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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삼일만에 살아나셨느니라 (눅 2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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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만에 살아나셨느니라 (눅 24:1~12)


초대교회로부터 목사가 예배를 시작하려면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라고 교우들이 화답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도 한번 선포해보겠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주님의 부활을 전파하여야겠습니다.  그리고 매주일은 작은 부활절로 지켰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일반 주일인데 주일 예배 찬송으로 부활찬송을 넣었답니다.  주보사에서 전화가 오기를 “목사님 주일 찬송에 부활찬송을 넣었는데, 이번 주일이 부활주일도 아닌데, 혹시 잘못 넣은 것은 아닌가하여 전화 걸어보았습니다.”    “예, 우리는 매주일을 작은 부활절로 지키기에 잘못 넣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모든 주일은 작은 부활절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초대교회로부터 부활주일은 “날들 중에 가장 고귀한 날”이라고 격찬하였습니다.   부활이란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 기독교만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실 것을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세 번이나 예언적으로 하신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의 예언입니다.  막8:31에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예고하십니다.  막9:31에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막10:32-33에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핵심적인 말씀은 같습니다.  “죽을 것이나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입니다. 죽으시지만, 살아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죽을 것을 내다보시고 다시 살아난다고 예언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어느 불교인이 기독교로 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개종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만일 당신이 길을 가다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거리에서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둘 중의 한 사람은 죽은 사람이요, 한 사람은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에게 길을 묻겠습니까?  당연히 산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내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죽은 부처님이 아니라, 산 예수님에게 인생의 길과 구원의 길을 물어보려고 그런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인도에서 스탠리 존스 선교사가 노방전도를 하고 있는데 이슬람교도 한 사람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당신네 기독교인들이 못 가진 것 하나를 가지고 있소” 그래서 스탠리 존스 목사가 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메카에 가면 마호메트의 시체가 들어있는 관이 있어서 우리는 정말 그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당신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도 빈 무덤밖에 볼 수 없지가 않소?”  이 말에 스탠리 존스는 대답하였습니다. “바로 그것이 당신네 이슬람교와 우리 기독교의 다른 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셨기 때문에 무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계 종교사상에 그 종교의 창시자가 죽었다가 부활한 예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없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나인성 과부의 독자 청년이 죽어 장례 지내면서 시신을 운구하는 중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과부가 안타깝게 우는 것을 보시고는 죽음의 행렬을 멈추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죽은 청년을 향하여 명령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그 죽어 매장하려고 가던 청년이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를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살리신 사건은 두 번째 사건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12살 된 외동딸이 있었습니다.    그가 죽을병에 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 회당장 야이로에게는 유일한 소망이 있다고 하면 회당장이요, 유대교 지도자이지만 체면불구하고 예수님에게 찾아가서 간구하는 것뿐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어 장사를 준비하고 곡하기 시작한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명령하셨습니다. “달리다굼”이라고 외치셨습니다.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이었습니다.  

세 번째 사건은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나사로는 굴 무덤에 장사되었는데, 굴 입구를 돌로 막아놓았습니다.  주님은 그 돌을 옮겨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는 만류하였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은 믿기만 하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기도하신 후에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무덤 굴에서 나왔습니다. 

이상은 예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신 사건이었습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야이로의 딸, 죽어서 운구되고 있는 청년, 아주 확실한 사건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친구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이런 능력이 많으신 주님이 이제는 당신이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당신이 예언하신 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일어나리라 살아나리라는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너무나 허무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 교권자들에게 잡히시고 즉결재판에 넘겨져 하루아침에 죽으신 것을 보면 말이 안 나올 정도가 기막힌 사건입니다.  어제 밤까지 기도하시던 분이 아침에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교권을 잡고 있고, 힘이 있다고 하여도 그렇게 사람을 빨리 죽이는 것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사형제도는 재고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힘없어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이 빨리 썩지 말라고 향품을 발라주는데, 사람들은 각자가 향품을 준비하여 장례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시신을 장례해도 베 홑이불 같은 천으로 가볍게 덮어두고는 후에도 쉽게 열어 제치고 향품을 바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몇 명의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들의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그리고 그 외 여자들이 더 있었습니다.  

이들 여인들은 안식 후 첫 날 오늘의 주일 아침 동이 터올 무렵에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되기 전 금요일 오후에 무덤에 장사되었는데,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집에 가느라고 향품 하나도 발라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동안 수없는 사랑을 받고, 병고침을 받고, 말씀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아무런 보답도 못하고 예수님은 허무하게 죽으시고 장사되셨습니다.  

