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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 (고전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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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 (고전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본문 말씀은 사랑의 속성 중 열다섯 번째인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Ⅰ. 본문해설 

“견디느니라”는 “바라며”의 사랑의 속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앞에서 바라는 것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곧 이 궁극적 희망 때문에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Ⅱ. 이 구절의 의미 

A. ‘견디느니라’: 휘포메네이 

이 부분은 희랍어 성경에 ‘휘포메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군인들이 굳건히 진지를 사수할 때 쓰이곤 합니다. 즉 강한 도전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뒤로 물러서지 않고 서 있는 종류의 견딤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것을 참으며”와는 구별됩니다. 참는 것이 오직 잘 인내하는 것을 가리킨다면 “견디느니라”는 그뿐만 아니라 기회가 있으면 앞으로 나아가는 역동적인 힘의 개념을 포함합니다. 

B. 용기 있는 견딤 

결국 견딤은 용기 있는 견딤을 말합니다. 궁극적인 목표가 있고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하기 때문에 모든 비관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고통을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가 하는 사랑의 궁극적 목표가 사람을 사랑하는 데 그친다면 얼마든지 좌절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사랑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과정 가운데 고통과 어려움이 있어도 멈추지 않고 용기 있게 견디며 사랑을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견딤은 종말론적 기대와도 밀접히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할 것이며, 그때 하나님께서 내가 사랑하며 산 모든 것에 대해 위로와 소망을 주실 것이라는 기대로 인하여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끊임없이 바꾸어 승리하도록 만들어 주는 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한 사람을 지배하면 세상 사람이 생각하는 고통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살게 만드는 소중한 선물이 됩니다. 

이 모든 견딤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사랑의 유무를 밝히 보여주십니다.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질서와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가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다른 상황 가운데 두십니다. 그곳에서 견디지 못하는 자신을 볼 때 자신 안에 사랑이 없음을 통절히 깨닫게 되는 것이니, 곧 공동체의 지평에서 사랑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이 맥락에서 우리는 고린도 전서 13장이 철학적 담론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교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Ⅲ. 견딤의 대상 

그렇게 사랑이 오래참고 모든 것을 견딘다면 도대체 무엇을 견디는 것입니까? 

A. 사람들의 악 

일차적인 견딤의 대상은 사람들의 ‘악’입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악을 견디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는 거리가 매우 멉니다. 수많은 고대의 법을 보십시오. 하나같이 복수의 충실한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하지 않지만 복수야말로 누군가가 자신에게 행한 악으로 인해 입은 외적인 손해와 마음에 상처를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런 복수를 하지 못하는 처지라면 더욱더 억울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복수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악’을 깊이 끌어안고 삭히고 녹여낼 수 있는 정신과 영혼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아픔까지 보는 힘이 있습니다. 그 사랑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악한 일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해야할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물론 이 사랑은 단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도 주님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에게 까지 그 질서가 퍼져나가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랑으로 미움을 정복하는 과정은 끊임없는 고통의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칼빈 선생이 말한 주어진 십자가의 경험과도 상통하는 것입니다. 

B. 주어진 십자가 

칼빈 선생은 자신의 책 속에서 “우리에게도 십자가가 있으니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말할 수 없는 지혜와 섭리 속에서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모든 고통스러운 상황과 고통을 의미한다.”고 정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당신의 자녀로서 더욱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을 본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모든 고통을 십자가라는 말로 요약한 것입니다. 성도는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고, 예수의 형상을 닮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십자가를 다시 둘로 나누어 봅니다. 

