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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 받을자 (마 4: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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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받을자 (마 4:21~25)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을 합니다. 같은 값이면 보다 나은 것이 더 좋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다홍치마를 원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더라도 빠른 길이 있고 편한 길이 있습니다. 하지만 빠르게 가고자 했는데 오히려 길이 더 막혀서 늦을 수도 있고 편하고 안전한 길로 간다고 했지만 오히려 그 길이 더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께서 기도해 주셔서 중국 사역을 잘 마치고 현지 지도자들을 위한 훈련을 잘 마치고 돌아올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식사라든가 잠자리가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시간 시간이 은혜 넘치는 시간 되도록 함께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 공항에 도착을 했는데 처음부터 비행기가 늦게 출발한데다 짐이 제일 나중에 나와서 짐을 찾아 나오니 원래 베이징 공항에 도착한다는 시간보다 1시간이나 더 지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중을 나오기로 된 전도사님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리저리 공항 안을 찾아봤지만 없어요. 참으로 난감합디다. 잘못하면 꼼짝없이 국제 미아가 될 판입니다. 한 10분쯤 지나니까 마중하기로 한 분이 나타났습니다. 

차를 태워주기로 한 분이 이제 차를 산 지 얼마 안 되는데다가 베이징이 너무 넓고 복잡하다 보니 길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안전하게 올 수 있도록 내비게이션도 사서 달았답니다. 한데 내비게이션에 익숙하지 못해서 그 지시대로 따르지를 못하고 길을 잘못든 겁니다. 그래서 돌고 돌다 보니 40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랍니다. 그 길을 세 시간이나 걸려서 온 겁니다. 다시 안내하는 전도사님의 집으로 향하는데 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보아도 같은 자리를 또 가고 또 가고 하여간 결국 찾아가기는 했지만 역시 세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나름대로 모든 것을 준비한다고 해도 그 길을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지켜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가는 길을 알지 못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무엇을 하든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앞길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름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분명한 목표의식을 갖고 그 방향을 바로 잡아 살아간다고 해도 그 길은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중국 사역만 해도 먼저 허베이 성으로 옮겨서 그곳 지도자들을 교육하도록 됐는데 허베이 성은 베이징을 둘러싸고 있는 우리로 말하면 군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에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나오지를 않아요. 그래 대충 근처를 입력해서 출발을 했는데 안내하는 현지 지도자도 열차와 버스 그리고 택시로만 다녔기에 그 길을 자세히 모르는 거예요. 

결국 목적지에 도착을 하기는 했지만 세 시간이면 간다고 했던 곳을 다섯 시간도 더 걸려서 갔습니다. 하긴 그 거리도 자그마치 320킬로미터입니다. 서울서 대구까지의 거리입니다. 고속도로로 갔는데 고속도로가 생긴 지도 얼마 안 됐지만 고속도로를 벗어나 목적지에 가까이 와서 거기서부터는 길을 물어물어 가는데 현지 지도자가 길을 안내하면서도 그 역시 길을 잘 모르는 거예요. 버스에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가서 내리기만 했기에 그분도 길을 모릅디다. 나중에 마중 나온 목적지의 지도자를 만나서 도착을 할 수가 있었는데요 분명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알지만 그래서 내비게이션까지 준비했지만 내비게이션이 제대로 그 길을 안내해 주지 못하니까 그것처럼 갑갑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거야 내비게이션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 인생길은 어떻습니까? 

