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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에 관한 7 가지 의문 (고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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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 부활에 관한 7 가지 의문 
+설교 본문 - 고전 15장
+설교자 - 마경훈 목사 

오늘 설교는 최영기 목사님의 [부활에 관한 7 가지 의문]이라는 설교의 뼈대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제가 살을 새롭게 붙인 것입니다.

이슬람교 경전인 꾸란에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나옵니다.(43:63) 그리고 꾸란에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예수님에 관해 설명합니다. 꾸란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기록은 성경에 나오는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동정녀탄생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과 그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다고 가르칩니다. 

또 주님의 승천과 재림도 말합니다. 이쯤 되면 이슬람교는 유대교보다 우리 기독교에 더 가깝고,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충분히 대화가 가능한 종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3:55). 십자가에서 죽음을 모면한 후 샘이 흐르는 곳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3:50) 그래서 이슬람교는 예수님을 구세주가 아니라 알라가 보낸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가 예수를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기독교를 적대시하고 공격합니다. 

인도에서 스탠리 존스 선교사가 노방전도를 하고 있는데 이슬람교도 한 사람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못 가진 것 하나를 가지고 있소” 그래서 스탠리 존스 목사가 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메카에 가면 마호메트의 시체가 들어있는 관이 있어서 우리는 정말 그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도 빈 무덤밖에 볼 수 없지 않소?” 이 말에 스탠리 존스는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당신네 이슬람교와 우리 기독교의 다른 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셨기 때문에 무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복음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뺀다면 생명 없는 종교, 윤리도덕적인 종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단은 부활이 없는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론을 만들어 냈습니다. 대표적인 몇 가지 이론을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먼저 기절설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성경은 기절설을 부인합니다. 병사들이 주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는데 물과 피가 쏟다졌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서는 피만 나오지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미 죽으셨기 때문에 물과 피가 쏟다져 나온 것입니다. 

시체도난설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다 숨겨 놓고 부활했다고 거짓말 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이 잡히시자 다 도망을 쳤던 제자들입니다. 심지어 수제자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었는데 그런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경비들이 지키고 있는 무덤에 가서 주님의 시체를 훔칠 수 있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무덤오인설이 있습니다. 여인들이 주님의 무덤을 찾아간 시간이 새벽이라 어두워서 잘못 찾아갔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럴리도 없지만 혹시 그랬다 하더라도 금세 밝혀졌을 것입니다. 

환상설이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너무 사모한 나머지 환상을 본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것도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500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기도 하셨는데 500여 형제라면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친다면 족히 2,000명은 될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환상을 봤다는 것은 환상설이 억지 주장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 중에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대해서 좀 더 집중적으로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관한 여러 가지 의문에 대하여 답을 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어떻게 아는가? 

부활을 확신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 세 가지 이유를 말하겠습니다. 

첫째, 성경이 부활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부활을 확신합니다. 3, 4절에 보면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입니다. 인류에게 가장 진실한 영향력을 끼친 책이 성경이고 이 성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거짓에서 돌이켜 진리를 추구하게 되었는데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주님이 부활하신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둘째, 믿을만한 증인들의 믿을만한 증언 때문에 부활을 확신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증인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5-8절에 보면 게바가 부활의 증인입니다. 게바는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입니다. 열두제자가 증인입니다. 그리고 오백여형제가 부활의 증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500여형제라면 자매들과 아이들까지 합치면 족히 2,000명은 될 것입니다. 야고보도 부활의 증인입니다. 여기 야고보는 주님의 동생 야고보일 것입니다. 야고보는 주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주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주님을 미쳤다고까지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이 죽으신 후에는 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바울 자신도 부활의 증인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본래 핍박자였습니다. 스데반을 죽일 때 사람들을 선동했던 사람이고, 믿는 자들을 잡아 감옥에 가두고 죽음에 넘긴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때문에 목숨을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의 인생에 그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증인한 사람들의 인격을 볼 때에 거짓 증언을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 이들이 부활을 증언함으로 인하여 얻어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활의 증언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궁극적으로는 순교까지 당하는데 이들이 무엇 때문에 거짓 증언을 했겠습니까? 

