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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 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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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전 8:1~13)


'러브스토리'(Love Story)라는 영화를 통해서 전 세계에 퍼진 유명한 대사가 하나 있습니다.
주인공인 하버드 법대생 올리버와 아내 제니가 처음으로 큰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을 때 충격을 받은 제니는 집을 나가 버립니다.
나중에 후회하게 된 올리버가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제니를 찾다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보니, 열쇠가 없었던 제니가 집 앞에서 추위에 발발 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올리버가 "미안해."라고 사과를 하자, 제니가 올리버의 입술을 자기 손가락으로 막으면서 했던 말이 바로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사랑은 결코 '미안하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라는 유명한 대사인 것입니다.
하지만 요즈음의 '연애 카운슬러'들은 이 대사만큼 연인들에게 해를 끼친 말도 없다고 합니다.
사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이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해야 하고 빨리 해야 하는 것인데, 바로 이 '유명한 대사' 때문에 많은 연인들이 '미안하다'는 말을 서로 하지 않음으로써 그 관계를 망치는 일이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러브스토리'라는 영화가 아주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대사만큼은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많은 젊은이들에게 퍼뜨리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사랑'이란 우리 기독신자들 역시 세상의 연인들 못지않게, 아니 사실상 그들보다 더 많이 쓰는 중요한 말이지만, 그 '사랑의 의미나 적용'에 있어서는 그와 같은 오해와 혼동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바로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꼭 종교인이 될 필요가 없다.'라든지, '진정한 사랑의 구현자가 되기만 한다면 반드시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말들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멋진 대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참된 '기독교의 사랑 관계'를 완전히 망치고 있는 망언이요 감언이설들인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우리 기독신자들은 이 '사랑'이라는 중대한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참된 뜻을 오직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사랑'이라고 하면, 항상 그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며 둘째는 '이웃을 향한 사랑'이기 마련인데,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본문을 통하여 바로 그 두 가지 사랑의 의미와 적용 방법들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독신자는, 지식에 있어서 통달하고 행위에 있어서 자유하게 됩니다. 

본문 1절부터 3절의 말씀에 "1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앞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사도 바울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여러 가지 질문들을 해 왔었는데, 본문은 그 중에 하나인 "우상의 제물에 대한" 질문을 두고 이제 사도 바울이 답변을 시작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우상의 제물"이란 꼭 제사상에 올랐던 젯밥만을 가리켜 한 말은 아닙니다.
당시 고린도 시에서 일반적으로 매매되던 육류의 거의 대부분이 '우상 제물'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고기로 쓰이게 될 짐승들은 먼저 우상 신전에 끌려가서 거기서 우상종교 행사의 일환으로 도살당한 후, 바로 우상 신전 내의 식탁에 오르거나 혹은 시장에 팔려 나오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시장의 정육점에서 팔리던 고기들은 대부분이 따지고 보면 다 '젯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본인이 사 먹지 않더라도 친구나 이웃이나 거래처 사람이 대접하는 식사가 바로 그런 고기로 준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하는 문제는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있어서 아주 애매하고도 민감한 사항이었으며, 바로 이 문제에 대하여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지식"을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질문에 답하면서 제일 먼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 장 전체에서 우상 제물 문제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대답해 주는 말의 요지가 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지식'이란 하나님 앞에서 오직 교만이 될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교만의 지식보다 먼저 사랑을 가지고 있어야, 다시 말해서 사랑에 기초한 지식이 있어야 정말 신자다운 덕을 쌓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저 지식만 가지고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는 정말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오바댜 1장 3절에서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라고 말씀하듯이,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아직 모르는 가운데 스스로는 다 알고 있다고 크게 착각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오만과 자만의 지식에서 벗어나는 길이 바로 3절의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었느니라"는 말씀에서 나타납니다. 
아까 1절에서 '사랑은 덕을 세운다.'라고 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모두다 그 '사랑'이란 단어의 뜻을 '사람 사이의 사랑'으로만 이해할 것입니다.
아니 일부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이런 말씀을 대하면 그저 '이웃사랑'으로만 직결시키는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단어의 뜻을 바꾸어 오용하는 행위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를 논할 때, 적어도 참된 기독신자라면 그것은 항상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사랑'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즉 '신자 쪽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타내는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었느니라" 즉 하나님께서 그 신자를 알아주시는 사랑, 바로 이것이 참된 기독신자에게 있어서는 항상 '처음 사랑'이며 '제일 첫째 되는 계명의 사랑'일 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시는 대로 아는 사람이 되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문장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절의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간에 하여튼 이 문단 전체의 뜻은, 진정한 지식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지식이 되어야 하고 그런 진짜 지식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만이 얻을 수 있다는 데에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참된 '하나님 사랑'을 소유한 신자에게서 또 한 가지 나타나게 되는 것이 있는데, 이어지는 4절 이하 6절에 기록하기를 "4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란 말은 '우상이란 실재하는 신이 아니라 공허한 허상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 곳곳에서 우상을 '허망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대로, 우상의 본질 그 자체가 바로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자라면 즉각 깨닫게 되는 지식 중에 하나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는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 즉 '많은 종교들과 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신자는 진짜 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요지부동으로 믿는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즉 만물의 창조주 되신 신이신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 고백하는 신령한 지식입니다.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 고백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중보자가 되시고 우리는 오직 그 분을 통해서만이 거듭나게 되는 지식을 뜻합니다.
