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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팔일이 지나서 (요 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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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일이 지나서 (요 20:24~29)


여러분의 신앙은 무엇에 그 기초를 두고 계십니까? 지금까지 예수 믿어온 각자의 신앙생활이 어떤 과정과 변화를 겪으면서 믿었는지, 자랐는지, 한 번 돌아다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지만, 우리의 신앙의 뿌리가 되는 것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母胎信仰입니다. 어머니 태에서부터 예수 믿는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친가외가 모두 예수 믿습니다. 외가 동네는 100% 예수 믿는 마을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도, 어머니 아버지의 기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기도, 사랑, 삼촌, 고모, 숙모, 이모, 고향 교회 목사님, 저를 아시는 성도님들의 사랑, 관심을 받으면서,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고향에서 자랄 때, 한 번은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식사시간이 되어 친구 집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무척 당황했습니다. 밥상을 받으신 친구 집 어른들이 기도도 하지 않으시고 밥숟가락이 그냥 입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기도도 하지 않고 밥을 드시나?···” 그 때, 전 처음 알았습니다. “아, 사람들이 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아니구나,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있구나···.” 제게는 그 일이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말씀드리자면, 저는 온통 기독교적인 환경 속에 푹 파묻혀서 자란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기독교 傳統 속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평생 주일예배 빠져본 적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새벽기도회에 나갔습니다. 어릴 적 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운 덕에, 5학년 때부터 國漢文聖經冊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새벽기도회를 하는 습관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중학교에 다니던 나이에는, 은사체험도 많이 했습니다. 부흥집회에 참석하면서 통성기도 할 때, 신비한 체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기도를 하는 데 온 예배당 안에 진동하는 향기를 맡았습니다. 자랑치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일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연습 방언이 아닌, 방언도 받았습니다. 

당시 한국교회에는 종말론이 팽배했습니다. 요한계시록강해가 한창이던 때입니다. 부흥회가 열리면, 末世之末이라는 설교말씀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많이 들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 어머니께서 교복을 사주셨는데 얼마나 큰 옷을 사주셨든지 졸업할 때에도 소매가 남아돌았습니다. 그 때, 제 고민은 옷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이 옷을 입고 중학교나 졸업할 수 있을까?” 末世之末, 예수님 재림과 종말 말씀을 하도 많이 들어서 저는 중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예수님 오시면 어떻하나 걱정했댔습니다. 얼마나 속으로 고민하고, 끙끙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교회 선생님이나, 어른들에게 제 생각이 맞는 지, 여쭤볼 수도 없었고 그저 혼자서만 고민하면서 그 시절을 보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한다고 했지만, 한 때는 나도 꽤 괜찮은 목사다, 그런 마음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런 과정, 그런 지나온 것들이 지금에 와서 보니,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그것들이, 다 별 것이 아니더라고요. 지금에 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알아가고, 특별히 말씀 앞에서 예수님을 발견하면서부터는, 과거의 그런 경험, 나름대로 의미 있다고 했던 그런 것들이 어찌 그렇게 보잘 것 없는 것들인지요? 

그런 과정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과정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내가 그렇게 귀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만날수록,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말씀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것들이 더 이상 나에게 유익한 것들이 아니라, 그저 그만그만한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와는 또 다르시겠지요. 사도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노라” 했습니다(빌 3, 7-8).

일전에, 대전에 있는 교회예배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 지역은, 대덕연구단지가 있고 카이스트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중, 박사가 6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카이스트 교수님들이 4, 50명 된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그러셔요. “목사님, 우리교인들은 설교를 아주 세밀하게 듣습니다. 그런데 아멘을 잘 안하십니다. 그러니, 놀라지 마십시오. 속으로는 다 아멘하십니다” 그러시더라고요. “우리 교회도 비슷합니다” 하고 웃었습니다. 

목사님이 또 “우리교회는 무슨 새로운 일을 하려면, 3년은 걸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해가 되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는 겁니다. 자연과학을 하신 분들이 많으시다보니까, 과학적인 사고와 논리에 맞아야 하고, 이해가 되어야 일이 된다는 겁니다. 3년 걸려서 될 일이라면 1년에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신앙특성이 그렇다는 이야기겠지요.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머리가 안 좋으셔서 이해를 빨리 못하셔들 그러신가 봅니다” 하고 웃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는 핵심요소들(부품들)은 무엇입니까? 경험입니까? 나름대로 가지고 계신 신앙전통입니까? 신비한 체험입니까? 이적과 기사와 같은 능력들입니까? 아니면 우리 시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찾는 넓은 문, 걸어 다니는 넓은 길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보면, 인습적因襲的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습타파적因襲打破的이십니다. 역설逆說과 반전反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의 길은, 세속적世俗的이거나 종교적宗敎的인 인습적인因襲的인 지혜智慧 너머의 존재방식存在方式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은, 바로 그 예수님께 기초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신앙의 기초를 두고 계십니까? 내 신앙의 기초는 무엇 위에 놓여있는가, 각자 자기의 신앙을 규명해보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주시고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의 근간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바르게 믿을 수 없습니다. 지난주일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 부활증언을 보면서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불신앙 가운데서 절망하고, 두려워하고, 옛 삶으로 되돌아가버리기도 했습니다. 시몬 베드로, 디두모라 하는 도마,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 그 외 다른 두 제자들이, 예수님 부활하셨지만 디베랴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가지 않았습니까?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二十五 里 되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落鄕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도 있잖습니까? (1)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주 예수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참되고 깊은 희망을 보여 주셨네 (2)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슬픔이 앞길 막으나,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슬픔이 앞길 막으나, 주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어 새로운 희망 주심을 믿사옵니다(김두완 작곡). 

