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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 신앙 (행 4: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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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 (행 4:13~22)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기네들만 신앙생활을 하면 되었지, 왜? 다른 사람까지 못살게 굴면서 믿으라고 강요하는지 모르겠다”는 하소연을 사람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교회 나오라고 권유하면서 심지어 반강제적으로 교회로 끌고 나오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왜 그렇게 사람을 괴롭게 하는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가정적 질문을 하게 됩니다. 첫째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전도하여 사람들을 자기네가 믿는 종교를 강요하려고 합니다. 둘째로, 정말 전도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말 복 받으라고 하는 것인지 등입니다. 그러면 이 둘 중에서 어느 가정이 그래도 가능할 것인가요? 사람을 강요하기 위해서 일 것인가요? 아니라면 무엇일까요?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은 제사장들과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온 시내가 소란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원래 그들은 신학적 지식 없고 학문도 없는 자들이었는데, 감히 신앙에 대하여 관원들과 장로와 서기관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관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옥에 가두고 그들을 심문하게 되었습니다. 
  

1. 담대한 베드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본시 어부의 직업을 가졌으며 글을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의 복음 사역에 사람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마 4:18-22). 그 때부터 베드로의 인생은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제자들과 함께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힘쓸 때에 베드로는 성령으로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되고, 성령 받은 후 그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게 되는데, 평생을 물고기 잡는 일로만 살려던 베드로는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이 무려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행 2:41).

(행 4:13,14)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그의 설교는 아주 강력했고, 아무 거리낌이 없는 담대한 설교였습니다. “담대하게”는 ‘모두 남김 없이 자유롭고 대담하게 말하였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공회원들은 그들이 원래 학문이 없는 자인 것을 알았는데, 그가 말하는 것을 보니 아무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그들은 큰 능력과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하여 어떤 공격이나 반발할 만한 어떤 수단도 강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 학식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가 담대하게 예수에 대해서 증거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그는 성령을 체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믿는 자들에게 이성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얻게 됩니다.

둘째로, 그가 전하는 복음은 진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자는 스스로 거짓임을 알기 때문에 자신 없이 이야기를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아는 자는 베드로처럼 담대하게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보다도 무엇이 진실인가에 관하여 귀를 기우려야 할 것입니다. 

셋째, 그들은 직접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요 20:1-8). 또한 그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로서 항상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능력을 목격하고 체험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요 20: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이처럼 체험 있는 신앙을 갖는다면 확신을 가지고 베드로처럼 당당히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체험적인 신앙

사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은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입으로써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어떤 권세를 가진 자도 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성도가 체험해야할 신앙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해 합니다. 부활이 확신이 없는 신앙은 사실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신앙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어 구걸하던 사람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걸어가게 하였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이것을 본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그 된 일에 대하여 놀라워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입으로 증거하지만 그 증거는 전도자의 삶 중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앉은뱅이의 기적적인 사건은 그가 전하는 입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였기 때문에 더욱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말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설명되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이처럼 복음은 수학 공식처럼 논리적인 해답이 아닙니다. 만약 복음이 논리적인 공식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성경지식이 많거나 신앙 생활을 오래한 사람들만이 기독교를 이해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율법학자들처럼 많은 사람들은 어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것을 요구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의 체험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진심으로 나아오려는 모든 자에게 즉각적인 체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만약에 우리가 불신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된다면 죽은 자의 부활도 믿을 수 없고 여러 가지 기적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소위 신앙생활을 아주 오래한 사람들조차 그들 앞에서 앉은뱅이가 걸어 다녔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우리 생각에 맞게끔 하나님을 믿지 말고 하나님 편에 서서 그의 능력을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논리적으로 이해하지 말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3. 보고 들은 사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의 사건으로 인하여 시내가 동요되자 관원들은 그들이 태도로 보아 어떤 부인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하려고 제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도록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의 위협 앞에서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행 4:19,20)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첫째로, 보고들은 사실은 어떤 지식으로도 반박할 수 없습니다. 공회원들은 조상들의 전통에 대한 많은 지식과 율법에 관하여 많는 학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말을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변증술에도 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기탄없는 증거의 말들에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베드로와 요한의 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기 때문입니이다. 

(고전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그러므로 공회원들이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베드로와 요한의 말에 더 이상 힐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갖는다면 항상 승리할 수 있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이것은 권세로써 막을 수 없는 진리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하는 사람들은 당시 유대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아무도 모르게 죽일 수 있는 권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권세를 가진 자들이 보잘 것 없는 어부들의 논증에 아무 반박을 하지 못했습니다. 제사장들의 권세는 세상이 준 것이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받은 권세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도로서 받은 권세를 세상이 어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이것은 재물로써 힐난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공회원들은 당시 많은 재물을 가진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많은 재물을 가지고도 앉은뱅이를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돈이 좋고 위력이 있지만 돈으로도 못하는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은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은과 금 같은 재물이 없었지만 능력을 일으키는 예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은 재물 많이 가진 자들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낸 베드로와 요한의 편을 들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경험한 사실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사실이며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는 지식으로도 권세로도 재물로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보고들은 사실들은 어떤 방해와 유혹으로도 막을 수 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이 진리 안에서 놀라운 신앙적 체험을 가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이시며, 부활되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고, 그것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체험한 사실을 가지고 사는 신앙인이라면 어떤 고난과 어려움도 극복하게 될 것이다, 

미국 시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럿셀 코넬이라는 지휘관이 있었는데 전쟁에서 후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휘관이 그만 자신의 지휘도(指揮刀)를 두고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코넬 대령은 링이라는 소년을 시켜서 그 칼을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이 소년은 목숨을 걸고 적진 속에 들어가 칼을 갖고 오기는 했으나 그만 총에 맞아 쓰러져 죽으면서,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친구이기 때문에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무신론자였고 회의주의자였던 코넬은 대령은 시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오! 주여, 이 어린이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여 이 어린이가 찾는 하나님을 위해서 제가 몸을 바치겠습니다.” 라고 결단했습니다. 

그는 이후 신학을 공부하고, 자기의 전 재산을 털어서 보스톤 교외에 골든 코넬 신학대학원을 설립했고, 템플대학(Temple University)를 세워서 수많은 지도자를 양성했습니다. 링의 죽음은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코넬 대령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의 면류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의 첫 시발점이 된 마틴 루터는 시시 때때로 너무나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곤 했습니다. 개혁의 작은 불꽃은 여러 방해로 인해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답답하고 암담해질 때마다 루터는 큰 소리로 "예수님은 살아 계시다, 살아 계시다!(Vivit! Vivit!)"라고 외쳤습니다. 예수께서 무덤 속에 갇혀 버린 것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뜻입니다.


결 론 

(행 4: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공회원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권세와 명예 등으로는 베드로와 요한의 증거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할 수 없이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고는 놓아주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능력의 사람들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유일하신 분이며 생명을 주관하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권세에 굴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원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끝까지 증거한 이유는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하고 체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세상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요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가 믿고 경험하고 체험한 이 부활의 사건은 우리에게 모든 좌절과 낙망에서 소망이 되며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신앙 안에서 우리는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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