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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순종은 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이루는 길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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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은 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이루는 길 (마 21:1~11)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기다렸다. 자신들의 삶에서 진정한 구원을 가져다 줄 구원자를 기다렸다. 나라를 잃고 폭정과 이방 족속들의 발굽 아래 밟히며 살던 그들은 더욱 더 메시야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는 정치적 구원자였다. 로마의 통치 아래 세금을 빼앗기고 헬라의 통치 아래 성전을 더럽히고 바벨론에 예루살렘이 불타버린 비극의 역사 속에서 새 왕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은 더욱 더 깊어만 갔다. 그들은 어서 속히 구원이 도래하길 원했다. 그러나 민중들의 기다림은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를 기다리지 않았다. 수세기 전 스가랴 선지자는 구원을 베풀 왕에 대해 슥9:9에 이렇게 예언하였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주님은 지도자들과 민중들의 마음을 알았다. 도시의 사람들과 시골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았다. 그들은 모두 메시야를 기다리지만 다윗 왕처럼 힘 있는 인물을 기다렸지 메시야가 나귀 새끼를 타고 임하실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민중들이 무엇을 요구하든지,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무엇을 요구하든지 메시야는 나귀를 타고 오시는 분이셔야 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려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신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나귀를 끌고 올 것을 지시하신다. 이는 진정한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시는 지시이다. 나귀를 끌고 오라는 이 지시 속에는 뜻이 있다.

1. 예언된 말씀에 대한 주님의 순종하는 모습이다. (마21:4)

마21:4을 보면,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주님은 선지자보다 못하신 분이 아니다. 주님이 뛰어나심은 모세, 엘리야, 여호수아 등 그 어떤 선지자보다 탁월하시다. 그러나 그가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려는 것은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과 구원의 뜻을 역사를 통해 계시하셨다. 그러나 선지자를 통해 계시하셨다. 히1:1을 보라.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고 기록한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전부를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이 나귀를 끌어오도록 지시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그는 분명히 왕이지만 왕으로, 통치자로, 심판자로서 예루살렘에 임하지만 자신은 짐도 끌어보지 못한 나귀 새끼를 타야함을 받아들였다. 이 얼마나 잘 맞는 말씀인가? 나귀도 아니고 나귀 새끼를 탔다. 

군마를 타고 호령하는 왕, 기세가 등등하여 위엄을 보이는 왕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귀를 탔다. 말씀을 이루기 위해 순종하는 예수님은 자신을 민중들에게, 관리들에게, 주목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신다.

① 나는 겸손한 왕이다.

나귀 새끼를 타시는 예수님은 미천한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보여준다. 겸손한 왕, 그는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예언대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의 모습인 것이다.

② 나는 공의의 왕이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정의다. 정의의 균형을 위해 주님은 섬기는 모습이 되시려 작은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이다. 나귀 새끼는 군림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③ 나는 평화의 왕이다.

나귀는 전쟁용이 아니다. 일상 생활에서 짐을 나르고 주인의 생계를 돕는 가축이다. 나귀의 뜻은 평화다. 슥9:10의 예언처럼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평화를 가져오실 왕이시기에 예수는 군마를 버리고 나귀 새끼를 탄 것이다.

④ 나는 심판의 왕이다.

나귀를 타신 주님은 세상의 왕들을 심판한다. 세상의 제도를 심판한다. 어떤 면에서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세상의 가치관에 대해 코미디극으로 심판한다. 세상 왕은 멋진 천리마를 탄다. 그런데 주님에겐 엉뚱한 면이 있다. 하늘의 왕으로서의 주님은 땅의 가치관과 세상의 질서에 대해 거부하신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예수는 너무도 놀라운 심판을 행하신다.

① 마21:12~13 - 성전을 정화하는 심판, 기도와 예배가 실종된 것에 대한 심판
② 마21:14~17 - 제사장들의 대한 심판 (어린 아이들과 같은 찬양이 없음에 대한 심판)
③ 마21:18~22 - 무화과나무에 대한 심판 (열매 없는 유대교에 대한 심판)
④ 마21:23~27 - 영적 지도력에 대한 심판 (정직이 사라진 것에 대한 심판)

시온의 딸들에게 이르신 메시야답게 예수는 심판의 왕이 되셨다. 그 분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이기에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임하셔서 시온을 정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대한 순종이다. 
  

2. 주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순종이다. (마21:6)

마21:6을 보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사실 제자들은 걱정이 되었다. 주님은 나귀를 끌어오라 하셨지만 나귀 주인이 허락지 않으면 어떡할 것인가? 그러나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는 주님의 말씀 하나 믿고 벳바게 맞은편 마을로 갔다. 감람산 동쪽에 위치한 벳바게에 가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온 이 순종이 말씀을 이루어 드린 예언의 성취가 된 것이다. 

우리는 핑계될 만한 여건들이 많다. 그러나 주님이 필요하셔서, 주님이 쓰셔야 하겠기에 요구하는 것이라면 순종해야 한다. 맞은편 마을에 매여 있는 나귀가 있다고 하셨으니 의심 말고 가야 한다. 풀어서 끌고 오라 하셨으니까 거기 나귀가 준비되어 있는 줄 알고 가야 한다. 주님의 바라보는 눈,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방법, 주님이 지정해 놓으신 장소, 주님이 말하시는 것을 순종하는 것이 옳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아니 순종해 보면 무릎을 칠 만한 까닭과 결과를 보게 된다. 주님이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했을 때 제자들은 순종하므로 인생이 달라졌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순종하므로 인생이 달라졌다. “성령을 기다려라.”는 말씀에 순종하고 사모하므로 인생이 달라졌다. 

