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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져주심 (마 8: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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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져주심 (마 8:14~15)
 
 
❚만져야 합니다

일본 사람이 한국에 와서 살면서 가장 곤혹스러울 때가 언제냐고 물으면 이런 대답을 합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아니면 사람이 많은 곳에서 서로 몸이 닿거나 발을 밟을 때라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유난히 남의 몸에 닿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고의든 아니든 간에 남의 몸에 닿거나 발을 밟는 것을 큰 실례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일본에 갔을 때 조금만 몸이 스치거나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너무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며 “스미마셍, 스미마셍”(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의 발을 밟으면 밟은 사람이나 밟힌 사람이나 서로 미안하다고, 실례했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한국에 오면 어떤 경험을 하는 것입니까? 지나가다가 남의 몸을 툭 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 버립니다. 심지어 남의 발을 밟아도 죄송하다고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당황스럽고 견디기 힘들겠습니까?

이렇게 우리 사회에는 잘못된 만짐(터치)이 많은 편입니다. 조금 전 말한 대로 남에게 무례하게 터치하는 경우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버스나 지하철에서 사람이 북적거리는 틈을 타 여성을 만지고 추행하다가 적발되는 건수가 매년 급증한다고 합니다. 여성들 중에 이런 일을 당한 분이 많을 겁니다. 뿐만 아닙니다. 만지지 말아야 할 더러운 것을 만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대서 죄를 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 누구보다 깨끗한 척 했지만 결국 만지지 말아야 할 더러운 돈을 만져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정치인도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더러운 것, 악한 것은 만지지도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만큼 우리 주변에는 악하고 잘못된 만짐이 많습니다. 이런 것들에게서 나를 구분하고 지켜야 합니다. 성경에서 ‘거룩’이란 ‘분리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더러운 것, 악한 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켜야 합니다. 소유하지도 만지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나쁜 만짐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는 아름다운 만짐, 꼭 필요한 만짐도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아이가 태어나서 1년 동안 엄마와의 신체 접촉이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말합니다. 이 1년 동안 따뜻하게 보호받고 보살핌 받으면 아기는 부모를 신뢰하게 되고 안정감을 느껴서 이때 생기는 신뢰감이 정서발달에 기초가 될 뿐 아니라 어른이 된 후의 생활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엄마는 이 기간에 아이를 안아주고, 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따뜻하고 애정 어린 신체접촉을 많이 해야 한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이런 엄마와의 신체접촉이 아이의 두뇌발달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까지 나왔습니다. 우리 애가 정서적으로 상당히 불안하다, 특별히 공부를 너무 못한다 한다면 “쟤가 누굴 닮아서 저러나?” 하지 말고 생후 1년 이내에 엄마와의 접촉이 문제가 있었는지, 유일한 신체 접촉이 쥐어박는 것 아니었는지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것은 아기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다 자라서도 부모와의 신체접촉은 필요합니다. 다 자란 애들 징그럽다고 하지 말고 자녀들을 포옹해주고, 정 안 되면 손이라도 잡아주면서 지속적인 부모 자녀 간의 신체접촉이 이루어지는 것도 신뢰감에 아주 중요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사이에 아예 인사도 안 하고 아는 척도 안 하고 지내는 것은 최악이지만 만나도 고개만 끄떡 하는 것보다 손이라도 잡아주고 악수라도 하며 인사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가능하다면 오해가 안 되는 범위 안에서 서로 안아주는 것도 좋습니다. 그만큼 신앙 공동체 안에서 신체 접촉을 통해 서로 신뢰감을 느끼고 더 유대감, 사랑의 띠로 하나 됨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옆 사람 한 번씩 안아줍시다.