여자들은 그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가면서 서로 말하였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무덤에 당도했는데,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큰 돌이었습니다.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굴에 들어가보니 주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서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 때 무덤 속에는 두 천사가 앉아 있다가 하는 말이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 이르신 말씀을 상기시켰습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눅24:6-7)고 하셨습니다.  

그들 여성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 때에 왔던 여성 중에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알려주고,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달려올 때에 뒤 따라 왔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말을 들은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서 믿지 아니하였으나, 베드로와 요한은 일어나서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만 보였습니다.  

먼저 요한이 빈무덤에 도착하였지만 들어가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베드로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그도 들어가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두 제자는 무덤을 확인하고 돌아갔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는 울면서 무덤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말하였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막달라 마리아는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님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고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뒤에서 말하는 분이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마리아야” 하셨습니다. 마리아가 몸을 돌이켜 자세히 보니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지금 무덤 밖에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랍오니”라고 불렀습니다.  랍오니라는 말은 선생님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 중의 어떤 사람에게 먼저 나타나시지 않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는지를 놓고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나 요한도 훌륭하신 분이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사모하는 열정이 누구에게 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여자들이 다 돌아갔어도, 선두에 서는 두 제자도 돌아갔지만, 그 무덤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열심을 주님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여러 서신서에 보면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을 기록할 때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기록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나타나십니다. 사모하는 열정을 가진 사람에게 찾아와 주십니다.  어떤 사도에게 먼저 나타나셨다고 하면 그를 신성화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우리 주님은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을 다 생각하시고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지구촌 교회의 이동원목사님이 오래 전에 한 선교사님과 함께 일할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외국 선교사님께서 이목사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둡지요?” “그리고 교회 오기 전까지 바깥에서는 그렇게 명랑하게 얘기하고 웃기도 하는데, 교회당에 들어서기만 하면 왜 갑자기 어둡고 우울해지는 거죠?” 

이목사님은 변명할 말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교사님 한국 교인들은 예배당 안에 들어서자마자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그 선교사님께서는 웃으시면서, “그래요, 그러면 그 주님이 다시 사신 것은 잊어 버렸나요?”라고 하더랍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읽어보면서 그 선교사님이 하신 말 “주님이 다시 사신 것은 잊어 버렸나요?”라는 이 말을 오랫동안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 선교사님이 잘 보셨습니다.   우리는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걸어놓고, 예수님의 수난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피 흘려 돌아가신 것을 기념합니다.  이것은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좋은 신앙입니다.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는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 승리하신 주님을 강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신 주님, 성령님의 동행하심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십니다.  사도바울은 부활장이라는 고전15:20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최후에 가서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동참하고, 우리의 육신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고대하는 최종의 소망은 육신의 부활이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고,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주님은 죽음이란 새로운 몸의 변화요,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시작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죽으면 끝이 난다고 생각하는데 절대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 뛰어넘는 세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우리에게 부활 신앙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인가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서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후에 담대해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과 장로들 앞에 서서 외쳤습니다.  행4:19-20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이 말은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는 위대한 말이요, 담대한 말입니다.  이런 말은 그의 부활신앙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일본의 귀족 시브자와 자작이 미국의 초청을 받아 곳곳을 방문하던 중에 백화점 왕 존 워나메이커가 섬기는 필라델피아 장로교회에 와서 주일학교에서 연설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유교신자라고 밝히면서 유교의 인(仁)과 기독교의 사랑은  결국에는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워나메이커는 즉석에서 학생들에게 “여러분, 공자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 자작께서는 이미 죽은지 오래된 성자의 교훈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하여 오늘도 우리 곁에 계신 사랑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힘 있게 외치는 워나메이커를 본 시브자와 자작은 그의 순수한 신앙적인 용기에 탄복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사망과 죽음을 이기신 분입니다.  사망이 주님을 가두려고 하였지만, 무덤이 주님을 가두려고 하였지만, 우리 예수님은 흑암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11:25-26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르다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때에 마르다는 고백하였습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회생이나 원기회복이나 소생은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리신 사건은 다 회생이요, 소생이지만,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옛 생명이 살아난 것으로 다시 살았다고 하지만,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생명으로의 변화였습니다.  그야말로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연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골2:12을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지금 우리는 예수를 믿으며 우리는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우리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  

골3:1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죽으심에만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에도 동참하고 주님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여 주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엡2:4-6에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요, 지금 살아 있어도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는 부활을 선포해야 합니다.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죽음과 더불어 부활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우주적 차원의 부활이 이 지상에서 영광스럽게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면서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욕된 몸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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