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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연애의 신비 (요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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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신비 (요15:5)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충만한 생명력이 우리 사랑하는 모든 교우들에게 넘쳐나길 축복합니다.

연애해 보셨습니까? 연애할 때 우리는 본래의 이름 대신 친근하고 다정하게 부르는 애칭들을 많이 씁니다. 
서방, 애기야, 각시야, 뚱이야, 돼지야, 자기야.  뭐 수도 없이 많습니다. 
저는 제 아내에게 마님이라고 불렀었습니다. 그러면 제 아내는 “왜 마당쇠?” 그랬죠. 
여러분은 어떤 애칭으로 상대방을 불렀습니까? 

그런데 이 많은 애칭, 표현 가운데 제 생각에, 제 생각에는 가장 좋고 의미심장한 표현은 ‘자기야’라 생각합니다.
이‘자기’라고 하는 표현은 그 사람 자신, 본인, 나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나, 자신, 본인을 지칭하는 말을 상대방을 부르는 용어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곧 자기가 자기가 되고 자기가 자기가 되는 다시 말해서, 
내가 너가 되고 너가 내가 되길 원한다는 거룩한 연합, 성스러운 하나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자기야!” 부르고 싶다는 것 같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라는 말씀이죠. 
이것 뿐만이 아니라 본문 4절부터 계속계속 이어지는 말씀 모두가 그런 내용입니다. 

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5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와 하나가 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자기야 부르고 싶어 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 “자기야” 부르는 것을 당신께서도 용납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7절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눌 것입니다.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역사! 
이 놀라운 하나됨의 역사가 우리의 삶가운데 충만하길 축원합니다. 

“우리 자기 예수님”
조금 불경하지만 정말 조금 불경하지만 그럼에도 확신하기로 우리 예수님은 “자기야! 날 사랑해?” 하며 
우리에게 연애를 거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걸어오시는 이 연애의 신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연애의 신비는 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것은 내가 주님 안에 거하기에, 내가 주님 안에 있기에 나 자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 있기에 내가 보고 싶은 것,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을 혹은 주님께서 보고자 하시는 것을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내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의 눈을 통과한 그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주님 안에 있기에 내가 듣고 싶은 것 듣는 것 아닙니다. 내 귀에 좋은 것이 아닌 우리 주님께서 듣기에 좋고 또한, 우리 주님께서 듣고자 하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는 것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주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그곳에 내가 가는 것입니다. 내가 취하고 싶은 것을 취하는 것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닌 우리 주님께서 취하시고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이 진정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모습입니다.
내가 사라지는 겁니다. 더 이상 나는 없습니다. 오직 오직 주님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럼,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한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은 마음 속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속에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속에 있습니다. 내 속에 주님의 말씀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내 입에서는 
그분의 말씀만 나오게 될 것입니다. 

히 4: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주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 살아 꿈틀대는 말씀이 내 속에 거하십니다. 
내 속에 거하신다는 것은 그 말씀이 내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무장해제 시키는 것을 의미 합니다.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 마음의 생각과 뜻이 하나님의 말씀의 검에 쪼개지기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혼을, 영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인격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감정을, 우리의 의지조차도 그 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주도권을 그 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몸짓 발짓 손짓 하나하나 까지도 우리 주님께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전부가 주님의 말씀 앞에 산산이 쪼개지고 다시 말씀으로 조립되는 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이 우리안에 거하시는 역사입니다.

그러하기에 더 이상 나는 없습니다. 완전히 나는 사라지고 주님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연애를 걸어오시는 첫 번째 연애의 신비입니다.


2. 이 신비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저가 내안에가 먼저고, 내가 저안에가 나중입니다.

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5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6절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 먼저 입니까?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먼저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주님을 향해 다가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 우리가 태에서 조성되기 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힘으로 완력으로 우리 안에 비집고 들어오지 않으시고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 기다리심을 태초에서부터 지금까지 이어오고 계십니다. 때로는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주님께 돌아오길 
촉구도 하시고, 징표와 이적을 통하여서 촉구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께로 가지 않자 주님은 우리가 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올라가십니다. 
찢기시고 부서지시면서까지 생명을 내어주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반드시 반드시 내 안에 거해야 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일방적으로 무장해제 시키시고 우리 맘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참고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먼저 그분을 향해 한걸음 내딛기를 원하십니다.

미국에 어느 고등학교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에겐 열 두 살 먹은 딸이 있었습니다. 
아내를 사별한 그는 딸에게 어머니 역할까지 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학교 일 때문에 너무 바빠서 딸에게 시간을 충분히 내지 못했고, 그것 때문에 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서 크리스마스 휴가가 와서 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막상 휴가가 시작된 첫날 딸아이는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혼자 있는 겁니다. 식사 시간 이외에는 밖에 나오질 않습니다. 다음날도 그랬고, 또 다음 날도 그랬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될 때까지 계속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하루하루 외롭게 보낼 수밖에 없었겠죠. 마침내 크리스마스 아침, 크리 스마스 트리에 선물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뜨개질로 짠 한 켤레의 양말이었습니다. 딸아이는 두 눈을 반짝이면서 말합니다. "아빠,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까지 이걸 다 짜야 한다고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몰라요. 제가 방문을 잠그고 지금까지 했던 건 바로 이 뜨게질이었어요. 이젠 다 짰어요. 아빠 양말이에요! 좋으시죠?" 

