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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 (요 16: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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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승리하신 예수님 (요 16:32∼33)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지역예선전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지난 1일 저녁에는 대한민국과 북한이 서울에서 시합을 했습니다. 대한민국이 1:0으로 이겼습니다. 그런데 한 민족끼리 축구시합을 한다는 이 사실이 세계인들의 주목거리였습니다. 그것도 정치적으로 적대국가여서 그 관심은 더 높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본질적인 축구시합 외에도 신경전을 펼쳤습니다. 기자회견을 하는데 기자가 북한이라고 불렀다고 북한 팀 감독이 자기네 나라는 북한이 아니라 조선인민주의공화국이니까 그렇게 정확하게 불러달라고 아주 기분 나쁘게 그럽니다. 그리고 또 양쪽 감독이 서로 이기겠답니다.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는 각오를 각각 밝혔습니다. 

응원하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왕 하는 거면 반드시 이기라고 응원합니다. 가끔씩은 왜 한민족끼리 저래야 되나 싶을 때도 있지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엊그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시합에 이기고 나도 항상 씁쓸함이 남는 것이 남북한전입니다. 하여간 스포츠를 전쟁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이런 문제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철학자[야스퍼스]는 “싸움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싸움이라는 것은 운명적 상황이라는 겁니다. 원치는 않지만 부득불 싸워가며 살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숙명 적 존재가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평생을 어떤 형태로든지 싸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먼저는 자연과 더불어 싸워야합니다. 추위와 싸워야 하고, 때로는 더위와 싸우고, 홍수와 싸우고 가뭄과 싸우고, 그리고 지진과 싸우고, 무서운 바람과 많은 재난 사건들과 싸워야 합니다. 하다못해 요즘은 황사와 싸우다시피 합니다. 그러고 보면 단 하루라도 자연이 순하게 넘어가는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런 자연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한은 싸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또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불가피한 싸움이 있는 것을 압니다. 나라끼리 총을 들이대는 직접적인 전쟁을 차치하고라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서두에 말씀 드렸던 스포츠 등을 통하여 팽팽한 긴장과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온 세계가 싸움 속에 긴장하고 있고 그 속에서 굳게 서서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하는 이것이 곧 하나의 싸움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더 무서운 싸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때로는 자기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하고, 죄와 정욕과 욕심과 자존심과 시기와 질투들과 싸워야 합니다. 알고 보면 사실은 이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치열한 것입니다. 어느 하루도 자신과 싸우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 아닙니까? 모르긴 해도 오늘만 해도 그럴 것입니다. ‘자, 이거 아침에 일찍 일어나 교회를 가야하나 마나’로부터 시작해서 갖가지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우리는 모두 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최소한의 싸움을 싸우면서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싸움에서 이겨서 이 시간에 여기 나온 사람은 그 마음이 평안이지만 싸움에 패배자가 되어서 아디 다른데 가 있는 사람의 마음은 지금도 편치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서 싸움에서의 승리란 결국 무엇이냐 하면 평안입니다. 평안해야 이긴 겁니다. 내가 분명히 이겼다고 생각하는데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없단 말입니다. 오늘 이 예배에 나오지 않고 다른데서 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결과라고 생각한다 합시다. 그리고 자기는 그 결과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이게 이긴 겁니까? 승리한 것이냐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겼다는 것이 정복의 개념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승리를 생각할 때 그 개념을 남을 죽이고 내가 사는 것이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힘의 대결에서 누군가 하나가 무너지고 내가 딛고 올라서야만 승리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인데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진정한 승리라고 하는 것은 함께 사는 것입니다. 남을 누르고 즐기는 것이 아니고 화목하고 더불어 기뻐하는 거기에 참 승리의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때로는 내가 지는 것 같지만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공존하는 승리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승리란 누군가를 미워하는 만큼 힘으로 돌려주고 스스로 통쾌하게 여기는 그런 잔인한 승리가 아니라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참 승리라는 것은 재능과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권세도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환경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승리라는 것은 자세의 문제입니다. 어떤 자세로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 거기에 진정한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중요한 승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리하신 의미가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 난 다음에 곧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십자가를 지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것이 곧 십자가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눈앞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지만 십자가 지실 것을 알고 계십니다. 

