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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증인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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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증인 (마 28:1~10)


유명한 종교개혁자 말틴 루터(Martin Luther)가 농민 전쟁의 와중에서 여러 가지 심적 좌절을 경험하고 낙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그가 침식을 전폐하고 병석에 누웠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의 침실에 지혜로운 아내 ‘카타리나’ 가 상복을 입고 들어왔습니다. 
루터가 놀라며 "아니 누가 죽었소?" 라고 묻자 ‘카타리나’ 는 "예,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루터가 “아니,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라고 반문하자 그의 아내 카타리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안 돌아가셨다면 그가 정말 살아 계시다면 당신이 그렇게 좌절하고 낙심할 리가 있겠어요?” 
루터는 아내의 말에서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종교개혁의 거룩한 과업을 완성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참으로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예수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였다는 것은 기독교의 핵심이며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부활의 기초위에 세워졌습니다. 부활은 추상적인 이야기나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하는 것 중에 빌라도의 보고서가 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황제 [티베리오 카이사르] 치하에서 유대총독으로 임명된 전형적인 군인이었습니다. 그가 부임하여 거룩한 성에 예루살렘에 로마군을 주둔 시키면서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민중봉기가 2번이나 일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의 여론에 민감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예수님을 재판하게 되었고 군중들이 들고 일어나 예수를 못 박으라고 소리칠 때 예수님에게 사형 받을 만한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민란이 날것을 두려워하여 형 집행을 허가하고 맙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재판 사건에 대하여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로마의 황제에게 보냈는데 이 보고서가 현재 터키의 성 소피아 박물관에 소장되어있습니다. 
“예수의 체포와 심문 및 처형에 관하여 가이사에게 보낸 빌라도의 보고서” 라고 제목이 붙어있는 이 문건은 예수님의 활동과 그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대단히 중요한 증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각하께 문안드립니다. 제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최근 수년 동안에 일어난 사건은 나라의 운명까지도 변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각하께 소상히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라고 시작이 됩니다. 그중에 일부를 소개합니다. 
“원치 않았지만 폭동이 두려워서 희생양으로 예수라는 청년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무덤은 비었고 그의 제자들은 용기를 내서 예수가 부활했다고 전파하였습니다. 예수의 생애는,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이 모든 것이 그의 손에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바다를 잠들게 하고 폭풍을 멈추게 하고, 고기를 잡아 그 입에서 은전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이 사실일 수밖에 없다고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십자가 옆에서 말커스가 말한 것처럼 이 사람은 하나님에 아들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각하, 이것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사실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저는 각하의 가장 충실한 신하입니다. 본디오 빌라도"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부활사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부활절을 당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야될 문제는 부활의 역사성입니다. 부활을 철학적으로 추상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문제가 아닙니다. 
혹은 도덕적으로 설명할 문제도 아닙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철저한 사건으로부터 기독교는 시작이 됩니다. 이 역사적 사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해야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본문의 말씀은 새벽에 무덤에 찾아갔던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부활신앙을 가진 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주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몇몇의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습니다. 죽은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발라드리러 갔던 여인들은 무덤 문이 열리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무서워하고 있을 때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이 부활하였다고 전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들은 여인들에게 큰 기쁨이 주어졌습니다. 
마 28:6-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 새...” 라고 했습니다. 
부활의 소식에 그들은 무서움도 있었지만 큰 기쁨이 넘쳤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서움이란 천사를 보게된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말 자체가 기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죽음은 슬픔이지만 부활은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우리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기쁨의 삶이어야 합니다. 죄에서 용서 받았으니 기쁨이 아닙니까? 죽어도 사는 영생의 축복을 받았으니 기쁨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고린도 후서 6:10절에서 바울은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삶에 대하여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근본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죽음이 인류위에 왕 노릇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죽음의 지배에서 자유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 사망률이 증가되었다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사망률이 증가할 수 있습니까? 아니 죽지 않을 사람이 죽었다는 말입니까? 죽음의 확률은 1:1, 100%입니다. 아무도 안 죽을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의 발달된 생명과학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킬 뿐이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반드시 죽을 인생에게 죽음 이후에 부활이 참으로 확실하다면 이것이야 말로 인류 최고 최대의 기쁨의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부활의 주를 모시고 믿고 사는 자들은 적어도 인생의 근본 문제, 궁극 문제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일찍 그의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선포하시고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그를 찬양하십시오. 그를 인해 기뻐하십시오. 부활을 통해서 주시는 큰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2. 경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경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천사에게 부활의 소식을 듣고 큰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달려가던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여인들은 너무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9절을 보면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라” 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경배는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이제 그가 예수가 참으로 하나님이신 것을 안 것입니다. 부활이 그의 하나님 되심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0:26절에 보면 고넬료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내어주신 베드로가 너무 거룩해 보여 엎드려 그를 경배하려고 하자 베드로는 깜짝 놀라며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4:15절에 보면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하자 신이 오셨다고 그에게 경배를 드리고자 하자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다" 라고 말합니다. 또한 계시록22장에 보면 위대한 역사의 계시를 자신에게 전달한 천사에게 요한이 엎드려 그를 경배하려고 하자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와 같은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계22:9) 

