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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주일] 주님의 잔 (요 1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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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향했습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곳을 너무나도 익숙하게 걸어갔습니다. 습관이 될 정도로 수없이 와서 기도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앞을 밝혀줄 환한 불빛도 달리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여느 때와 같이 기도하기 위해 그곳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제자들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땀이 핏방울과 같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은 깨어서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등과 횃불과 무기를 든 무리들이 당도했습니다. 그 무리들을 데리고 앞장 선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 유다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왜 왔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피하지 않으시고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는 무리들의 말에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셨더니 이 말씀 한마디에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사람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주님은 다시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셨고, 무리들은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거듭 말합니다. 

  주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주님은 자신을 잡으러 온 자들을 대해 숨거나 위장하지 않으시고, 잡히시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아니라 제자들의 안위를 위하셨습니다. 그때에 칼을 갖고 있던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을 칼로 내리쳤습니다. 오른편 귀가 베어져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인데, 본문 말씀의 마지막 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부분은 오늘 본문 말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특별한 구절인데, 이에 앞서서 주님의 잔에 대해 언급된 구절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세베대의 두 아들과 그 어머니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주시기를 구했을 때, 주님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때에 잔에 관한 말씀이 나오고, 그 다음으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잔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주님의 잔에 관한 부분은 성찬에 관한 부분을 제외하고 신약성경에서 이렇게 오늘 본문 말씀을 포함해서 세 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베대의 두 아들에게 말씀하셨던 내가 마시려는 잔,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실 수만 있거든 옮겨달라고 하셨던 잔,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신 그 잔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의 잔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고난의 쓴잔이었고, 곧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순종함으로 받으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는데, 이 시간에는, 주님의 그 잔이 어떠한 잔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면서, 아울러,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주님이 받으셨던 잔은, 첫째로, 피하고 싶으셨지만, 피하지 않고 받으신 잔이었습니다. 장차 다가올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주님이 선택하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간절히 기도하셨는데, 그 기도 내용 중에 하나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잔을 하실 수 있거든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의 고통이 극심한 것이었기 때문에, 완전한 하나님이셨지만, 완전한 인간이기도 하셨던 예수님은 그 육체적 고통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육체적인 고통과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이 두렵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두려워서 잔을 옮겨 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에도 알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로마의 박해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기둥에 묶여 화형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고, 사자에게 물어 뜯겨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톱으로 톱질을 당해 순교하기도 했습니다. 그때에 순교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굳게 서서 마지막 순간에도 찬송하면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순교자들도 그렇게 의연했는데, 하물며 메시야이신 주님께서 고통과 죽음이 두려워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같이 기도하신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아야 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주님은 자기의 죄 때문에 고난 받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셨고, 죄인인 우리들의 죄를 대속해주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들은 죄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죄인들이 당할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은 바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심판을 담당한다는 것은 단순히 죽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당한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대해서는 진노하십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만민의 죄, 우리 인간들이 과거에 저질렀던 죄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전부 지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토록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이 그토록 기도하셨던 것은 죄로 인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단절되어지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동행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까지도 동행하셨던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는 철저히 외면하시고 단절하셔서,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 되는 것에 대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영적인 고민이 주님께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구했던 주님의 기도는 십자가의 