본문32절을 보면 곧 그 십자가를 져야 할 때임을 말씀합니다.“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당신이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과 제자들이 다 도망할 것까지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나귀를 타고 들어오십니다. 당시에는 왕이 대관식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대통령 취임식 같이 왕으로서의 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식이 나귀를 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것이 스스로 이미 왕처럼 승리하셨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결코 세상에 패배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임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것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것이 요12장에 나와 있고요 그리고 오늘 본문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만찬을 나누면서 몇 시간 후면 십자가를 져야 할 것을 아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33절입니다.“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먼저 승리를 선포하고 그리고 최후 승리를 향해서 나가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의미의 승리에 대한 선포입니까?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하시는 모습을 기억합니다. 얼마나 큰 고민과 싸웠습니까? “민망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실 만큼 어지러웠던 자신과의 싸움에서 곧 바로 승리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결심하십니다. 이 결단을 이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뿔뿔이 떠날 것을 아시고 인간적으로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배신 아닙니까? 사람이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 이마저도 아셨습니다. 인간의 세계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임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누가 내 곁에 있겠느냐?’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해답을“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느니라.”는 말씀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순간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그러니 너희도 담대 하라.”는 말씀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십자가로 승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일 앞에서도 그리스도인들만의 해결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때로 손해입니다. 희생입니다. 겸손입니다. 자기부인입니다. 십자가는 곧 자기욕망의 포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곧 승리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님의 승리를 믿는 우리들이라면 예수님의 그 승리방식도 받아들여야합니다. 

[본 훼퍼]라는 신학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만한 이유가 없는 분이신데 왜 어떻게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을까를 세 가지로 해석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초월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자기라는 우상을 초월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살고 죽는 건 상관없이 생명을 깨끗이 잊어버리신 분이 예수님이요, 그것이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은 업적을 초월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답니다.‘내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되나?’,‘내가 죽고 나면 그동안에 해온 사업이 무너질 텐데...’그러나 예수님은‘내가 떠난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인가 제자들은 어떻고 교회는 어떻고..’생각 안했습니다. 내가 떠나면 아무 것도 안 될 것이라는 업적에 대한 우상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은 명예에 대한 우상을 초월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명예에 목매고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의 인격에 대한 평가가 중요합니까? 명예에 대한 평가가 중요합니까? 

여러분, 내가 죽고 나서 내 인격을 아까워하며, 내 신앙에 대해 두고두고 아쉬워하며 기억 속에 묻어 두며 마음의 눈물을 흘려 줄 사람이 필요합니까? 아니면 죽을 때까지 명예의 끈에 묶여 끌려 살다가 마지못해 인사치레나 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까? 깊이 한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제발 인격이 바탕이 되지 않고 더군다나 신앙도 없는 명예 따위는 잊어버립시다. 사람이란 기본적인 욕망이 있어서 명예라고 생각되는 순간 질투가 생기게 되고 질투와 시기에 빠지면 원수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감옥에 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렘브란트]는 많은 자화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여러 작품 속에 자기 얼굴을 직접 그려 넣었습니다. <순교자 스데반>이라는 작품에서는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지는 성난 군중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신을 그렸고,<빌라도의 법정>이라는 작품에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치던 유대인 패거리 중에 한 사람으로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돌아온 탕자>라는 유명한 작품에는 자신의 얼굴을 탕자의 모습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렘브란트]는 그 그림 속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나도 거기에 있었어요.”라고....그는 아버지를 등지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의 심정으로, 그리고 복음을 부정하던 살인자의 부끄러움으로 주님에게 다가서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묵상할 때 그런 죄인의 심정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십자가의 승리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였는데 우리는 하루에도 수 천 번씩 무너지고 있습니다. 내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 승리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내 욕망을 내려놓지 못해서 실패를 거듭하며 살아갑니다. 세월이 지나가는데 헛된 명예를 아직 버리지 못하고도 용케도 하루하루를 견뎌가고 있습니다만 언제 실패할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런 모습으로는 도저히 안 됩니다. 십자가에 승리하신 주님이 우리역시 담대하게 세상을 이기라 하시는데 감히 그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고 하기에 차마 부끄러운 모습으로는 더 이상 안 됩니다. 더 적극적으로 십자가에 승리하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심장이 쿵쾅거려야하고 그 십자가 밑에 서 있는 우리의 가슴에는 세상을 이길 지혜를 구하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승리하신 주님께서 최후 승리를 위해 나가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세상을 향하여 담대하게 승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종려주일과 아울러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는 고난주일을 맞이하며 주님의 십자가 고난이 결코 고난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 승리를 위한 것이었음을 깊이 생각하며 십자가로 세상을 이기는 고난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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