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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는 무리들 (창 41:41~43, 마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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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는 무리들 (창 41:41~43, 마 21:6~9)


1600년대 유럽에서 ‘튤립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유럽 각국에 수입된 튤립이 너무 아름다워 유럽의 귀족들은 비싼 값에 진귀한 품종을 구하려고 튤립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튤립을 사 두는 것이야 말로 확실한 투자처였습니다. 특히 아우구스투스라는 품종은 한 뿌리에 8,000달러까지 올랐습니다. 튤립을 제배하는 농부가 거부가 되었습니다. 1637년 튤립을 많이 소유한 한 귀족이 현금이 필요하여 튤립을 시장에 내 놓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튤립을 사가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많은 튤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튤립 값이 폭락하였습니다. 군중심리에 부화내동한 사람들 때문에 튤립 파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생각에 왜 하는지, 무얼 하는지, 결과가 어떻게 될 건지 생각도 안 하고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귀스타브 르 봉이 쓴 ‘군중심리’라는 책이 1895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히틀러, 무솔리니 등 대중 선동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책입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누구나 군중이 될 수 있는 잠재적 군중입니다. 군중은 쉽게 광기, 패닉, 공포, 희망 등 집단적 심리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소위 다수성의 힘의 지배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한국인은 이런 집단의식이 유난히 발달해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보여준 한국인의 집단 응원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집단적 군중심리가 발동한 것입니다. 이슈만 생기면 문자 메시지 하나에 모여드는 촛불집회도 마찬가지입니다. TV에서 토마토가 몸에 좋다고 하면 시장에서 토마토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비타민 C가 좋다고 하면 비타민 C를 싹쓸이합니다. 이런 심리도 집단적 군중심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 많은 무리들이 집단적 군중심리에 의해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심리에 휘둘리지 않는 소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하는 군중들에 비해 예수님의 입성을 기뻐할 줄 아는 자가 있었습니다. 특히 제자들과 순진한 어린이들이었습니다. 15절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라고 하는 것을 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군중심리는 얼마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배반하는 소리로 변하였습니다. 이때도 안타까워하는 소수가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조롱하는 무리가 있었는가 하면 울며 고난의 길을 따라가는 소수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함께 기뻐할 줄 알고 함께 슬퍼할 줄 아는 소수가 예수님께는 필요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는 환영하는 소리입니다. 사람들은 극진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왕을 환영하듯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호산나’는 “비노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최고의 바람은 구원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9:38에는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천사들이 부른 노래에 버금가는 찬양이 ‘호산나’ 찬양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찬양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옷을 벗어 나귀 위에 깔았습니다. 무리들은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불렀습니다. 오늘날처럼 예수님을 폄하하고, 교회를 비하하는 다수의 시대에 기쁨으로 예수님을 환영하며 눈물로 십자가에 참여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겉옷을 길에 편 무리들 

8절 상반절에는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라고 합니다. 옷을 펴는 것은 최대의 경의를 표현한 것입니다. 7절에는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제자들의 극진한 환영과 경의를 표시한 말입니다. 
  