오늘 제자들은 나귀와 그 새끼를 끌고 오는 일에 순종하므로 예수님이 메시야이시고 겸손과 공의와 평화의 왕임을 시위하게 하셨다. 나는 미처 잘 몰라도 순종하는 거기에 말씀을 이루게 하는 섭리가 있고 쓰임 받는 인생이 된다. 
  

3. 제자들의 말씀에 대한 나귀 주인의 순종이다. (마21:3)

마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이 말씀은 막11:5~6에서 이렇게 쓰여 있다.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상황을 살펴보면 나귀를 기른 주인이 주가 쓰시겠다고 해서 허락한 것을 알 수 있다. 나귀 주인은 언제, 어떻게 주님을 알고 있는지 모른다. 주님도 이 나귀 주인이 벳바게 마을 맞은편에 언제부터 나귀를 기르며 사는 사람인 것을 알고 있는지 비밀일 뿐이다. 그러나 분명 주가 쓰시겠다 할 때 나귀 주인은 그대로 내어주었다. 이름도 없는 나귀 주인이지만 그는 실로 제자 중의 제자다. 주님이 쓰셔야 된다는 제자들의 전하는 말씀 앞에 삶의 재산을 내어맡긴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역사는 언제나 유명인에 의해 굴러가는 것이 아니다. 지체 높은 이들을 통해서 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주님의 계획과 의도가 분명하다면 전해주는 말씀 앞에 순종하고 내어맡기는 헌신이 있다면 일어난다. 그 사람이 무명의 사람이든지 유명의 사람이든지 상관이 없다. 말씀이 전해지면 나귀를 기른 주인처럼 주님을 위해 맡겨드리는 순종을 하자. 예언의 성취를 위해 쓰여진 인생이 되는 것,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큰 상이 있겠는가? 

피아니스트 김애자, 그는 재능을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사용했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오케스트라 협연을 할 때 자신의 재능에 기름 부으심을 체험하고 그때부터 자신의 재능을 주님께 드리고 내어맡긴다.

속회연구원에서 같이 일하는 최이우 목사, 그는 광림교회 부목사 시절 교회의 지붕 건축을 위해 찾아온 후배에게 아내가 모아둔 성지 순례 비용을 빌려준다. 아니 주님께 드렸다. 그는 그 후 안산 광림교회를 개척할 때 그때 빌려드린 돈의 100배의 축복으로 교회 개척을 광림에서 다 해주고 예배당도 다 준비된 곳에, 교인도 있는 곳에 담임자로 부임하게 되었다. 창립 예배를 드리는데 ‘복 있으라’는 찬양대의 특송과 함께 생각이 교차되는데 자신이 주님께 드린 것에 100배로 되돌려 주셨더라는 것이다.

하와이 코나에서 만난 맥클랑, 그는 대학교 2학년 때 열심히 일을 하여 해외 선교 여행비를 모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후원비로 드리라는 음성 앞에 고만하며 ‘제가 가야 되요’라며 망설이는데 그 후원비를 드린다. 그 후원비를 받은 아이는 고등학생인 셀리였다. 돈이 없어서 단기 선교를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아버지가 선교 여행을 허락했는데 셀리는 끝까지 하나님이 가게 하신다고 기도하다가 후원금을 받는다. 그 선교팀은 사모아 섬의 300명의 사람 중 150명이 예수를 영접하고 그들의 추장도 믿게 되는 선교를 하였다. 그 믿게 된 사람들 중심으로 큰 교회가 생겼고 이 일을 통해 맥클랑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고 그 뜻을 분멸하는 것이 옳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일평생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고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는 복을 교훈으로 얻었다. 물론 그 셀리 양은 지금 맥클랑의 아내가 되었다. 순종하여 복에 복을 받은 것이다.

맡겨 드림, 그것이 어려운 것이다. ‘내 것인데, 내가 공을 들였는데, 내가 어떻게 모은 것인데, 내가 어떻게 고생했는데...’라는 생각에서 탈출하자. 크게 생각하고 ‘하나님, 주님, 성령님이 쓰신다고 하시는데...’라며 맡겨 드리자. 순종으로 맡겨드리는 순간, 불평과 반항이 사라진다. 순종으로 맡겨드리는 순간, ‘안된다. 무슨 소리냐.’가 사라진다. 그리고 구원의 사역에 동참하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쓰여지게 된다. 

종려주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그 사건에는 오직 순종만이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주님의 순종, 주님에 대한 제자의 순종, 제자의 사역에 대한 나귀 주인의 순종, 순종이 진정한 메시야, 평화의 왕 예수를 드러냈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외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진정한 구원을 바라는 이들에게 주님은 세상의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니고 천국의 왕으로 오신 분임이 알려진 것이다. 의와 희락과 기쁨을 주는 왕, 마음으로 모셔야 할, 그분을 위해 겉옷을 벗어 길에 놓고 나뭇가지라도 베어 길에 펴는 백성이 되자. ‘그가 누구냐?’고 묻고 소동하는 예루살렘 성읍 사람이 되지 말자. 흙길을 밟으며 나뭇가지를 펴든 순수한 사람들이 되자. “호산나, 호산나 진정한 메시야!” 나를 정말 구원하는 자로 예수를 환영하고 높여드리는 종려주일이 되자. 

'우리를 구원하소서. 호산나! 나와 나의 가정을 구원하소서. 호산나!'

이 외침과 기도가 일주일간 계속되고 응답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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