❚하나님의 만지심, 예수님의 만지심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은 만지심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누구의 만지심이냐? 하나님의 만지심, 예수님의 만지심입니다. 제가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신구약 66권에 나온 하나님의 만지심, 예수님의 만지심을 다 찾아보니 크게 네 가지 유형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네 가지 말씀을 듣는 가운데 성령님이 여러분의 마음과 심령을 만지시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만지심은 죄를 사해주거나 능력을 더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들이 시험에 떨어져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집에 돌아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모들은 안절부절 하며 어떻게 할까 당황합니다. 어떤 부모는 위로해 준답시고 불러서 이런 저런 말을 길게 늘어놓습니다. 사내놈이 그러면 안 된다는 둥,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둥 훈시합니다. 이게 실패한 아이에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어떤 부모는 위로한답시고 “너 뭐 먹고 싶어, 뭐 갖고 싶어. 먹고 싶은 거 다 사주고 갖고 싶은 거 다 사줄게”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순간에 뭐가 먹고 싶고 뭐가 갖고 싶겠습니까? 어떤 부모들은 “저런 때 가만 놔두는 게 상책이야” 하고 가만 놔둡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그럴 때는 그저 아무 말도 없이 꼭 한 번 안아주면 됩니다. 말도 위로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꼭 안아주세요. 그 짧은 안아줌 속에 모든 메시지가 다 들어 있습니다. 만약 아이가 뭔가 잘못을 하고 들어왔어요. 자기도 잘못 한 것 다 압니다. 집에 가면 틀림없이 불호령이 떨어지거나 집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눈치 보며 들어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세요? 아이들 기대와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야단치거나 쫒아내세요? 그러면 반항심만 생깁니다. 이럴 때도 그냥 아무 말 없이 꼭 한 번 안아주세요. 그러면 됩니다. 그러면 아이도 자기 잘못 다 압니다. 앞으로 그런 짓 안 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고통스러워 할 때, 또는 힘이 빠지고 실패할 때 잔소리 안 하십니다. 우리 앉혀놓고 몇 시간 씩 설교 안 합니다. 그냥 우리를 만져주십니다. 이사야 6장에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죄인인 내가 하나님을 뵈었으니 화(禍)로다, 내가 죽게 생겼다, 내가 죄인이고 입술이 부정한데 이런 내가 하나님을 뵈면 죽는 것이지요. 바로 그 때 하나님은 스랍(천사와 비슷한 존재)을 보내 제단에 핀 숯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술에 대게하며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선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직접 우리를 만지지 않으시지만 천사나 이렇게 숯을 통해 우리를 만지시는 것입니다. 다니엘 10장에 보면 다니엘이 이런 환상을 봅니다. 한 손이 자신을 어루만지며 미가엘 천사가 너를 도와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다니엘이 이런 체험을 하면서 너무 놀라고 두려워 말문이 막히자 천사가 다니엘의 입술을 만지면서 말문을 열어줍니다. 그리고 또다시 그를 만지면서 “너는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라”고(11절), 힘을 내서 신앙의 고독한 싸움을 이겨내라고 격려하십니다. 힘을 주십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한 바탕 대결을 벌인 엘리야 선지자는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려고 쫒아오자 광야로 도망갑니다. 하루 종일 도망하다 완전히 탈진해서 로뎀 나무 아래 털썩 주저앉아 “하나님, 나 이제 힘도 다 빠지고 아무 의욕도 없습니다. 이렇게 비참하게 쫓겨 다니느니 차라리 날 죽여주세요” 하고 지쳐 잠이 들었을 때 천사가 그를 어루만집니다. 그리고 일어나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먹고 다시 잠든 엘리야에게 천사가 또다시 나타나 어루만지고 먹게 한 후 그는 힘을 얻어 사십 주 사십 야를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만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만지심은 우리를 위로하고 힘주시는 만지심입니다. 죄에 지쳐, 삶에 지쳐, 고통과 실패에 지쳐 낙망하고 절망한 우리를 위로하고 힘주시는 만지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치고 낙심하여 쓰러지려 할 때, 무언가 큰일을 앞두고 두려워 할 때, 세상에서 외롭게 신앙을 지키며 싸워나가야 할 때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만지시고 안아주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만지심을 통해 죄 사함을 얻습니다. 그 만지심을 통해 힘을 얻고 위로를 얻고 능력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이 하나님의 만지심을 체험하기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의 만지심은 치유를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가버나움에 있는 제자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저도 성지순례 갔을 때 이 갈릴리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터라는 곳을 가보았습니다. 그 집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병 날 만도 하지요. 멀쩡하게 고기 잘 잡아오던 사위가 어느 날부턴가 예수라는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이제 자기는 물고기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겠다고 헛소리까지 하며 고기도 안 잡아오니 집안 살림은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병들 만도 하지요. 