초대 교회사에 보면 제자들의 죽음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고, 
안드레는 헬라에서 전도하다가 아가야성에서 엑스자형(X)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고, 
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칼로 목 베어 죽었고, 
빌립은 서아시아 부르기아에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죽었고, 
요한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모시면서 유대 땅에서 전도하다가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 후 에베소에 가서 전도하다가 그곳에서 핍박을 받아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졌지만 기적으로 살아나 다시 밧모섬으로 귀향 보내졌고 그곳에서 요한계시록을 받아 기록하고 죽었습니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고, 
도마는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죽었으며, 
마태는 에티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목 베임을 받아 죽었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려 죽임을 당했고, 
시몬은 애굽에서 전도한 후 다시 유대에 돌아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습니다. 
야고보의 동생 유다는 바사에 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고, 
가룟 유다 대신 선출된 제자 맛디아는 에티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이라면 어떻게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전원이 생명을 걸고 복음을 증거 했겠습니까? 여러분은 거짓말을 위해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절대로 거짓말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확실하기 때문에 주님의 제자들은 목숨까지 걸고 복음을 증거 했던 것입니다.

셋째,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일들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체험되고 있기 때문에 부활을 확신합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하나님에게로 가서 성령님을 보내주시겠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26). 그 약속대로 주님이 부활하신지 50일, 승천하신지 10일 만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같이 강력하게 임하신 성령께서 제자들을 사로잡으셨고 그 성령의 역사로 그들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들이 얼어났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임하셨던 성령께서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셔서 제자들의 인생을 바꿔놓으신 것처럼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도 놀라운 변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14절에 보니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사도들이 전파하는 복음도 헛된 것이고 그 복음을 믿는 자들의 믿음도 헛되다고 말합니다. 17절에 보면 복음을 믿는 자들의 믿음이 헛된 것만이 아니라 믿는 자들이 죄로부터 구원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거대한 사기극에 말려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에 기초를 쌓은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 중의 하나가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사도 바울을 사기꾼입니다(15절). 바울 신학의 기초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 신앙은 허위에 근거한 사상누각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인들은 모두 다 사기극에 놀아나고 있는 바보들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에 우리 죄를 용서받는다고 믿는 것도 큰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14, 17절). 만일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면 그가 돌아가신 것이 인류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는지, 아니면 자신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나 부활하심으로 그는 죄 없는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죽음은 죄 때문에 왔기 때문입니다(롬 5:12).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죄가 없는 분임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죄가 없기 때문에 죽음이 예수님을 잡아 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20절에서 바울은 주님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 분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결국은 죽음 가운데서 부활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23절을 보면 주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주님에게 속한 자 곧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에게 부활이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주님을 믿는 자들과 동일시되는 사건이기에 우리에게 중요한 사건입니다. 바울은 갈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롬 6:3,4에 보면 세례에 대해서 말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고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장로교에서는 세례의 형식보다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약식세례를 하지만 성경에서는 물속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를 말합니다. 침례는 물속에 온 몸이 완전히 잠겼다가 나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세례자는 믿음으로 주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물속에 잠기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어짐을 말하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부활의 주님과 합하여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과 연합합니다. 믿음으로 주님과 연합한 사람들은 주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옛사람이 죽은 것이고, 주님의 부활과 합하여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했기 때문에 부활은 우리와 깊은 상관이 있는 것입니다.


4. 성도들은 어떠한 몸으로 부활할 것인가?

부활하신 주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의 부활체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물리적인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과는 떡을 놓고 축사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신 후에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움 때문에 다락방의 문을 잠그고 모여 있을 때에 주님은 갑자기 제자들이 있는 장소에 나타나셨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믿는 사람들이 부활 할 때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진 것 같습니다. 35절에 보면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36절 이하에서 씨 뿌리는 것으로 비유를 합니다. 씨앗이 죽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고 죽으면 열매로 다시 살게 됩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씨앗을 심어보면 제각각 열매의 모양이 다릅니다. 그리고 육체도 다 같은 육체가 아니라 짐승의 육체가 있고, 새의 육체가 있고, 물고기의 육체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의 속한 형체가 있고 땅에 속한 형체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늘에 속한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영광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릅니다. 별과 별의 영광도 다르듯이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부활체를 입으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48절에 보면 믿는 자들은 하늘에 속한 자이기에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됩니다.


5. 성도들은 언제 부활하는가?

51절에 보면 부활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영적인 비밀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이 믿어집니까? 자신이 부활할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영적인 비밀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51절에 보면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된다고 말합니다. 52절에 보면 나팔소리가 나면 부활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살전 4:16,17을 보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부활합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대에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들리고 주님이 하늘에서 강림하시는데 그때에 믿고 죽은 자들의 무덤이 열리고 부활하고 살아남은 자들도 공중으로 들림을 받아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6. 부활한 후에는 어떤 삶이 전개되는가?

주님이 재림하시고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믿는 우리들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계21장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곳의 아름다움을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신부가 단장한 것과 같습니다. 여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다울 때가 신부단장 할 때입니다. 그런데 천국을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으니 말로 할 수 없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말입니다. 

