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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첫사랑을 기억하라 (렘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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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을 기억하라 (렘 2:1~8) 

1. 처음 사랑이 여전하신가요?

전에 부교역자로 섬기던 교회에 결혼하신지 60년이 되셔서, 결혼 60주년, 즉 ‘회혼식(回婚式)’을 전 교회적으로 열었던 장로님과 권사님 부부가 계셨습니다. 자녀들과 손자‧손녀들이 다 훌륭하게 자랐고, 모두들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자기 몫을 잘 해내는 사람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말 다복(多福)하신 분들이었지요. 그 분들을 보면서, 그리고 그 후로 연세가 드시도록 부부가 해로하는 어른들을 보면서, 제게는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습니다. “결혼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의 부부의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결혼 초기에 가졌던 두근거림과 열정적인 사랑이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는 과연 어떤 모습의 사랑으로 변했을까?” 

물론 사랑의 모습은 사람이나 시대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굳이 “사랑”이라고 표현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부부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경우이지요. 1972년에 제작된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구(舊) 소련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애환을 그린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 중에 아주 유명한 대사가 나옵니다. 30 년 동안 결혼 생활을 해온 남편이 자기 부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보, 당신 나 사랑해?” 느닷없이 이러한 질문을 받은 아내는 다음과 같은 답을 했습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않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제가 당신의 아이들을 낳아 30여 년을 기르고, 항상 당신을 위해 정성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고, 당신이 늦을 때면 기다리고, 당신의 옷을 정성스레 빨래한 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이 영화 대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그들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굳이 “사랑”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굳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또 특별한 애정 표현이 없더라도, 그들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 처음의 사랑 그대로를 평생토록 변함없이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사랑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사랑은 처음 그대로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까?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사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사랑은 제가 질문한 것처럼 부부 간의 사랑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여러분의 사랑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동과 기쁨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주님을 처음 만났던 그 날과 그 장소, 그리고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기억이 뚜렷하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의 경우, 탕자의 비유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라는 사실이 너무나 감동이 되어서 설교를 들으면서 연신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울었고, 예배가 끝난 뒤에도 일어서지 않고 밤새워 기도하면서 주님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밤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밤, 행복한 밤, 지금 생각해도 가슴 벅찬 밤이었습니다. 그렇게 2,30분 쯤 바닥에 엎드려 기도한 줄 알았는데, 벌써 새벽이 되어서 새벽예배 드리려고 사람들이 와서야 시간이 그렇게 흐른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저의 첫 사랑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은 그 처음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처음으로 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주님을 향한 첫 사랑을 가진 여러분에게 오늘 본문이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때의 사랑이 지금은 어떠한가?’ 여러분이 주님을 향해 가졌던 처음 사랑, 처음의 신앙고백이 아직도 여전한지, 아니면 그때보다 더 깊어졌는지, 혹시 부정적으로 변화되어 그 사랑이 식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주님은 지금 그것을 확인하고자 하십니다.

2. 첫 사랑 회복하기

1)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한데 …

본문 1절부터 3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사랑의 초창기, 즉 신혼 시절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2절,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이스라엘이 한 민족과 나라로 시작되기 전, 그들은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하나님과 결혼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것과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결혼’으로 설명하면서, 그때의 이스라엘의 모습과 그때의 사랑을 추억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때의 이스라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볼품없고 못나고 내세울 것이 없는 천박한 노예 처녀’와 같았는데, 그런 처녀를 데려다가 극진하게 사랑하여 그 처녀와 결혼한 어느 부호의 이야기 같은 문학적인 ‘비유’로 설명하는 것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런 내용,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영화나 드라마들의 단골 메뉴와 같은 주제나 내용은 주로 ‘신데렐라’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신데렐라 이야기의 원조는 하나님과 그 백성들간의 사랑 이야기라는 것을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의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들은 신데렐라처럼 남자나 여자 잘 만나 성공하는 것들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주인공들은 거의 다 어떻습니까? 아무리 못나게 꾸미고 옷을 엉망으로 업어도 예쁘더라고요. 거기다가 그들의 성격은 한없이 착하기만 하고, 또 남다른 재주도 한 두 가지 이상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가진 것 없고, 재주도 없고, 생긴 것도 별로고, 게다가 성질까지 더러운 신데렐라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즉 <콩쥐팥쥐>에서 ‘팥쥐’같은 주인공, <신데렐라>의 언니들인 ‘드리젤라’나 ‘아나스타시아’ 같은 주인공을 보셨냐는 말입니다. 