그러니까 경배는 하나님께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사건으로 우리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롬1:4에 말씀을 보면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경배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그의 주권 앞에 엎드리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엎드릴 때마다 그는 그의 백성들 중에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십니다. 자신의 능력을 보이시고 자신의 영광을 선포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그의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소망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문제에 빠지지 마시고 문제의 해결자인 그분의 얼굴을 보십시오. 고통이 있습니까? 고통의 포로가 되지 마시고 고통의 건너편에서 만물을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인 되신 그분의 영광을 보십시오. 실패와 좌절이 여러분의 인생을 힘들게 하고 계신가요? 
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그분을 기다리지 못하십니까? 질병과 죽음의 그림자가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습니까? 왜 질병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사망 건너편에서 부활을 약속하시는 부활의 주를 바라보지 못하시나요?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발발 했을 때 전쟁을 치러야 하는 대영 제국의 황실은 존경받는 대주교 윌리암 템플(William Temple)에게 영국 국민들에 대한 위로의 메시지를 부탁했습니다. 
그때 템플주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위로는 해답이 아닙니다. 예배가 해답입니다. 이 땅에 거하는 주의 모든 백성들이 살아계신 주님 앞에 엎디어 그를 경배하신다면 역사는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부활의 아침 이 땅의 모든 교회마다 다시 사신 주, 살아계신 주를 경배하는 진지한 예배의 부흥이 일어난다면 우리의 역사는 달라질 것입니다. 이 부활의 아침은 우리가 경배의 삶을 살 것을 도전합니다. 

3.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부활을 증거하는 증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주님께서 이 여인들에게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그리고 11절에 보면 그들은 순종하여 갑니다.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제자들에게 가라고 했습니다. 
왜 가라고 하셨습니까? 
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해주라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전하고 그들로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리 땅 달리 소망이 없던 그 땅에서 목마르게 복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부활 복음의 최초의 증거자, 최초의 전도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증거하라는 명령을 최초로 여인들에게 주셨습니다.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동네방네 떠들며 부활의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이 첫 번째로 만나주신 것이 제자들 즉 남자들이 아니라 여인들이었을까요? 
그것은 여인들에게는 소문 퍼뜨리는 은사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조금 원색적으로 표현하면 입이 싼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 조크 중에도 여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자동차가 어떤 차인가 라고 말하면 BMW라고 말합니다. bmw는 자동차 유명 메이커지만 여기에는 다른 뜻이 있답니다. 즉 Big Mouth Woman (입이 큰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전도는 결코 여성들만의 의무는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임을 가르쳐 주님의 지상명령이라고 부릅니다. 이 평범한 여성들이 증거 할 수가 있었다면 누구나 전도할 수 있습니다. 아니 누구나 전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안한다면 누가 하겠습니까? 지금 안한다면 언제 하겠습니까? 여기서 안한다면 어디 가서 증거 하시겠습니까? 

옛날 나치 독일에 항거하던 그룹 중에 '복음주의 목사 긴급동맹'(Pfarrer-Notbund)라는 조직이 있었습니다. 이 조직을 이끌던 지도자는 말틴 니묄러(M.Niemoller)목사였습니다. 그는 이 운동을 하다가 히틀러에게 체포당하여 1937-1945년까지 강제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감옥에서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히틀러가 마지막 심판을 받는 광경이었습니다. 주께서 그에게 묻습니다. "너에게 전도한 사람이 없었느냐?" "예, 저에게 아부한 사람도 많았고 나에게 저항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전도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대답을 들으시면서 갑자기 니묄러 목사는 주님의 시선이 자신을 쏘아보시는 모습을 보고 식은 땀을 흘리다가 잠을 깹니다. 그는 엎드리어 이렇게 결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제가 히틀러를 미워하고 저항은 했지만 저는 그를 사랑한 일도 그를 불쌍히 여겨 그에게 전도하고자 한 적도 없습니다. 제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는 그 다음부터 그를 취조하고 감시하는 자들 재판관, 나치 간부들, 간수, 옥중 동료들에게 전도를 했고 하나님은 한 시대를 밝히는 종으로 그를 전쟁 후까지 귀히 쓰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활의 증거자로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부활을 증거하는 삶이란 십자가의 삶을 의미합니다. 더 낮아지고 더 섬기고 더 죽어주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죽어도 살고 짓밟혀도 결코 밟히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삶에 기쁨을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배합시다. 그리고 그를 증거하십시오. 부활의 주님이 큰 권능을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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