계21:3,4에 보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계시며 모든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모든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말은 그곳에는 아픔이 없다는 말입니다. 계21:4에 보면 사망도, 애통도,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합니다.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서 살면 몸에 대한 불만도 사라질 것입니다. 지금의 몸에 불만이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키가 작아서, 눈이 째져서, 코가 낮아서, 체형이 이상해서 고민하시는 분들이 있을 텐데 부활하면 다 해결됩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53절에 보니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을 입게 됩니다. 


7. 부활을 믿으면 어떤 삶을 사는가?

사도 바울은 부활의 진리를 말한 후에 58절에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여기서 바울은 교린도 교인들에게 두 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활을 믿으면 견고하여 흔들림 없이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우리의 신앙을 흔들어 놓는 환경과 사건들이 많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도 부활과 영원한 세상을 확신하고 흔들림이 없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영국 어느 지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갑자기 석탄광 하나가 무너지는 바람에 그 안에서 일하고 있던 164명의 광부들이 생매장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 깊은 슬픔을 가지고 사체발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체 옆에 판자가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같이 하십니다. 우리는 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주여 축복하소서. 우리는 대단히 유쾌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원한 영광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곧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으므로 우리는 이곳에 남지 않고 부활의 생명 가운데 아름답게 꽃 피울 것입니다” 석탄광의 무너지는 흙더미 속에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영생의 기쁨을 가지고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요즘 교인들은 너무나 약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작은 시험만 있어도 흔들립니다. 시험이라는 단어를 붙이기도 부끄러운 일들 앞에서도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요동하지 마십시오. 강하고 담대하게 신앙생활 하십시오.

병이 들어 죽데 되어도, 사고로 죽데 되어도 부활신앙을 갖고 흔들림 없이 담대하게 삽시다. 클리블랜드로 가는 한 배가 풍랑을 만나 침몰하기 직전이라 모두가 공포에 떨고 있는데 하늘을 향하여 평안하게 기도하는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조금 있다 바다가 잔잔해지고 난 후 사람들이 그 부인에게 몰려왔습니다. “부인, 그렇게 무서운 파도가 치는 와중에서도 어찌 그리 평안하실 수 있었습니까?” “예. 저에게는 딸이 둘이 있는데 큰딸은 천국에서 살고 작은딸은 클리블랜드에 삽니다. 파도가 높이 칠 때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제가 천국에 사는 큰딸을 보게 됩니까? 클리블랜드에 사는 작은딸을 보게 됩니까?’ 그러니 마음이 평안할 수밖에요.” 풍랑으로 배가 침몰해 죽으면 천국에 가서 큰딸과 살면 되고 풍랑이 잔잔해져 살게 되면 클리블랜드에 가서 작은 딸하고 살면 되니 평안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을 가진 자의 축복인 것입니다.

둘째, 부활을 믿으면 주의 일에 더욱 힘을 쓰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내세를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상을 기대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빌 3:13,14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께서 상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 상을 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주의 일에 힘을 썼던 것입니다.  

중국동포 박은혜전도사님의 간증입니다. 이분은 중국에서 문화혁명으로 믿는 사람들이 핍박을 당할 때, 몰래 라디오를 듣다가 극동방송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혼자 조용히 혼자 방송을 듣다가 설교자의 인도를 따라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참 설교자를 따라서 영접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머리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확 쏟아졌습니다. 남편이 들어와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무슨 게딱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라고 외치면서 머리에다 뜨거운 국수국물을 그대로 엎어버린 것입니다.

그 이후 남편의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중국에는 공산당과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기독교의 명색을 유지하는 삼자교회가 있는데, 그녀는 라디오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매주일 삼자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얼마나 핍박을 하는지 교회만 다녀오면 그날 저녁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계속 두들겨 맞았습니다. 너무 두들겨 맞아서 양쪽 귀가 터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게 10년 동안 두들겨 맞으며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예수 믿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너, 나를 택할래? 예수를 택할래?”하며 으름장을 놓을 때마다 “나는 예수님도 택하고, 당신도 택할 겁니다.”라고 하면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재판관 앞에 끌려가서 강제 이혼을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한국으로 쫓겨 와서 지금까지 10년이 넘도록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분이 사랑의교회에 와서 간증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에 와보니, 모든 성도들 대부분 배에 기름이 줄줄 흐르도록 받은 것이 너무 많은데, 이상하게도 기도할 때 엎드리기만 하면 하나님한테 뭘 그렇게 맡겨 놓은 게 있는지 ‘주여, 주시옵소서!’하고 날마다 달라고만 합니다. 

중국 성도들은 그렇게 환난과 핍박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해도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를 들어 사용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게 해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지 무엇을 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에게 받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 주님의 사랑에 감사해서 주의 일에 힘을 쓰며 삽시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들에게 원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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