제가 이 질문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묵상하면서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인 저와 여러분들이 정말 신데렐라처럼 주님을 만나면서부터 인생이 확 달라진 사람들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천국 이야기의 신데렐라인 성도들의 모습이 착한 ‘콩쥐’나 ‘신데렐라’가 아니라 ‘팥쥐’나 ‘드리젤라’나 ‘아나스타시아’와 같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여기에 동의하시겠지요? 어느 모로 보아도 사랑받을 만한 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그 백성 이스라엘이요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볼품없고 못나고 내세울 것이 없는 천박한 노예 처녀’와 같은 팥쥐나, 성질 사납고 못돼 먹은 ‘드리젤라’나 ‘아나스타시아’ 같은 처녀를 데려다가 자신의 정실부인으로 삼을 ‘잘나고 멋있고 돈 많은 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과 저와 여러분을 불러서 자신의 신부로 삼으셨으며, 신랑이 신부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예물과 약속들을 다 주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적인 일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그 백성 이스라엘과의 처음 사랑, 그 신혼의 때를 “기억하노니”, 즉 잊지 않고 계신다고, 그때의 사랑 그대로 변치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어떠했습니까?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주 좋았으며, 그들 역시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네 청년 때의 인애”, “네 신혼 때의 사랑”이라는 표현으로 볼 때 그렇게 짐작이 됩니다. 그러나 신혼 시절의 이스라엘, 즉 광야 시절의 이스라엘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그들의 광야 생활은 실패 투성이요,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의 연속이었습니다. 파와 마늘이 먹고 싶다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물이 나오지 않아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고기가 먹고 싶다고 원망하고,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이스라엘입니다. 즉 신혼 시절부터 문제만 일으키고 바람까지 피운 것이 하나님의 신부인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읽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만 추억하고 계십니다. 비록 하나님을 향하여 직접적으로 원망 불평하고, 때로는 우회적으로 모세와 지도자들을 향하여 원망했던 이스라엘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좋은 것만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처음부터 부족하고 허물 많고 문제 많은 연인이었던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그 후에는 셀 수없이 많은 실수와 죄악들을 범한 이스라엘이었지만 그것은 다 잊으시고 아름답고 좋은 것만 간직하시면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강원도 홍원에는 열녀각이 하나있습니다. 병자호란 때 어떤 남자가 의주에서 벌어진 청나라와의 전쟁에 나가 전사를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아내는 홍원에서 의주까지 천리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녀는 고생 끝에 남편의 시신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고향으로 천리길을 남편의 시신을 업고 와서 선산에 묻었습니다. 그런데 시신을 업고 천리길을 오느라 얼마나 애를 썼든지 그녀도 사흘 후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이 아름다운 사랑을 기려서 열녀각을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인간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99%의 죄와 허물보다도 1%의 사랑과 순종을 더 크게 보시는 하나님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첫 사랑 회복하기

오늘 본문의 첫 번째 내용이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라면, 두 번째 내용은 ‘이스라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의 신혼시절, 즉 광야 시대에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고 불순종하고 패역한 범죄는 저질렀던 때를 돌아보시면서, ‘차라리 그때가 지금보다 더 낫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그들의 사랑이, 지금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정말 문제가 많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예레미야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이 어떠 했길래 이런 식으로까지 말씀하실까요? 

