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다면 어디에서 평안을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본문 10절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 즉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여기의 원수라는 단어와 화목이라는 단어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화목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데 그 죄 값을 예수께서 대신 갚아 주셨습니다. 본문의 즐거워하다는 기뻐 날뛰는 표현을 의미합니다. 그 기쁨의 정도를 3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예수를 믿음으로 화목을 얻은 백성은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을 기꺼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소망을 부끄럽지 아니하도록 만들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샤르니(Charny)는 나폴레옹 황제 때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친구들도, 가족들도 발길이 뜸해졌습니다. 홀로 버려진 느낌에 너무나 쓸쓸했습니다. 그래서 돌 조각으로 벽에 적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바닥의 돌 틈에서 푸른 싹 하나가 고개를 내밀며 나왔습니다. 샤르니는 간수가 주는 물을 매일 조금씩 남겨서 푸른 싹에 부어주곤 했습니다. 그 싹에서 마침내 꽃봉오리가 생기더니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그는 먼저 썼던 글을 지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 감옥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소문은 조세핀 황후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조세핀은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이는 결코 나쁜 사람일 수 없다" 고 황제에게 사면을 건의했으며, 샤르니는 석방되었습니다. 샤르니는 감옥에서 핀 꽃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생명이 다하기까지 가꾸었습니다. 소망은 감옥 안에 핀 아름다운 꽃과 같이 우리 인생을 풍성하고 향기 나게 합니다. 소망은 곧 생명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하도록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부끄럽지 않은 소망으로 승리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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