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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십자가의 고통 (사 53:1~8) - 고난주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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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고통 (사 53:1~8)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를 나누고 주님이 주시는 몇 가지 메시지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의학박사 트루만 데이비스 박사와 알렉산더 메드럴 박사의 자료를 통해서 주님이 감람산에서 기도하시면서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까지 당하신 고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은 감람산에서 시도하실 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던 것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런 현상은 너무 열심히 기도하신 나머지 땀샘에서 땀과 피가 섞여 나온 것입니다. 

의학적 용어로 ‘혈한증’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 땀샘에 있는 모세혈관을 파괴하는 화학성분이 나옵니다. 그래서 소량의 피가 땀샘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심리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극도로 약해져 있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본인이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잡히셔서 희롱과 몰매를 맞으셨습니다. 총독 빌라도의 관정에서는 군사들이 주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 희롱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갈대로 주님의 머리를 쳤으며 손으로 주님을 때렸습니다. 창조주이신 주님이 하찮은 인간들에게 온갖 수모를 다 겪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달리기 전에 태형을 당하셨습니다. 군인들은 기둥에 주님을 묶어놓고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채찍의 구조를 살펴보면 채찍이라기보다는 살인무기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맞으신 채찍은 39개의 땋은 가닥으로 되어있는데 그 안에는 쇠 구슬과 뼛조각이 들어 있습니다. 병사의 기분에 따라 가닥수가 많을 수도 있었습니다. 뼛조각은 살을 찢는 역할을 했습니다. 쇠 구슬은 살을 멍들게 했고, 찢어진 근육조직을 더욱 크게 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채찍에 맞으신 것이 아니라 칼보다도 더 무서운 채찍에 맞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채찍으로 어깨, 등 그리고 엉덩이와 정강이 부분을 주로 맞았습니다.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은 골격 근육이 찢어지고 피범벅이 되었으며 살점은 리본처럼 매달려 있었습니다. 3세기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태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태형을 당하는 사람의 정맥이 밖으로 드러났고, 근육, 근골, 창자의 일부가 노출되었다." 많은 사람은 태형으로 인해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 달리기 전의 상태는 매우 위독한 상태셨습니다. 그 원인은 고통도 고통이겠지만 대부분 저혈량성 쇼크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혈량성 쇼크는 쉽게 말해서 피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저혈량성 쇼크 상태의 증세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심장이 더 이상 피를 못 퍼 올림. ② 혈압저하. ③ 정신이 몽롱해지거나 기절. ④ 신장에 남아있는 피의 양을 유지하기 위해 소변의 역할이 중지 ⑤ 몸에서 액체를 요구하기 때문에 목이 아주 마름. 

오늘 돌려서 만져보는 가시는 꽃꽂이에서 뽑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시는 그보다 더 크고 강하다고 합니다. 찔리면 바로 피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머리를 사람들이 갈대지팡이로 때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가시가 사정없이 예수님의 머리를 찔렀을 것이고 예수님의 머리에서는 피가 흘렀을 것입니다.
채찍이나 가시관으로 인한 고통은 십자가의 고통에 비하면 약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그만큼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가로 들보는 것이 수직 기둥과는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 가로 들보의 무게는 57kg이었습니다. 그 가로 들보를 매고 올라가시는 예수님은 계속해서 넘어지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채찍에 맞으셔서 많은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넘어지면 로마 군병들은 또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예수님은 넘어지면서 턱이 깨지고, 무릎이 상했으며, 얼굴에는 더 많은 상처가 났습니다. 사53장 말씀처럼 사람들이 고개를 돌릴 만큼 흉칙한 모습이 되셨습니다. 신성을 사용하지 않고 인성만 사용하셔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구경하던 구레네 시몬을 붙잡아서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던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에 오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수직 기둥은 땅에 고정되어있고 가로 들보는 땅에 놓인 채 예수를 못을 박았죠. 그리고 못 박은 후 수직기둥에 올려 고정되었습니다. 이 때 주님의 손과 발에 박힌 못은 굉장히 큰 대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십자가에 걸어놓아야 했기 때문에 큰 못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동시대 사람인 요하난 벤하콜이라는 사람의 십자가 처형 당시의 못이 발견 되었는데 길이가 약 18Cm 의 대못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못을 주님의 손목에 못이 박았습니다. 손바닥이 아닙니다. 손바닥에 못이 박혔다면 찢어져 땅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못 박힌 곳은 중추신경이 지나는 위치입니다. 못으로 큰 신경이 파괴 되었습니다. 그 때 고통은 척골신경을 펜치로 비틀어 으깨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팔꿈치가 벽에 부딪혔을 때 팔이 저리면서 굉장히 고통스러운데 그 고통보다 더하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런 고통을 느끼면서 약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있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이 제3시입니다. 그리고 운명하신 시간이 제9시입니다. 여러분! 치과에서 치료 받아보셨지요. 치과 치료를 받을 때 몇 분만 기계로 이를 갈아도 얼마나 괴롭습니까. 온 몸을 움츠리게 되고 몸에서 식은땀이 날 정도입니다. 치과 치료시 겪는 고통은 십자가의 고통과는 비교가 안 되는 고통입니다. 
약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있으시던 주님은 팔이 6인치 정도 늘어났을 것이고, 어깨는 탈골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주님은 고통을 덜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고 그 고통을 다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에게 쓸개 탄 포도주를 먹이려고 했으며, 해융에 신포도주를 묻혀서 먹이려고 했습니다. 해융에 신포도주를 묻힌 것은 받아 드셨습니다. 이것은 신 것이기 때문에 침이 나오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보지만 당시의 그 상황에서는 마치 식초를 마신 것과 같다고 합니다. 쓸개 탄 포도주는 거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쓸개 탄 포도주는 마취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고통을 그대로 다 받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질식해서 죽이는 사형 틀입니다. 근육에 충격이 가해지면서 ‘횡경막’이 가슴의 상태를 숨을 들이쉬는 상태로 고정시킵니다. 이 때 사형수에게 호흡곤란을 가져다주게 되고 결국 숨이 막혀 죽게 되는데 숨이 막혀 죽기까지 6시간 동안 그 고통이 계속 되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있으면 팔에 힘이 빠지고, 근육에 엄청난 경련이 일어나면서, 깊고, 가혹하고, 지근거리는 고통이 따르게 되고, 이 고통이 근육을 굳어지게 만듭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몸을 위로 밀어 올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몸이 팔에 매달려 있게 되면, 가슴근육이 마비되고, 늑간근육이 활동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공기가 폐로 유입은 될 수 있지만, 밖으로 뿜어내 질 수 없게 됩니다. 예수는 단 한 번의 짧은 숨을 쉬어보려고 몸을 위로 밀어 올리기 위한 사투를 하셨습니다. 대못에 박힌 채 숨을 쉬기 위해서 온 몸을 위로 밀어 올릴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예수님은 숨을 쉬기 위해 6시간 동안 못이 박힌 발을 들었다가 놨다가 했을 것입니다. 못이 박혀 발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데도 말입니다.
숨을 쉬기 위해 발을 움직이다가 결국은 근육이 굳어지게 되고 발의 뼈가 못에 고정됩니다. 더 이상 숨을 쉬기 위해서 몸을 위로 들어 올리지 못하면서 서서히 질식을 하게 됩니다. 마침내 호흡량이 줄어들면서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되고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큰 고통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기억하면서 세 가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왜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는 고난을 당하게 하셨는가? 그 이유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요 3:16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죄로 인하여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우리들이 멸망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주님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사 53:6절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드리는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고후 5:17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자신을 대신한 고난으로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성령의 전이 되며, 영원한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갖는 새로운 신분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님 안에서 얼마나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지를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모르고 낮은 자존감으로 살아갑니다. 