바로 이것이 먼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만이 얻게 되는 참된 지식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참된 지식이 신자들로 하여금 "우상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 자유롭게 만들어 줍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오로지 '허상에 불과한 존재'인 까닭에 그 '헛것'이 고기라는 물질 자체에 하등의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상은 죽은 것이기 때문에 우상 앞에 바쳐진 제물이라 해도 그 음식 자체에 무슨 악한 기운이나 해독이 스며드는 것은 아니며, 음식은 모든 다른 만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우리에게 먹으라고 주신 물질일 뿐이라는 지식을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잘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은, 신자들에게 참된 지식을 주며 그 지식은 신자들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신앙양심의 자유를 누리게 해 줍니다.
제가 다녔던 대학교의 교훈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요한복음 8장 32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참 좋은 말씀이고 학문의 전당의 교훈으로 인용하기에도 아주 적절했지만, 문제는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습니다.
그 '진리'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스스로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직결시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런 진리란 것은 바로 '하나님 모르는 교만'으로 직통하게 됩니다. 
그 '진리'라는 것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찾을 줄 모르면,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진리를 통달한다 해도 진정한 자유는 결코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신 줄로 똑바로 믿고 계십니까?
그런 여러분은 세상에서 제일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정말이지, 여러분은 세상의 그 어떤 박사학위 소유자보다도 더 높은, 더 고상한 최고의 지식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으면,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알아주고 계시는' 자녀가 되어 있으면 우리는 '사람으로서 알아야 할 제일 중요한 것을 완전히 통달하고 있는' 진짜 현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정말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런 신자에게는 사실 목사가 이러쿵저러쿵 잔소리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사랑만 진실하면,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처신을 해야 하는지, 그런 '행위의 문제'를 놓고 따지고 가르치고 할 필요도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을 받았고 그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 과정에 있는 것이 분명한 성도에게 무슨 '먹는 일에 대하여'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나 자질구레하게 말할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겠습니까?
참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 사랑'을 확실히 소유하고 있는 신자는 세상에서 가장 수준 높은 지식에 이미 통달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서도 스스로 신앙양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자유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형제를 사랑하는 기독신자는, 지식에 대하여 겸손하고 행위에 대하여 절제하게 됩니다. 

7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7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9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앞에서 언급한 그런 완전한 지식이 없고 그런 완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약한 신자들이 지상교회 안에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바로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지식이 충만하고 자유하게 된 신자야말로, 바로 그런 약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책임을 받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 약한 자들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는"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 옛날에 가졌던 미신적인 사고방식과 버릇이 교인이 된 후에도 아직 다 없어지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다"란 말은, 그런 약한 신자들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을 때에는 그 먹는 고기를 진짜 '우상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는 말은 '그들의 연약한(sensitive, tender) 양심을 해치고 상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즉 그런 자들이 그런 고기를 먹게 되면 자신이 마치 우상과 접촉하는 느낌을 가지게 되며, 그 결과 실제로 본인의 양심에 거리끼는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라는 말은 쉽게 풀이하자면 '우리가 무엇을 먹느냐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손해될 것도, 먹는다고 득 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같은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는 경우입니다.
"너희 자유함"이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우상은 '헛것'에 불과하며 음식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우상 제물이라 해도 아무 양심의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는 자유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처럼 신앙이 좋아서 '지식에 통달하고 행위에 자유한' 신자의 언행이 때로는 약한 신자에게는 "거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꼭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10절부터 13절에서 바로 그 점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10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이란 말은, 아까 앞에서 설명했던 대로 우상 신전이 일종의 도살장처럼 쓰이고 있던 당시 그 신전 안에 있던 식당에서 신자가 식사를 하게 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나중에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그런 제물을 '우상 신전에서 우상 교도들과 함께 먹는 것'은 엄중히 금했습니다.