이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왈칵 울음이 터졌습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딸을 덥석 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암, 좋고 말고, 얘야, 정말 예쁘게도 짰구나, 고맙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물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아, 이 철없는 아이야. 양말은 시장에 가서 사면 되지 않니? 난 양말 같은 건 원하지 않아. 그저 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단 말이야!" 

우리 주님의 마음 이런 마음 아닐까요? 얼마나 손꼽아 같이 시간을 보내고, 사랑을 나누며,  함께 있을 시간을 기다렸는데, 그것을 얼마나 원했는데 우리는 나오질 않습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고 싶은데 참으십니다. 주님을 향해 그저 문을 열길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철없는 모습으로 엉뚱한 짓을 하고 있더라도 기다리십니다. 그것이 우리 주님의 사랑법입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두드리십니다. 힘으로 완력으로 비집고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향해 나아오기 만을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먼저 그분께 들어가야 합니다. 
문 단단히 걸어 잠그고 어떤 역사 일어나길 원하는 것은 도둑놈의 심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를 고치시거나 낫게 하실 때 늘 하셨던 것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늘 먼저 물으시고 대답을 기다리신 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를 배려하십니다.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더 이상 우리 주님 기다리게 하지 마시고 꾸밈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시길 축원합니다.


3. 이 신비에는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신학교를 다닐 때 전설처럼 들어왔던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 입문시간! 신학교에 처음으로 입학하면 
전공이라고 처음 배우는 시간입니다. 그때 교수님이 그러십니다. 연애 해 본 사람? 사랑 해 본 사람? 
손든 사람 이외에 사랑도 연애도 한번 안해 본 사람은 신학할 자격 없습니다. 모두 짐 싸서 선지동산을 떠나십시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왜냐하면 사랑한번 못해본 놈들은 모두 거짓말쟁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랑도 모르는 놈들이 사랑한번 못해본 놈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보이는 사람도 한번 사랑해 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랑도 한번 못해 봤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너희는 거짓말쟁야. 자격없어. 지금 당장 짐 싸서 선지동산에서 나가! 
나가서 가슴 애리고 찢어지고 부서지며 사랑으로 인해 처절하게 몸부림 친 후에 와! 
그리고 그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님 바라보며, 사랑하며 공부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저와 여러분을 향해, 자기야!! 부르시기 위해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시면서도 그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셨습니다. 저는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실 때 틀림없이 웃고 계셨으리라 확신합니다. 온몸이 피투성이에 만신창이가 되셨지만 그것으로 인해 우리 사랑하는 자기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죄악에서 벗어나 다시 충만한 생명으로 나아감에 기쁨으로 웃고 계셨을 줄 믿습니다.

사랑해 보셨습니까? 가슴 애리고, 찢어질 것 같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내 몸이 부서져도 나로 인해 살아날 너를 위해 웃고 있는 그런 뜨거운 사랑 해 보셨습니까? 그 충만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 이시간 우리 주님을 향해 제가 당신 안에 거하길 원합니다. 주님! 제 안에 들어와 주옵소서. 고백하실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나와 너가 없는 그저 하나의 자기만이 존재하는 온전한 하나됨!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입을 통해 우리 주님! 나의 사랑 자기야! 불리워 지길 원하신다 믿습니다. 


4. 이 신비의 핵심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입니다.

가지는 끊임없이 원줄기를 부여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열매 맺게 만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가 할 일은 양분을 주면 그 양분 가지고 열매 맺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너무 이기적인것 같습니다. 아무 일도 안하고 불로소득처럼 주는 것만 가지고 산다라는 것이 조금 무책임해 보입니다. 열매 맺기 위해서는 밭도 갈아야 합니다. 거름도 줘야 합니다. 적당한 햇빛과 온도, 알맞은 비와 환경이 잘 조성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것 누가 합니까?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딱 달라붙어 있느니 차라니 내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가지입니다. 그저 붙어만 있으면 됩니다.
 
그저 온 몸으로 원 줄기 포도나무를 꽉 부여잡고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양분이 공급됩니다. 열매 맺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열매 맺기 위해 원 줄기 포도나무에서 떨어져서 무언가 다른 것을 붙잡아야 한다! 
착각입니다. 우리가 원줄기에서 떨어지는 순간 우리는 말라 불에 던지워질 뿐입니다. 
우리의 선택은 하나! 오직 포도나무, 오직 예수님이면 됩니다. 