심리학자 데이빗 A. 시멘스는 사단이 인간을 유혹할 때 쓰는 방법이 매우 심리학적이라고 말합니다. 마귀는 먼저 우리 마음속에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를 집어넣습니다. ‘나는 무능하다. 나는 아무 쓸모가 없다’라는 생각으로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아버립니다. 우리는 낮은 자존감을 갖게 됩니다. 그 다음에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 ‘내게는 미래가 없다. 꿈도 없다’라며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합니다. 스스로를 절망적인 존재로 생각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는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너는 하나님께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버림받은 자이다’라는 생각을 하도록 합니다. 이처럼 마귀는 믿는 자들에게 낮은 자존감을 갖고 자신과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을 하도록 해서 파괴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사하라 사막에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시내산 가까이 가니 싯딤나무가 몇 백 킬로미터에 한 그루씩 외롭게 서 있었습니다. 싯딤나무는 너무 너무 단단하고 질겨서 톱질을 하면 톱이 휘어지고, 꺾으려 해도 꺾이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쓸모없는 나무, 못된 나무라고 싯딤나무 가까이에는 가지도 않는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싯딤나무로 하나님의 법궤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기는 법궤를 쓸모없는 싯딤나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순금을 입혔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보면 사막에 버려진 외로운 싯딤나무처럼 쓸모없는 사람이고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하나님의 성령을 담는 상자로 삼으시고 순금보다 더 귀한 믿음으로 우리를 입히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얼마나 귀한 존재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복음을 전할 직분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금으로 만든 솔로몬 성전도 마다하신 하나님께서 영적인 면에서 싯딤나무처럼 쓸모없던 우리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 성령의 전, 천국시민권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나는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런 존재’라는 확신 속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셋째,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을 요약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을 두 계명으로 줄이면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사랑하는 삶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밤에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롬 13:10에 보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지난 주일 설교 중에 예화를 들었던 소설가 집사님에게 주님이 원하셨던 것도 “사랑하라”였습니다. 간암말기 진단을 받고 교회에 가서 주님에게 “남은 3개월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기도했더니 마음속에서 “사랑하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인생의 남은 3개월을 가장 의미 있게 보내는 방법은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저는 원수는 아니지만 저를 힘들게 한 사람도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강하게 부은바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학생 선교회 CCC 라는 단체를 이끌면서 한국교회에 영적인 바람을 불게 했던 김준곤 목사님은 사랑으로 수많은 영혼을 살린 위대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김 목사님 가족은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공산당에게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목사님의 눈앞에서 목사님의 부친과 아내가 공산당에게 맞아 죽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목사님도 너무 매를 많이 맞아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그 때 미군 함정이 나타나는 바람에 겨우 위기를 벗어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급기야 김 목사님의 가족을 죽인 공산당원들을 미군들이 잡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빵을 들고 미군에게 찾아가서 공산당원에게 주고, 미군에게 사정사정해서 풀어달라고 하였습니다. 미군이 목사님의 간청에 못 이겨서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산당원들이 산 속에 들어가서 계속 게릴라전을 벌였습니다. 그 때 김 목사님은 성경책을 들고 산 속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공산당원들을 찾아 들어갑니다. 그 결과 그들 공산당원들이 회개하고 돌아와 108명이 모이는 시골교회를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고 사랑으로 갚는 김준곤 목사님의 모습 속에서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끼리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상대의 부족한 점을 이해하고 받아주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멸망 받을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자신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영원한 멸망으로 향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내 가족, 친척, 친구, 이웃을 정말로 사랑하는 것은 그들의 영혼을 주님에게로 인도해서 그들이 영원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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