우리 생각과는 달리,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조차도 쉽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인공, ‘디두모(헬)라 불리는 도마(아람어)’인데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도마를 의심많은 제자라고 하는 데, 도마에게 무엇이 문제가 되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찾아오셨을 때, 때마침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좀 특이한 사람임입니다. 사람들이, 다 똑같이 않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런 저런 사람 모두 다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모두를 위해서 위해 죽으셨고, 모두에게 생명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겁니다. 다 감싸 안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 품어 안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마는 어떻게 하다가 함께 있어야 자리에 빠졌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도마는 평소에도 좀 특이했습니다. 좀 둔한 제자였다고 할까요?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 그의 죽음을 가리켜 잠들었다 하시면서, 베다니 나사로의 집으로 가자 하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반대했습니다(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했기 때문). 그 때 도마가 좀 엉뚱한 말을 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합니다. 無意識 중에 한 엉뚱한 말이지만, 그러나 도마는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는 진실을 말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도마는 그 상황파악을 못한 채,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는 우둔한 제자로 등장합니다. 조금 엉뚱했던 모양입니다(형광등). 다른 제자들은 눈치가 너무 빨라서, 예수님의 행보를 반대하는 데,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엉뚱한 말을 한 겁니다. 

요한복음 14장에 가면 도마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 때 또다시 우둔한 제자로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이 말씀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곧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이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의 길을 예고하신 말씀이지요) 하시자 다른 제자들은 무슨 뜻인지 다 알아차리고 있었는데, 그 때도 도마는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합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하십니다(요 14, 6). 도마는, 예수님 말씀을 자주 자주 이해하지 못하는 우둔한 제자로 등장합니다. 

문제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지만, 제자들이 전해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본문은 ‘도마의 불신앙’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25말씀 보십시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는, 깨달음이 좀 더디고 우둔한 제자였습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노라는 고집도 있었습니다. 도마는 그렇다 칩시다. 중요한 것은, 그런 도마를 대하시는 예수님이 어떠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도마를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26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현’으로 요지부동搖之不動이던 도마의 불신앙에 극적인 反轉이 일어납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상황묘사)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는 돌이켜, 도마에게 지목하여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십니다. 직접적인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도마에게 믿음을 갖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지요.

만일 여러분도 도마처럼 체험적인 신앙 아니면, 저는 도저히 예수 못 믿습니다 하시는 분들 계십니까? 그런 분에게는 주님께서 기회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경험적인 신앙이, 훌륭한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경험에만 의존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왜 예수 믿는 우리에게, 경험, 경험, 경험으로 가득가득하게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목하십시오.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예수님 부활을 믿지 못하겠노라 고집하던 도마가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만져보는 것, 넣어보는 것을 포기합니다. 그리고는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경험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던 도마였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나아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고백한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A.D.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예수님의 두 위격에 대한 신학적인 결론을 내지요. Vere Deus Vere Homo). 

도마는, 의심을 품었던 제자이기도 했지만 기독교 역사상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한 첫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 이 말씀은, 도마를 책망하시는 말씀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을 눈으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지고, 체험하였던 열두제자 세대 이후에 오는, 온 인류와 우리들을 향하여 주신 교훈의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경험이 아니라,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체험적인 신앙인들은 다 믿음생활에 성공했습니까? 그렇잖습니다.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도 실패한 사람 많습니다(이스라엘 백성 보십시오···). 예수님 거역한 사람 많습니다. 경험적인 신앙을 가지기만 하면, 예수 잘 믿을 것 같지요? 그렇잖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자랍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증언하지 않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들음은 귀로 듣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음으로 듣고, 삶으로 듣고, 몸으로 듣고, 전인격적으로 듣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 17). 

마태복음 28, 6에서 천사가 일러주지 않았습니까? 무덤에 장사되신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대단히 중요한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입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 언약은 파기되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成就됩니다. 누가복음 23장의 엠마오로 낙향하던 절망에 빠진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예수님께 관한 말씀을 자세히 (길에서) 설명하시니라” 그들이 말씀을 들을 때,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에 뿌리내린 확실한 부활신앙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못하였던 제자들의 불신앙이, 우리의 불신앙임을 고백합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이 말씀이,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축복의 말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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