무리들이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왕을 환영하는 풍속에 따른 것입니다. 열왕기하 9:13에는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마치 왕이 입성하듯 그들의 옷을 벗어 깔고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 속옷은 통으로 짠 것입니다. 겉옷은 밤에 이불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라고 하신 말씀은 겉옷은 아주 중요한 생활의 도구인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존에 필요한 세 가지를 말할 때에 ‘의식주’라고 합니다. 세 가지가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옷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세 가지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입는 것입니다.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으로 봐서 입는 것은 염려꺼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옷은 예나 지금이나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한 생활의 도구입니다. 그런데 그 옷을 길에 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희생이 있고 드림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옷을 편다는 것은 헌신을 의미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 마을에 오신다면 여러분은 지금 입은 겉옷을 길에 깔 자신이 있습니까? 나귀가 지나가게 되면 그 옷은 못 쓰게 될 텐데도 자신 있게 그 옷을 펼 자신이 있습니까? 자기의 옷을 길에 편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옷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무슨 옷을 입고 있나 하는 것은 자기의 감정과 의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G20 회담에서는 단연 미셀 오바마의 패션이 화두였습니다. 패션 감각이 뛰어나고 과감한 선택이 화제였습니다. 지난번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이 아시아를 방문했을 때도 패션이 화제에 올랐습니다. 힐러리가 한국에서는 빨강 옷을 입었습니다. 일본에서는 푸른 옷을 입었습니다. 중국에서는 검정 옷을 입었습니다. 외교적으로 옷의 색깔에도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옷은 그 자체에 의미뿐만 아니라 옷을 펴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를 주는 사건이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 옷을 편 사람들의 행동이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에서 인간의 손은 참으로 신비하다고 합니다. 손은 창조하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합니다. 어루만질 수도 있고 때릴 수도 있습니다. 환영할 수도 있고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축복할 수도 있고 저주할 수도 있습니다. 치유할 수도 있고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구걸할 수도 있고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 손은 안전과 보호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협박하는 주먹이 되기도 합니다. 손은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인간은 그 손으로 환영의 옷을 펼 수도 있고, 그 손으로 저주의 손을 들 수도 있고, 채찍질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옷은 영성 표현의 최고의 수단 중의 하나입니다. 옷은 유혹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침공했을 때 하나님은 전리품을 가지지 못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전쟁을 사람이 이긴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하시고 이기신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간이란 사람이 전리품을 가져다가 감추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옷이었습니다. 이 일로 아간은 아골 골짜기에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옷을 유혹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염려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성경은 제사장의 옷인 에봇을 아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아주 까다로운 의식입니다. 왜 그럴까요? 의복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의입니다. 에봇은 ‘우림’과 ‘둠밈’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빛’과 ‘완전’을 의미합니다. 예배에 입는 옷은 하나님께 대한 예의를 뜻하며 이것이 곧 영성입니다. 
  
어떤 이는 옷이 죄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예 죄를 용서받은 사람은 옷을 벗고 살자고 합니다. 옷을 벗으면 죄가 없어집니까?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와 더불어 삽니다. 그래서 옷도 입어야 합니다. 옷을 벗어야 죄를 벗는다고 주장하는 나체주의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좋은 이름으로 자연주의자라고 합니다. 이들이 모이는 교회는 봉헌이 없다고 합니다. 주머니가 없어 봉헌도 못 가지고 온다고 합니다. 
  
조지 번스라는 코미디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주지 않은 것은 옷을 주면 주머니를 달라고 할 것이고, 주머니를 주면 돈을 달라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옷은 욕심의 표현입니다. 옷 때문에 죄를 많이 짓습니다. 우리의 옷이 영적 옷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옷은 과하게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여행할 때에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단순성은 영성입니다. 옷은 영성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욕심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길 가에 옷을 편 사람들은 자신의 영성적 모습을 보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얼마 후가 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의 옷을 나누는 로마 군병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이 무리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는 로마 군병들과는 달리 미리 그들의 옷을 예수님을 위해 바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영성적 모습, 우리의 헌신적 모습을 예루살렘에 오르시는 고난의 주님께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나뭇가지를 길에 편 무리들 

8절 하반절에는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라고 합니다.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호산나를 외친 사람들입니다. 15절에 보면 특별히 어린이들이 나뭇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양하는데 많이 동참한 듯입니다. 아마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철부지한 아이들까지 동원했다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순진한 마음으로 환영한 것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요한계시록 7:9에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10절에는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라고 합니다. 이들이 종려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찬양한 것은 예수님을 승리의 주님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호산나는 승전가입니다. 예수님을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처럼 환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부활에서 나타납니다. 이전에는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의 전 생애는 승리하신 삶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놀라운 영적 지혜입니다. 영적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제 곧 십자가가 눈앞에 있는데 무슨 승리입니까? 
  