육체적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나대신 다른 사람이 지게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나도 엄중한 것이었고, 전 인류의 죄를 담당하는 그 잔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하실 수만 있다면, 십자가가 아닌 다른 구원의 방법이 있다면, 다른 잔으로 죄를 대속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원했지만, 그 잔을 마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아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시면서 그 잔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잔을 피하려고 한다면 충분히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아예 입성하지 않으셨어도 되는 것이고, 겟세마네 동산이 아닌, 가룟 유다가 알지 못하는 곳에 피해 계셔도 됐을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신적 능력을 보여주시면서 십자가를 지지 않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피하고 싶었던 잔이었지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이심을 인정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그 잔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헌신과 우리의 삶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쓰고 쓴 잔, 피하고 싶으셨던 잔도 피하지 않고 받으셨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의 잔을 회피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 주님이 받으신 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도, 우리들은 비켜 가려고만 한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내 시간이 빼앗기고, 귀찮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잔들을 거부해 왔습니까? 쓴 잔을 거부하고 단 잔만을 골라 마셔온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찬송가 150장,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이 찬송의 후렴 마지막 가사는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말로 번역해서 운율에 맞추느라고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이 되지 못하고 있는데, 원 작사자가 표현하고자 했던 그 의미를 찾아서 이를 해석해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낡고 험한 십자가를 붙들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먼훗 날 그것을 면류관과 바꿀 것입니다.” 빛난 면류관을 받기까지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면류관을 맞바꾸는 것입니다. exchange라는 단어를 써서, 면류관은 내가 졌던 십자가와 교환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 우리에게 주신 잔을 우리가 피한다면, 우리 몸은 편할지 모르겠지만, 결코 면류관을 기대할 수는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잔 가운데, 피하고 싶고 무겁고 쓴 잔도 있겠지만, 그럴 때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주님을 우리가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피하고 싶었고,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받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잔을 감사함과 순종함으로 받을 수 있는 우리들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주님이 받으셨던 그 잔은 바로 우리가 받아야 했던 잔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잔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하는 말로 자주 사용되어졌습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여호와의 손에서 그의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라는 말씀과 “내가 너의 손에서 비틀거리게 하는 그 잔, 곧 나의 진노의 잔을 거두었으니”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잔은 곧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아들게 되는 그 대상은 누구입니까? 바로 죄인들입니다.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반드시 임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죄를 범하는 죄인들이었고, 우리의 죄로 인해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잔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받아들었던 그 잔은 바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가 받아야 할 잔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잔을 대신 마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쓴 잔을 대신 받아 마시고, 우리에게는 구원의 단 잔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자주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지식적으로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 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삶에서는 고백이 되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달리셨던 십자가가 원래는 내가 달렸어야 하는 십자가였고, 예수님이 아닌 내가 죽어야 했는데,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는 나의 자아와 욕심을 보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기차 안에서, 흑인 노예와 백인이 싸움을 하게 됐습니다. 흑인 노예는 성질이 난폭한 사람이었는데, 그를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던 백인은 칼을 꺼내들고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칼을 들어서 흑인 노예의 가슴을 찌르는 순간에, 그 때에 마침 옆에 앉아 있던 백인 목사님 한 분이 순간적으로 흑인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어서 날아드는 칼을 손으로 막아냈습니다. 그래서, 흑인의 가슴에는 칼이 꽂히지 않았지만, 그 목사님의 손은 많은 피가 흐르고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자, 흑인 노예는 자기가 칼에 맞았어야 했는데, 자기 대신 상처를 입고 자신을 살려주신 목사님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어디를 가나 내가 노예 생활을 하게 될텐데, 이왕이면 목사님을 모시고 일평생을 바쳐 충성할 것을 다짐하면서 나를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의 소원대로 그 흑인 노예는 목사님과 같이 살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흑인 노예는 워낙에 인생을 거칠고 난폭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좀처럼 그런 옛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순종하겠다고 하면서 따라왔지만, 자꾸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고집을 부리면서 성실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 은혜를 다 잊어버리고 제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면, 그 목사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손을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흑인 노예를 구하기 위해서 다친 손의 칼자국을 가만히 보여주면, 그럴 때마다 다시 한 번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순종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흑인 노예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죽어야 