마태복음은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에 걸렸다고 말하는데(14절) 똑같은 병을 의사였던 누가는 ‘중한 열병’(눅 4:38)이라고 표현합니다. 아마도 생명에 위협을 줄 정도로 심한 열병인 말라리아나 장티푸스 같은 병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죽을 병 걸린 베드로의 장모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약을 주신 것도 아니고 붙잡고 세게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녀의 손을 만지시기만 했는데 그 중한 열병이 떠나가고 베드로의 장모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하게 나아서 예수님을 대접까지 합니다. 예수님의 만지심이 병을 치유하고 삶을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내 삶을 괴롭히는 질병을 물리치고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복음서에는 수많은 예수님의 치유 사건이 나오는데 저주 받은 병이라고 하는 가장 끔찍한 질병인 나병환자를 고치실 때도 그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심으로 나병을 깨끗하게 고치십니다(마 8:3, 막 1:41, 눅 5:13). 앞 못 보는 맹인을 고치실 때도 그의 눈에 손을 대서 만지심으로 눈 뜨게 하십니다(마 9:29, 20:34). 귀 먹고 말 더듬는 환자를 고치실 때도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고쳐주십니다(막 7:33). 이렇게 환자를 만져주심으로 고치신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이 걸리면 병원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의사를 만나고 좋은 약을 먹어야 합니다. 병이 걸려도 믿음으로만 고쳐야지 병원 찾아가고 약 먹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 분들이 간혹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잘못된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장한 미신입니다. 반드시 아프면 병원 가고 약도 먹고 좋은 의사 만나 의사의 손을 통해 치료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사의 손길을 통해 우리를 고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사의 손길을 통해서도 역사하시고 병원과 약을 통해서도 고쳐주십니다. 이게 진짜 믿음입니다. 그런데 병원만 가지고, 의사와 약만 가지고 고치시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만지심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때 금요일에는 치유의 기도를, 토요일에는 회복의 기도를 했습니다만 그 때도 이런 기도를 했지요. 

"하나님, 나를 만져주시옵소서. 예수님 나를 만져주시옵소서. 성령님, 나를 만져주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만져주시고 성령님이 만져주셔야 낫습니다. 내 병든 몸이 낫게 되고, 내 상한 심령과 상처 받은 영혼이 만져주셔야만 나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성령님의 터치를 바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가운데 육신이 병든 분들, 심령이 상한 분들, 영혼에 상처가 있어 반드시 나아야 할 분들은 꼭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따라 하실까요? “예수님, 나를 만져주세요. 성령님, 나를 만져주옵소서.” 예수님이 여러분을 만지실 때, 성령님의 터치가 일어날 때 우리에게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치유할 수 없고 고칠 수 없는 병까지 그 만지심으로 낫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만지심은 삶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이 무너지고 파괴될 때 그것을 회복해 주시기 위해 우리를 만지십니다. 그런데 이 주님의 손길이 닿는 순간 무너진 우리의 삶은 다시 일어나고 파괴된 삶은 회복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누가복음 22장 51절에 보면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유다의 배반으로 대제사장의 종과 성전 경비대가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옵니다. 배신자 유다가 앞장서고 그 뒤를 사람들이 따라오는데 바로 이 때 베드로가 칼을 들어 ‘말고’라는 이름을 가진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귀가 떨어져 나갑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떨어져 나간 귀를 만져 낫게 하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치유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귀는 두 개인 것이 정상입니다. 둘 중에 하나라도 없으면 비정상입니다. 우리 삶도 평안하고 평탄한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 평안하고 평탄한 삶에 꼭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면 그 평안은 무너지고 우리 삶은 고통과 시련에 빠지게 됩니다. 