먼저 우리는 우리 삶의 목적을 분명히 정하고 그 길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살아가는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살아있으니 산다는 것으로는 결코 바람직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공부만 해도 그렇습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그냥 학생 때니까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것이라면 그 공부가 좋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보다 재미있는 다른 일을 더 찾는 것입니다. 그래 마지못해서 학교는 왔다 갔다 하는데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있습니까?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불을 켜서 어둠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등을 말 다시 말해서 됫박 안에 두거나 의자 밑에 둘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 봐야 어둡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켜서 높이 두게 되면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것들이 다 드러나게 됩니다. 일부러 드러내려 하지 않고 나타내려 하지 않은 것을 빼놓고는 다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어떨 때는 숨겨 둔 것도 드러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빛이 어둠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빛으로서의 우리가 먼저 이렇게 모두 앞에 드러나야 합니다. 아무리 빛을 숨기려 해도 그 빛은 작은 틈을 통해서도 비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세상은 어둠입니다. 그 어둠 속에 빛이 있으면 어둠은 밝혀지게 마련입니다. 희미한 촛불 하나에도 어둠은 밝혀집니다. 얼핏 어둠에 숨겨진 것 같아도 불빛이 비쳐짐에 따라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먼저 빛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한데 빛이 어둠만 못하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어둠이 아닌 빛이기에 그 빛이 보다 밝게 비쳐지도록 밝은 빛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물론 촛불은 바람에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자칫하면 오히려 촛불이 꺼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다시 밝히면 됩니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도록 바람막이를 해주도록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계속해서 빛으로 타오르도록 기름도 준비를 해야 됩니다. 그것은 곳 말씀입니다. 성전의 등대에 날마다 새롭게 순결한 기름을 두어 계속해서 타오르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의 중심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때 우리는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니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따라서 어둠을 밝혀 모든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빛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어둠을 비추면 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밝은 태양으로 어둠을 밝혀주셔야 온전히 어둠을 물리칠 수가 있다는 것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어찌됐든 빛으로서의 역할은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생명들이 다시 빛이 되어 타오르도록 불을 붙이는 역할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데 불을 붙이랬더니 거꾸로 내가 꺼지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것은 곧 내 안에 불순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순물이란 기름이 제대로 타오르지 못하도록 막는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 말씀을 바로 깨달아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게 되면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순결한 기름이 되어 타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기름위에 겉돌다 오히려 불을 꺼뜨리는 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니 설사 물이 섞여 있었다 해도 기름과 함께 섞여 함께 타올라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교제가 중요합니다. 언제든지 성도들과 함께 어울리십시오. 결코 겉돌지 마세요. 그리고 불평과 불만은 겉도는 물과 같습니다. 그건 불을 꺼뜨릴 뿐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어울리는 가운데 불평과 불만의 물을 다 걸러 내십시오. 혹 이게 아니지 싶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냥 함께 타오르게 되면 불이 타오르며 잠시는 타탁하는 소리도 들리고 잠시는 흔들리는 것 같아도 곧이어 정상적으로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내 자신이 순결한 기름이 되어 타오르게 하십시오. 그럴 때 그 기름이 빛이 되게 하시는 분은 곧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물 위에 기름이 혹 더 좋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속지 마십시오. 오직 순결한 기름이 되십시오. 오직 말씀을 귀담아 듣고 순종하십시오. 먼저 날마다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그래서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가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개떡 같은 말도 찰떡 같이 듣습니다. 누가 속상한 말을 했다고 해도 그걸 축복의 말로 바꾸어 들으면 그게 바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비난하고 욕하면 맞아 나 그런 말 들을만해 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바로 세우면 오히려 그 비난받은 것이 약이 되는 겁니다. 쓴 약이 몸에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귀가 들을 귀가 있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언제든지 모든 말을 은혜로 듣도록 해야 합니다. 정 귀에 거슬리는 말이라면 그걸 애써 들으려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럴 때는 한 쪽 뒤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리면 됩니다. 그래서 들을 말은 두 귀로 잘 모아서 듣고 들어서 안 될 말이라면 한쪽으로 듣고 다른 쪽으로 흘려버리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귀를 주신 것입니다. 또 듣는 것도 바로 들어야지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머리 떼어내고 꼬리 떼어내고 듣다 보면 전혀 엉뚱한 말로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들어야 합니다. 무얼 안 했다고 했는데 거기서 안을 놓쳐 버리면 했다고 듣게 되지를 않습니까? 그러면 이야기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항상 긍정적으로 헤아려야 합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그랬습니다. 그러기에 좋은 뜻으로 헤아리면 다른 사람도 나를 그렇게 헤아려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안 좋은 뜻으로 다른 사람을 헤아리게 되면 다른 사람이 나를 곱게 볼 리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항상 모든 것을 좋은 쪽으로 보아주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은 그 부족한 부분이라든가 잘못된 부분으로 인해 그것을 기회로 해서 자신을 바로 세워나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못된 방향은 바로 잡아주면 되고 잘하는 것은 더욱 격려하면 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특히나 연약한 사람을 붙들어주어 든든히 세워나가는 것만큼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도 없습니다. 잘못을 말하기보다는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면 됩니다. 그리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 부족한 부분을 내가 채워주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의 부족한 부분도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재능이라든가 아니면 지혜나 세상의 부귀영화를 주시는 이유도 그걸 나 혼자 누리도록 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함께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주는 만큼 우리에게 주실 뿐 아니라 더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면 나도 비난받게 하실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이상으로 비난받게 하시는 것이고 내가 다른 사람을 붙들어주면 하나님도 나를 붙들어주시고 든든히 설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며 내가 다른 사람들을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질로 섬기면 하나님께서도 나에게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실 뿐 아니라 더 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두기를 원하면 먼저 심으라 너희가 심는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랑의 교제를 위해서 함께 세워나기가 위해서 줄 것이 내 안에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진 모든 것 나의 재능과 나의 모든 소유 그리고 나의 지식과 경험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다른 사람과의 아름다운 교제와 함께 세워나가기 위한 도구가 되도록 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에 더 풍성하도록 채워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을 먼저 주고자 하는 마음 베풀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주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라도 더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필요한 곳에 줄 수 있도록 줄 것을 또한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은혜의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내가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 법도 배워야 하며 계속해서 훈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내 귀도 들을 귀가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마음 밭을 옥토와 같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로 앞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네 가지 밭을 이야기하며 옥토와 같은 밭을 이야기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을 바꾸면 됩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나 또한 모든 것을 은혜로 줄 수 있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내 안에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갈아엎으십시오. 돌덩이 같은 내 마음을 잘게 부수어 옥토와 같이 만드십시오. 내 안에 모든 돌과 같은 불평과 불만 미움과 비난하고 싶은 마음들을 다 걸러내십시오. 