주변에서는 잘 살려면 내 삶에 없어서는 안될 돈이 필요해. 나를 나타내어 주는 지위와 명예도 필요해, 건강도 해야 하고, 직업도 좋아야 하고, 이쁜 마누라에 토끼같은 자식들, 좋은 차에 좋은 집이 필요해. 이게 옳아! 맞습니다. 돈도, 지위도, 명예도, 건강도, 직업도, 가정도, 차도 집도 있어야 됩니다. 절대 포기 할 수 없습니다. 예! 그러하기에 우리 하나님께 예수님께 붙어 있으라구요. 그 어떤 것도 우리 삶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 붙잡아줄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합니다. 
해답은 오직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한 가난한 농부가 커다란 감자 자루를 메고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길을 달리던 마차 한 대가 서더니 
그를 태워 주었습니다. 그런데 농부는 마차 안에 들어가 앉아서도 여전히 무거운 그 감자 자루를 무릎에 올려놓고 있는 
겁니다. 마부는 농부에게 그것을 바닥에 놓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아~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요. 태워 주신 것도 고마운데 감자는 제가 들고 있어야죠'.

이 모습 내 모습 아닙니까? 그저 맡기면 됩니다. 때로 우리는 무거운 짐을 우리가 감당해야 주님께 보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모든 일과 짐을 지십니다. 우리는 단지 그분에게만 붙어 있으면 됩니다.

교회당 꼭대기에 뭐가 있습니까? 십자가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피뢰침이 있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나는 놈 위에 붙어다니는 놈 있습니다. 붙어다니는 놈은 나는 놈위에 군립합니다. 붙어다니는 놈이 가장 센놈입니다. 내 힘 안들이고 못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붙어다니는 놈입니다. 성경이 예수님이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하시잖습니까? 2절 무릇 내게 붙어 있어 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그분께 붙어만 있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삶에 열매가 넘쳐 날 것입니다. 


5. 이 신비의 마지막은 선택입니다.

엄마아빠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할머니와 어린손자, 손녀만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어쩔 수 없이 생활비를 위해서 동네어귀에서 포장마차로 간단한 튀김같은 것들을 만들어 팔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기특하게도 두 아이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했고, 손자는 항상 100점을 받아오곤 했답니다. 힘들게 살아가는 할머니에게 가장 큰 즐거움은 매일같이 포장마차에 와서 튀김을 집어먹으며 손주 녀석이 주는 100점짜리 시험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손자가 만점을 받지 못하고 한 문제를 틀려가지고 왔습니다. 
그 시험지를 받아든 할머니는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가슴을 치시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의 눈물은 항상 만점만 받아오기를 바라는 할머니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 손자가 틀린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 문제는 다음 중에서 바른 음식습관을 가진 어린이는 누구인가요?
  1) 맛있는 음식만 골라 먹는다./            2)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
  3)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음식을 먹는다./   4) 길에서 파는 음식을 먹는다.

당연히 정답은 3번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음식을 먹는다 겠지만 이 손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에게 답은 4번이었던 것입니다. 엄마없는 아이에게 할머니가 길에서 파는 음식은 절대로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아이가 4번을 쓴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믿기론 아이는 늘 백점을 맞는 똑똑한 친구였기에 정답이 3번인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마 의도적으로 4번을 선택한 것이라 믿습니다. 3번을 선택하여 100점을 맞을 수 있지만 일부러 4번을 선택하여 할머니가 맞다고 날 위해 희생하시는 할머니가 틀린 것이 아니라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세상을 향해 도발한 것이라 믿습니다. 스스로 모든 사람들의 인정을 역행하길 작정한 것입니다.
이 손주는 할머니 편에서 틀림을 선택하였습니다. 이 아이의 마음이 할머니에게 통해 지금 할머니는 울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하나님도 한번 울려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회는 많이 움켜쥐고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누려야 잘산다. 그것이 답이다 말합니다. 우리도 그것이 인간적인 면에 있어서 답인 것을 압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되는지 조금만 생각하면 당연히 결론은 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편에서 틀림을 붙잡으라 하십니다. 
구원 밖의 사람들은 주일날도 가게 문 엽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닫습니다.
복음 밖의 사람들은 10의 10을 가지고 떵떵거리며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10의 9만 어떤 이는 10의8, 7, 6에 선교헌금에 건축헌금 감사헌금에 일천번제까지 참 많은 헌금을 하고 남는 것 가지고 삽니다. 
공부하는 친구들은 평일 주일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일날은 주님의 날이니 성수하라고 공부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일주일 중 하루 푹 쉬고 일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푹쉬는 그날 일하는 것보다 더 열심히 모든 진액을 다 쏟는 예배드리고 다른 날도 일합니다. 

복음 밖의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 하나님 울릴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옳다하는 것이 하나님편에서 아니면 내 사업이 망할 위기고 우리 가정이 길거리에 나앉는 위기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법과 식을 고집하는 자 만이 하나님을 울릴 수 있습니다. 
선택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울리는 선택을 합시다.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이 아닌 좁은 길이지만 좁은 문이지만 우리 하나님 원하시는 그 길을 갑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4.19 혁명일입니다.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이 불의에 항거하여 온 몸으로 민주주의를 앞당긴 날입니다. 
이 역사적인 날 우리도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성공에 하나님 편에서  틀림을 선택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일은 온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씀이 내 삶속에 거함으로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취하는 것이 아닌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만 보고듣고느끼고취하는 그럼으로 내가 사라지고 오직 주님만이 드러나는 진정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축복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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