첫째는 ‘절대적인 십자가’입니다. 절대적인 십자가는 자신의 과오와 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통입니다. 단지 예수를 믿는 다는 이유 때문에 다른 이들로부터 당하는 많은 핍박과 고난이 그것입니다. 둘째는 ‘상대적인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해 고난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바르게 살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자신을 반란을 꾀하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애매히 주어진 십자가가 아니라, 다윗 자신의 죄에 대한 징계였습니다. 그러나 이 징계는 복수심으로 인한 징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지혜 속에서 다윗을 보다 순결한 신앙의 터 위에 세우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전하는 인물이 되게 하시기 위해 내리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점점 나이가 들어갈수록 궁창에 가득 찬 하나님의 진리, 신실하심, 영광을 노래하여 모든 세대에게 그것을 전하였고, 땅에 있는 지상의 왕국보다 그리스도에 의해 계속되는 영원한 의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동안에는 십자가 인생의 불평과 불만의 원인이 됩니다. 하지만 주님을 사랑할 때는 내 더러운 영혼과 육체가 그리스도의 중보의 은혜를 힘입었다며 십자가를 오히려 자랑으로 삼게 됩니다. 

Ⅳ. 사랑이 견디게 하는 방식 

그러면 도대체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 그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까? 

A. 은혜의 공급 

가장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은혜의 공급입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우리 영혼과 마음에 은혜를 주심으로써 사랑을 이루게 하시고, 그 안에서 사랑이 없었더라면 견딜 수 없던 것을 끊임없이 견디며 사랑의 속성을 구현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이런 하늘의 자원은 우리가 한번 받고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했다가 은혜를 받아 진심으로 용서하고 나중에 은혜로부터 미끄러져 다시 미워할 수 있지 않습니까?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가 모두 인간에게 진실입니다. 영원한 치유는 없습니다. 오직 끝없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것이 인간에게 정답인 것입니다. 은혜의 힘이 넘지 못하는 산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아무리 많은 진리의 빛과 큰 사랑의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은혜를 지키지 못하면 인생은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은혜에 관한 한 “저번에 아주 큰 은혜를 한번 받았으니까? 이제 주님께 그만 의지해야 겠다.”라는 결론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더 많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B. 십자가의 현재적 경험 

은혜의 공급은 구체적으로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으로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의 내면과 공동체적 지평에서 경험한 사랑의 특성들은 모두, 사도가 그리스도 예수와 만남으로써 배운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에도 계속해서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바울은 드디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기의 모든 죄악을 일체 나쁜 것으로 값지 않고 견디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사도는 예수의 십자가가 모두 자기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의 인생 전체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가 자신의 인격과 영혼, 마음 안에서 끊임없이 죽고 다시 사는 ‘십자가의 현재적 경험’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본성적으로는 악을 악으로 값는 것이 훌륭한 수단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를 봅니다. “지금 내가 앙갚음하려는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이와 같이 묵상을 하면 이천 년 전에 죽은 예수의 죽음의 기운이 죄를 생각하는 신자들에게 스며들어 옵니다. 그리고는 영혼과 정신 마음속에 점차 퍼져가고,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기운을 끊어버려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의 현재적 경험이 죽이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참된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것들만 죽입니다. 바로 그때 성도는 ‘자기 깨어짐’과 ‘자기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실상 자기 깨어짐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습니다. 모든 사는 것은 죽기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이기고 ‘십자가의 현재적 경험’을 통해 죄를 지으려는 옛 본성과 자기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들을 미워하고자 하는 죄 된 본성을 죽이면 곧장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영적인 소생의 기쁨 때문에 성도는 잠시 전에 경험했던 예수와 함께 죽는 경험의 고통을 잊어버릴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현재적인 경험 속에 자기가 정말 무가치하고 악한 존재이며, 예수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아야할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때 이웃의 모든 악을 이길 수 있는 사랑의 견디는 속성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Ⅴ. 결론: 사랑 안에서 사랑받음 

비천한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불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깊이 힘입어, 다른 사람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완성하는 도구가 되는 사람들은 진짜 행복 합니다.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고 숨쉬며, 그 사랑 안에서 내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도 발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하여 다시 당신께 돌아가는 우주적인 사랑의 한 도구가 된다는 사실에 그 사람은 무한히 감격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지체들을 사랑하는 데서 더욱 온전해지도록 갈망하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성도의 면류관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드러내는 그 견딤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인 것입니다. (김남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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