오늘 본문 4절부터 8절은 이스라엘이 처음 사랑을 버린 구체적인 모습을 열거한 것입니다. 5절,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헛된 것들, 그림자 같은 우상들, 사악한 우상을 택하여 마치 남편을 배신한 부인처럼 행동한 것을 두고 ‘너희 조상이 나를 버린 이유가 나에게 무슨 불의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더냐? 내가 너희 조상에게나 너희에게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느냐? 내가 너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였느냐? 한번 얘기해 보아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선지자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을 버린 이유가 하나님 편에 무슨 허물이 있어서, 혹은 하나님이 먼저 결혼의 서약을 어겼기 때문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신부가 된 것은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430년 동안 애굽의 노예였던 그들이 수많은 기적 속에서 애굽에서 해방된 일이 어떻게 작은 일입니까? 그들이 홍해를 건넌 일이 어떻게 작은 일입니까? 그들이 광야 40년을 무사히 보낸 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에 의해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와 보호를 받았으며, ‘메추라기 우박’과 ‘만나 이슬’을 먹은 것이 어떻게 작은 일이겠습니까? 세상 어느 민족이 40년 간 하늘에서 내린 양식을 먹으면서 살았습니까? 비가 내리지 않아서 사막이 된 광야에서 20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을 산 것이 어찌 작은 일입니까? 40년 동안, 한 벌의 옷과 한 켤레의 신발로 광야를 걷고 또 걷고서도 헤어지지 않고 닳지 않은 기적이 누구에게 있었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중에도 하나님께 범죄했고,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6).”하고 말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8절에 나옵니다.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모범이 되어야 하고, 백성들의 신앙을 지도해야 할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디 계신지 묻는 일에 관심조차도 없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율법과 말씀을 가르쳐야 할 사람들은 정작 하나님도 그 말씀도 알지 못했고, 그러면서도 하나님과 그 말씀에 관한 것을 직업으로 삼아 그것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관리들은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었고, 심지어 선지자들은 다른 신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 이 모양이니 일반 백성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또 10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즉 하나님은 ‘사람들을 여러 민족과 나라들로 보내서 한 번 알아보아라. 어떤 나라가 기도하면 음성으로 응답하시고, 이적을 일으켜서 응답하시고, 또 실제로 모습을 나타내 보이시는 신을 버리고 나무를 깎아 만든 신, 돌을 다듬어 만든 신, 쇠를 녹여 만든 신을 숭배한단 말인가?’ 세상 모든 민족이 섬기는 신들은 모두 사람이 만든 우상에 지나지 않지만, 그들도 자기 신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말도 못하고 숭배자의 경배와 기도에 반응도 못하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도 자기 신을 배신하지 않는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은 그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이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도 너무나 멀리 떠나 있었고, 주님을 향한 사랑은 아예 흔적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형편이었지요.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자기 아들을 내놓으신 사랑이 어찌 작은 것입니까? 당신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일이 어떻게 작은 일입니까? “아바 아버지”는 예수님만이 부를 수 있는 호칭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로 당신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것은 정말 과분하고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신비한 세계를 열어 보이신 것이 어찌 작은 일입니까?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고, 기도하면 응답하시고, 삶의 무수한 고비들을 은혜로 무사히 통과하게 하신 일이 어찌 작은 일입니까? ‘레옹 르 그랑’이라는 사람은 “구원의 신비를 다 표현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 우리에게는 기쁨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저와 여러분은 살피고 또 살펴도 다 볼 수 없고, 가지고 또 가져도 다 누릴 수 없고, 맛보고 또 맛보아도 다 맛볼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창고에 들어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작은 일입니까? 

그런데 이런 사랑을 받은 성도가 처음 사랑을 버리고서 다른데 관심을 쏟고, 다른 것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주님을 향한 열심이 언제부터인지 싸늘하게 식어있는 것에 대해 주님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하신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나는 주님을 배신한 적이 없다. 나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다른 데로 돌리지 않았다’라고 하실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영화 <약속>에는 다음의 대사가 나옵니다. “다른 여자 만나는 것만 배신이 아냐. 네 마음속에서 날 제쳐놓는 것도 내겐 배신이야.” 이 말을 하면서 여자 주인공이 펑펑 웁니다. 겉으로 아닌 척해도 그 마음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도 배신이라는 것이죠. 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아도 그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그 중심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버렸다면, 그것이 바로 배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님이 하셨던 탄식이 오늘 여러분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니? 나는 네가 나의 사랑을 배신한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부로 여러분의 첫 사랑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시인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배신했을 때
나의 사랑이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음에 
내 자신이 너무 싫고 미워 눈물이 났다.

그러고도 사람들을 만나 즐겁게 웃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TV의 재밌는 프로를 보며 배를 잡는다.

그런 내 모습을 문득 발견하면서 
나의 뻔뻔스러움에 내가 놀란다.

평생을 지킬거라 생각했던 맹세
죽음과도 바꾸지 않을 거라던 믿음…

하지만 용서 받을 것을 알기에
내가 더 가증스럽고 
그의 사랑을 받는 내가 부끄럽다.

내 자신이 싫어 즐거울 수가 없다.
내 지은 죄가 커 즐거워선 안된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 시인의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즉 주님께 받았던 그 특별한 사랑, 그 놀라운 은혜를 잊은 것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다시 회복하기를 원하는 간절함이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또 실제로 주님을 향한 불붙는 사랑이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3. 처음처럼, 영원히!

말씀을 맺겠습니다. 몇 년 전, 아주 감동적인 TV 광고가 하나 있었습니다. 간호사, 군인, 경찰, 작업장의 인부들이 처음 선서식 혹 서약식을 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처음처럼…”, “처음 각오처럼…” 하는 말을 반복하는 광고였습니다. 기억이 나시죠? 처음 시작할 때의 서약이나 사랑이나 열정을 그대로 간직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시인 용혜원 목사님의 “처음처럼”이라는 시도 있습니다.

우리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그렇게 순수하게
사랑하고 싶습니다.

처음 연인으로
느껴졌던
그 순간의 느낌대로
언제나 그렇게 아름답게
사랑하고 싶습니다.

퇴색되거나
변질되거나
욕심부리지 않고
우리 만났을 때
그때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그렇게 순수하게
사랑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사랑은 처음과 비교해 볼 때 어떤 모습입니까? 찬송가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찬송이 여러분의 찬송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찬송을 부끄럽지 않게, 이 찬송을 당당하게 부를 수 있는 여러분의 사랑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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