하지만 시장이나 일반 가정에서 그 음식이 제물인지 아닌지 알 수 없을 때에는 아무 상관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 일부 '신앙 지식이 있다는 신자'들 중에서는 신앙양심의 자유를 내세워서 "우상의 집에 앉아서 먹는 것"까지도 괜찮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지식의 측면'에서만 볼 때에는 정당화될 수 있겠지만, '사랑의 측면'에서 볼 때에는 중대한 잘못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죄를 짓게 만드는 결과를 유발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자기 딴에는 아무 양심의 거리낌 없이 우상신전의 식당에서 먹는다 해도, 그것을 보는 신앙 약한 자들이 그들의 행위를 따라서 자기네들도 우상제물을 먹게 되면, 원래 그들의 양심에 거리껴 했던 일을 행하도록 부추기는 결과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라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여기 '멸망'이란 영원한 저주의 심판에 빠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현재형으로 되어 있는 말로서 '멸망을 향해 가게 된다.' 즉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큰 위험에 빠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좋은 신자'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곁에 있는 '신앙 약한 교우'들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실' 정도로 귀중한 존재이며, 그처럼 같은 예수님의 피를 수혈 받았으니 그만큼 사랑해야 마땅한 혈육지간 즉 '영적 형제'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즉 그런 형제를 신앙적으로 실족시키는 일은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그처럼 귀한 형제의 신앙양심이 더 진실하게 자라고 그 신앙생활이 더욱 경건해지도록 도와주지 아니하는 죄는, 그런 '약한 자'를 위하여 피 흘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엄청난 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진짜 형제 사랑이 있는 신자라면, 아무리 자신의 신앙 지식이나 양심으로는 옳다고 판단되어도 결코 행할 수 없는 일들이 필연적으로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형제를 실족케" 하느니 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는" 편이 백 번 더 낫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신앙 양심대로 할 자유가 있다.'라는 것은 '신앙 좋은 사람'의 권리 제1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실족시키지 않고 구원 얻게 하는 것'에 비해서는 지극히 미미한 문제, 아니 당연히 포기할 줄 알아야 할 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책임 없는 자유'란 이기심이며 방종이 될 뿐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좋은 신자'에게 주어진 대표적인 책임 중에 하나가 바로 교회 안에서 '믿음이 약한 형제'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신자'가 형제에 대한 사랑 없이 자기 지식만 주장하면 그 사람은 교회 안에서 제일 고집쟁이가 되기 마련입니다.
소위 '믿음 좋다는 신자'가 자기 곁에 있는 교우에 대한 사랑이 없이 그저 자신의 신앙양심의 자유만을 주장하면, 그 사람은 영락없이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을 실족시키는 제일 큰 문제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형제에 대한 사랑이 없는 지식과 자유'는 곧 형제를 멸망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교인들 사이를 갈라놓는 일들이 어디 '믿음 약한 교인'들 때문에 벌어집니까?
그런 '약한 교인'들이 일으키는 문제란 것은 사실상 웬만큼 기반이 잡혀 있는 건실한 교회에는 그야말로 '개미가 정자나무 건드리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지만 '목사에게 가까운 핵심 멤버'들이야말로 실제로 교회에 심각한 시험을 일으킬 수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며, '열심히 봉사충성하면서 앞장서고 있는 일꾼'들일수록 다른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실족시키는 현실적인 '영향력'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런 까닭에 참된 기독신자라면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통하여 참된 지식을 얻고 그 지식 때문에 행위에 자유로워졌다 하더라도, 아직 믿음이 약한 형제 앞에서는 절대로 그 지식을 내세우지 않고 그 자유 역시 자제할 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많이 알고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더욱 겸손한 것'이야말로 '지식의 절정'이며, '자기 행위에 대한 자유를 오히려 절제하며 사용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자유의 최고 단계'가 아니겠습니까?
진정한 '형제 사랑'을 소유한 신자답게 늘 자신의 '신앙 지식에 대한 겸손'과 '양심 자유에 대한 절제'를 꼭 함께 발휘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경청하지 않게 만들며 형제를 멸시하게 만드는 '교만 덩어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가 되려 하기 이전에 먼저 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소유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바른 순서입니다.
또한 그 지식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 때에도, 자신이 그 '처음 사랑'을 여전히 잃어버리지 않고 있는지를 늘 스스로 재확인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자유'란 하나님 앞에서 방종한 사람이 되게 할 뿐 아니라 형제를 '함께 구덩이에 빠지도록 이끌어가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자유권'만을 주장하기 전에 과연 '절제의 의지'가 내게 있는지부터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내가 신앙양심을 따라서 부끄러울 것 없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그런 때일수록 나의 그 자유로운 행위가 교회 안에서 다른 교인을 오히려 실족케 하고 있지 않는지를 더욱 주의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자기 지식을 내세우면서 제 잘난 척하는 사람은 얼마나 꼴불견입니까?
하지만 별로 똑똑하지는 못하더라도 사람이 진실하고 선하면 누구나 다 좋아하고 칭찬하게 됩니다.
인간사회에서도 자신의 자유만 강조하는 사람은 정말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철없는 사람이 될 뿐 아닙니까?
반면에 그리 뛰어난 사람은 못 될지라도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만 단정하고 예의발라도 절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꼭 마찬가지일 뿐 아니라 더욱 강하게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진짜 사랑'이 있는 신자,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신자라면 그런 '교만의 지식', 그런 '방종의 자유'에 결코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사랑'을 통하여 참된 지식과 자유를 찾고 누리며 '형제성도 사랑'을 통하여 겸손한 지식과 절제된 자유를 발휘하는 '사랑의 구현자', 실로 '사랑으로써 덕을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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