일본의 서양지성사 교수인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 14권에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절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친족들을 숙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조카 율리아누스가 있습니다. 그는 다신교를 믿었고 관용정신과 전통의 부활을 지향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단명하여 잠시 후 그의 권력이 끝나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시오노 교수는 이것을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삼켰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승리’라고 하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율리아누스가 죽을 때 ‘Vicisti Galilaee’라고 하였답니다. 이 말은 “갈릴리인이여, 당신이 이겼소”라는 뜻입니다. 갈릴리인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승리한 줄 알았는데 실패하고, 실패한 줄 알았는데 승리한 이런 새옹지마가 세상에 허다합니다. 진리의 세계는 항상 실패 같은 승리가 배수진을 치고 있습니다. 분명히 졌는데 이겼습니다. 잃었는데 얻었습니다. 줬는데 더 많아졌습니다. 빼앗겼는데 더 풍성해졌습니다. 죽었는데 살았습니다. 이것이 진리의 묘미입니다. 신앙의 승리입니다. 나폴레옹도 권력을 잃고 유배갔을 때 “예수 바로 당신이 이겼소. 당신만이 승리자요”라고 하였답니다. 세상에는 승리자 같은 실패자가 있고, 실패자 같은 승리자도 있습니다. 
  
탈무드에는 ‘승자는 꼴지를 해도 의미를 찾지만, 패자는 오직 일등을 했을 때만 의미를 찾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아가서 승자는 죽어도 의미를 찾습니다. 승자에게 의미 없는 일은 없습니다. 호산나를 부른 사람들은 실패한 것 같은 그리스도에게서 승리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승리자인 것을 보는 이들도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베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코프톤’입니다. ‘펴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스트로뉘온’입니다. 이 두 단어가 다 미완료형태의 동사입니다. 미완료란 끝나지 않은 동작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실수록 더 많은 무리들이 계속해서 나뭇가지를 베고 펴는 반복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은 지속적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지속적으로 축하해야 합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주가 주신 능력으로 나는 일어서리라, 원수가 날 향해 와도 쓰러지지 않으리,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주가 주신 능력으로 일어서리”. 예수님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승리를 지속적으로 축하하는 것은 지속적인 나의 승리입니다.  
  
말이 아닌 나귀를 타시고, 승전한 장수가 아닌 예수님이며, 초라한 나사렛 사람이 승리자란 사실을 아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영적 지혜입니다. 예수님을 승리자로 인정하는 우리가 승리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승리할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호산나를 부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작가 루퍼트 부르크가 리버풀을 떠나 항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갑판에 올라선 후 부두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는 다른 사람들을 보자 절실한 고독을 느꼈습니다. 그는 부둣가로 내려가 거리를 배회하는 한 소년을 불렀습니다. “얘야, 너 돈 벌 마음 없니?” “있지요” “그럼 이 돈을 받아라. 그리고 배가 떠날 때까지 여기 서서 나에게 손을 흔들어 다오”. 그는 돈을 주고 자신을 위해 손을 흔들 사람을 산 것입니다. 환영하는 사람 없으면 섭섭하기 짝이 없습니다. 손을 흔들어줄 사람 없으면 고독한 법입니다. 
  
겉옷을 길에 편 사람들, 나뭇가지를 흔든 사람들, 이들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쉽게 오르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도우미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평탄하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그 길을 우리가 도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의 환영과 찬양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위하여 환영과 찬양은 쉬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십자가 길 위하여 그 환영과 찬양은 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옷을 예수님의 그 길을 위하여 그 길 위에 폅시다. 우리의 호산나 찬양을 쉼 없이 예수님께 드립시다. 이런 우리의 순전한 환영과 찬양이 부활의 영광도 함께 얻게 할 줄로 믿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주님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찬양하는 우리 무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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