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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우리 있을 어디에나 계실 주님 (막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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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있을 어디에나 계실 주님 (막 16:1~8) 


오늘 본문은 마가가 쓴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기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인 금요일 오후 세시쯤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세 시간쯤 지나 해 질 때부터 안식일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즉 토요일 오후 여섯시쯤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예수님의 몸에 뿌릴 향품을 샀을 것입니다. 향품은 시체의 부패를 막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부패하는 시체에서 나는 악취를 완화해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람의 몸에 바를 향품을 가져가는 것은 사랑과 존경과 헌신의 표시였습니다. 오늘날 묘지에 꽃을 가져가는 것과 같은 의미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 여인들은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가 금지된 안식일이 지나고 향품을 파는 시장이나 가게가 문을 열자마자 향품을 사기는 했지만 이미 무덤에 찾아가기에는 너무나 늦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급한 마음을 달래며 그 다음날 이른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해 돋을 때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본문 2절).

예수님의 무덤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긴 했지만 세 여인에게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가면서 서로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했습니다(본문 3절). 무덤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을 큰 돌도 문제였고 또 묘지를 엄중히 지키고 있을 경비병들(마27:65-66)도 사실 문제였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사용할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을 텐데도 예수님을 향한 여인들의 사랑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위하여 향품을 사게 만들고 무작정 그의 무덤으로 달려가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일찍이 예수님을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와 함께 이미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과 함께 세마포로 예수님의 시체를 싸서 새 무덤에 모셔놓았습니다(요19:38-42). 그런데도 이 여인들은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리고 무덤에 모시느라고 뭐 제대로 장례절차를 밟았겠느냐는 생각에 자기들이 직접 정성껏 다시 예수님의 시체를 손질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합리적 계산을 이기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으로 발길을 재촉하면서도 어떻게 무덤 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를 염려하던 세 여인이 막상 무덤에 도착해 보니 벌써 돌은 굴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돌은 역시 심히 컸습니다(본문 4절). 무덤 안으로 들어간 여인들은 거기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을 발견했습니다(본문 5절).  흰 옷을 입은 사람이란 천사를 묘사할 때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마태복음에서는 그를 천사라고 일관되게 말하고 있습니다(마28:2, 5). 여인들의 놀람은 매우 컸을 것입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천사의 이 말은 잘 되새겨 보아야 할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먼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한 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라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특정한 역사 속에 특정한 지역에 사셨던 실제 인물로 부각시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설이나 신화 속의 가공의 인물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한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역사성과 사실성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자리까지 따라가 그의 마지막 순간을 끝까지 지켜보았던 목격자들입니다(막15:40). 그리고 그들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의 몸을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을 때 그것을 다 본 사람들입니다(막15:46-47). 바로 그 여인들에게 천사는 그 무덤이 비어 있음을 보여주며 거기 뉘었던 분이 살아나셨고 더 이상 거기 계시지 않으심을 확인시켜준 것입니다.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한 것은 그 여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어떤 영적이거나 환상적인 체험을 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육안으로 체험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한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특히 이 말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말하라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사이의 관계가 끝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뵈어야 할 일이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비록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쳤었지만 이미 그들의 잘못이 용서받았고 주님과의 교제관계와 지도자로서의 그들의 지위가 회복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특히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라고 하며 제자들과 별도로 베드로의 이름을 거명한 것은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자타가 공인하던 그가 세 차례나 주님을 부인했던 사실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님과 제자들 사이의 다시 만남에서 제외되지 않을 것임을 미리 확인시키고 안심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전하라고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생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신 후 그들과 함께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셨을 때입니다(막14:22-26).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하시고는 이어서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14:28)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서며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막14:29) 했었고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14:30) 하셨으며 베드로도 다시 힘주어 장담하기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했고 다른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막14:31). 제자들은 잊어버렸거나 기억조차 없을지 모르는 예수님의 그 예언과 같은 말씀을 천사는 제자들에게 상기시켜준 것입니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다시 갈릴리로 돌아갈 것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리라는 주님의 말씀과 제자들이 거기서 주님을 뵙게 되리라고 천사가 알려준 말은 그들의 갈릴리 귀향이 예수님과 함께 시작했던 모든 일들이 수포로 돌아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갈릴리가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만남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제자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부르신 곳입니다. 

천국복음이 선포되기 시작한 곳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3년간의 삶이 시작된 곳입니다. 그 일은 중단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그리로 돌아간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옛날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간다한들 예수님께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 하신 약속이 취소될 수는 없을 것임을 분명히 알리신 것입니다. 그들이 갈릴리로 돌아갈 것이지만 거기서 다시 주님께 붙잡힌 바 될 것임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어디에 간들 거기에 먼저 와 계실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제자들은 갈릴리로 돌아갔고 거기서 다시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만나실 때의 그 자리 그 상황에서 예수님은 다시 오셨습니다.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여 지치고 낙심하고 있는 그 시간에 주님께서는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시 오셔서 당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그가 세 번씩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세 번이나 말씀하시며 변함없는 신뢰를 다짐해주셨습니다. 갈릴리는 언제나 위로를 얻고 희망을 되찾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회심이 일어난 곳입니다. 물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제자로 삶의 온전한 변화가 일어난 곳이었습니다. 관계의 회복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과 신뢰가 되살아나는 곳입니다. 사명이 새로워지는 곳입니다. 

갈릴리라는 지역 자체가 그런 놀라운 힘을 가진 곳이 아닙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위로와 희망은 갈릴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회심과 삶의 변화를 갈릴리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관계를 회복시키는 주님이십니다. 사랑과 신뢰를 되살리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변함없이 사명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붙잡힌 바 된 이들이  어느 곳에 가든 어디에 있든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 말씀이 참됨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부활시키시는 주님이십니다.


지금은 실패한 사람, 실의에 빠진 사람, 자포자기하는 사람, 모든 희망을 잃은 사람이 너무나 많은 때입니다. 이때에 부활하신 주님, 부활의주님을 널리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죄의 용서와 위로와 새로운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시기 위하여 어디에나 계시고 누구에게든 찾아오시는 주님이 계심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 실의를 의욕으로 바꾸며 자포자기를 재기로 바꾸고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며 무의미한 삶을 사명이 있는 삶으로 바꾸시는 주님의 부활의 역사의 도구가 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에 앞서 갈릴리도 가 계셨던 주님, 그 주님을 우리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만나는 우리가 됩시다. 또한 우리 주변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있을 어디에나 계실 주님을 만나게 하는 우리가 되기를 힘씁시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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