이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기에 날마다 우리 마음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래서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해 진흥한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날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할 때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축복의 대상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을 축복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나도 축복 받도록 만들어 주시고 더 받게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자신을 야베스처럼 축복함으로 내 자신이 축복에 합당한 자로 세워지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축복하고 자신을 칭찬하고 자신을 격려하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주시고 계신다 지금도 내 손을 꼭 잡고 계신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기쁘고 평안한 길로 인도해 주신다 그런 하나님을 나도 기뻐한다고 날마다 자신을 향해 외치십시오. 그렇게 자신을 날마다 세워나가게 되면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축복하고 격려하는 모든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누구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그들에게 작은 힘이라도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이 내 슬픔으로 다가오고 다른 사람의 기쁨이 내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더 즐겁습니다. 더 기쁩니다. 그러면 또 무얼 줄 게 있나 하고 찾아보게 되고 줄 것이 있도록 줄 것을 또 준비하게도 됩니다. 

그래서 주고 주다 보면 다 줘서 내게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주고 돌아서 보면 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르밧 과부의 섬김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물가에서 섬겼던 리브가의 섬김입니다. 그것이 베들레헴까지 따라와 어머니를 섬겼던 모압 왕 에글론의 딸 지금까지는 섬김만 받아왔던 공주 롯이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와 끝까지 어머니를 섬기며 부지런히 밭에까지 나아가 이삭을 주우며 섬겼던 그 섬김입니다. 그 섬김들을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열매로 바꾸어주셨습니다. 그들의 인생을 바꾸셨습니다. 결국 그들의 마음을 다한 섬김이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비천하게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인생들이 가장 복된 인생이 되게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먼저 그들이 그렇게 주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섬기며 주기를 기뻐하는 자요 그래서 그 목숨까지도 우리를 위해 주셨던 그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주님의 손에 들여지는 귀한 성도들 다 되심으로 우리의 인생길이 개고생이 아닌 가장 행복하고 모든 평안으로 넘치는 풍족한 인생들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주는 자의 삶을 사는 비결은 모든 역량을 하나로 집중하는 집중의 원리에 있습니다. 이는 곧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는 것입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신중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일단 방향이 정해지면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지난날을 경험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롯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왔을 때 온 성이 다 시끄러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롯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섬깁니다. 또한 어려운 형편이기에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밭에 나가 이삭을 줍는데 잠깐 쉰 것 외에는 감독관이 진심어린 칭찬을 할 정도로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하나님의 총회에도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던 모압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총회를 넘어 다윗의 중조할머니로 또한 장하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는 한 줄기로서의 귀한 역할을 감당하게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결국 복된 인생은 주는 자의 몫입니다. 아니 열심히 자기에게 주어진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이 귀한 섬김의 사람으로 주는 자의 사람으로 오늘을 사심으로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길을 하나님께서 복되게 이끄시는 귀한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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