어떤 분은 꼭 있어야 할 직장을 잃어 고통을 받습니다. 사업을 잃고 고통 받습니다. 꼭 필요한 물질이 없어 고통 받습니다. 건강을 잃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고통 받는 분도 있습니다. 자녀가 없어 고통 받거나 가정에 평안이 없어 고통 받습니다. 이런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없어지면 정말 우리 삶은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아픔에 시달리게 됩니다. 바로 이 때 말고의 떨어져 나간 귀를 만져 고쳐주신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고, 우리의 가정에 개입하시면 거기서부터 회복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예수님의 회복의 만지심이 역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다고 있는 것을 더 달라고 하거나 꼭 필요한 것 이상을 구하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과욕(過慾)입니다. 과욕은 주님이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꼭 필요한데,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이나, 너무 귀한 것,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잃어서 고통 받는 것이 있다면 주님께 구하십시오. 주님의 손길이 여러분을 만질 때 거기에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의 만지심은 축복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0장 13절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 자기 자녀들을 주님께 데려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부모들을 몹시 꾸짖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얼마나 바쁘신데 그런 애들이나 데려와서 예수님을 귀찮게 하는 거야?” 하고 말입니다. 당시에는 그만큼 어린 아이들을 천시하던 때입니다. 어른 고쳐주기도 바쁜데, 말씀 전하는 것만도 힘든데 아이들 축복해 줄 시간이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히려 이런 제자들을 보고 몹시 화를 내십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하시고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아이들을 만져주신 것입니다. 이 아이들은 마땅히 축복받아야 한다고, 만져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를 만져주고 축복하시는 분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별 볼 일 없다고 따돌리고 무시할지 몰라도, 너는 복 받을 자격 없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만은 우리를 그렇게 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귀한 자녀입니다. 우리가 잘 살든 못 살든, 잘 났든 못 났든, 세상에서 실패하고 비참한 삶을 살든 성공해서 떵떵거리며 살든 아무 상관없이 주님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귀한 자녀요 천국의 백성으로 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머리에 손을 올리시고 우리를 만지시며 축복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반드시 이루어 질 줄 믿습니다. 여러분도 세상이 주는 복, 세상에서의 성공과 인정을 바랄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주시는 참된 복, 그 만지심을 사모하며 주님의 손길을 사모하기 바랍니다.




❚만지심을 체험하라!

여러 해 전, 우리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오신 정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생각납니다. “내가 대머리라 얼마나 걱정 되냐고 사람들이 물을 때가 많은데 저는 늘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게 다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증거요. 하나님이 나를 귀엽다고 사랑스럽다고 머리를 하도 쓰다듬어 주셔서 이렇게 머리가 빠진 거라오.” 그 정삼수 목사님이 지금 건강이 별로 안 좋으십니다. 원래 안 좋은 건강 때문에 집회도 잘 안 나가시는데 우리 교회에 특별히 집회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건강 때문에 큰 일 날 뻔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번 정 목사님 만났을 때 건강이 걱정되어 물었습니다. “목사님, 건강 때문에 얼마나 힘드세요?” 그런데 정 목사님은 싱글벙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걱정 말어, 다 하나님 은혜로 사는 거지.” 그렇습니다. 남들은 다 건강 때문에 걱정하고 삶의 이런 저런 무거운 짐 때문에 버거워하고 힘들고 지쳐갈 때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싱글벙글 하며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대머리라고요? 실패하고 병들었다고요? 항암치료 받느라 머리가 다 빠졌다고요? 남들은 내 약점이라고 하면서 참 안됐다고, 그것 때문에 얼마나 걱정 많냐고 할 때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그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바로 날마다 하나님의 만지심을 체험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날마다 주님이 나를 안아주시고, 날마다 성령님이 나를 만져주시는 것을 체험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이 만지심을 체험하는 성도는 날마다 새 힘을 얻고, 치유와 회복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참된 복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만지심이, 이 거룩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만지심, 예수님의 만지심, 성령님의 만지심이 날마다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과 삶을 어루만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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