했는데, 대속의 은혜로 살게 됐으면,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텐데, 그 흑인 노예처럼,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여전히 옛 사람이 살아 있어서,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이 받으신 잔은 바로 우리가 받아야 했던 잔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목사님의 칼자국을 바라보듯이, 우리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던 것은 바로 나였고, 내 옛 사람이, 내 정욕과 욕심이, 내 자랑과 교만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는 주님 안에서, 주님의 그 은혜로 사는 자임을 입술의 고백이 아닌, 삶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 나 대신 쓴 잔을 받으시고, 내게 단 잔을 주신 그 은혜를 기억해야 참다운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잔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받으신 잔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혀 가셨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틀린 표현입니다. 주님은 잡혀 가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당당하게 나아가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길이 아버지께서 주신 잔임을 분명히 알고 계셨고, 자기를 부인하고 굳게 결심하신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겉으로 보기에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간계와, 가룟 유다의 배신, 빌라도의 재판에 의해서 죽으신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주님이 스스로 택하신 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주님은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십자가의 잔을 하실 수 있거든 지나가게 해달라고 했으니까, ‘예수님은 억지로,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겟세마네에서 드린 예수님의 기도는 “그러나”의 기도였습니다.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는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는 것이 핵심인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들어가면서, 그 이하의 내용에 비중이 담긴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기도로 종결되어졌고, 주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왜 그 고난의 잔을 기꺼이 받으셨습니까?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의 길이었기에, 그 고난의 길도 우리 주님은 기꺼이 걸어가셨습니다. 혹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냐고 절규하면서 고통 가운데 죽으셨다고 하지만, 저는 어느 목사님의 설교가 인상 중에 남아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느냐면, “예수님은 결코 고난 중에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행복하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 순간에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기쁨에 너무나도 행복해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예수님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해 보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십자가의 그 말할 수 없는 고통 중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을까... 도대체 얼마나 큰 사랑이기에, 고난마저도 행복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존Q”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002년에 제작이 된 영화인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평범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한 흑인 노동자 가정이 있었는데, 어느 날 열 살 정도 되는 아들이 심장병으로 갑자기 쓰러지게 됩니다. 아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심장 이식 수술을 받는 것인데, 그 수술 리스트에 올리려면 7만 불을 내라고 합니다. 수술비는 총 25만 불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 돈을 구해 보지만,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결국은 권총을 들고 병원 의사를 인질로 잡게 됩니다. 인질극이 벌어진 가운데, 그 일이 전파를 타고 전국에 방송이 되어졌습니다. “아들아, 잘 지내고 있니? 아빠가 너를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내가 분명히 약속할게. 너를 꼭 살리고 말거야.” “아빠! 나는 아빠를 믿어요.”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내용도 전국에 방영이 되어졌습니다. 

  대책이 없는 가운데 경찰에서는 저격수를 보내서 일을 마무리 하려고 하는데, 아버지는 드디어 결심하고 의사에게 이야기합니다. “아들을 살리는 방법은 한 가지 방법밖엔 없는 것 같다. 나는 돈이 없지만 당신이 도와주면 가능한데, 내가 권총으로 자살할테니까 내 심장을 꺼내서 아들에게 이식시켜 주라.”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는 자기가 죽겠다고 하면서 시술대에 눕습니다. 그러자, 감동을 받은 의사가 자신의 명성과 재산이 다 무너져도 당신을 도와주겠노라고 합니다. 결국, 기적적으로 병원 당국자에 의해서 마침내 아들은 수혜자의 명단에 올라가게 됐고, 극적으로 살아날 수가 있었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개봉된 후에 과연 이와 같은 일이 정당한 일인가 하는 논란도 있었지만, 여기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자신은 범죄자가 되고, 자기 심장을 꺼내서라도 아들을 살리고자 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아들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아버지는 자신의 심장이 꺼내졌더라도 행복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사랑,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고, 그 큰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남을 용서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얼마나 힘쓰고 있는지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용서 못할 사람이 있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기억하고, 나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것을 기억하면서, 사랑하고, 용납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받으신 잔은 이렇게 ① 죄인인 우리가 받아야 했던 잔이었지만 주님이 대신 받으신 잔이었고, ② 피하고 싶으셨지만 피하지 않으시고, ③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기꺼이 받으신 잔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의 잔을 받으신 주님의 그 은혜와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모습은 명확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의 잔을 우리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지고 가고,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전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고난주간을 지키고 있는 우리들 모두가 주님의 그 대속의 은혜와 사랑을 되새기면서, 주님께 감사드리고, 십자가 아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새로운 결단 가운데 나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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