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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어린 나귀를 타신 왕 (요 12: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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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귀를 타신 왕 (요 12:9~19)

   
예수께서 베다니 시몬의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다른 동네에도 들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만 보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다시 살리신 그 나사로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굴 무덤에 안치된 시신이 일어나 다시 살고 있다고 하니 정말 그런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소문은 일반 유대인들에게만 들렸겠습니까?   유대인의 종교 지도자들의 귀에도 전달이 되었습니다.   점점 커지는 나사렛 예수를 두려워하고 더 큰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예수를 체포하여 죽이려고 계획하던 대제사장들이 이번에는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를 하였습니다.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인 직접 찾아가서 예수를 믿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예수를 이대로 방치해두면 온 이스라엘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며 사람들을 미혹하고 선동하여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날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지금도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함부로 체포할 수 없는 형편인데 그 세력 규모가 더 커지면 언젠가는 자기들의 자리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 지금 예수의 능력을 만 천하에 소문 내고 있는 산 증인 나사로마저 죽여 없애야 후환이 없으리라는 무서운 음모였습니다.

그 이튿날, 즉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잔치가 열린 다음 날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잔치 자리에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씻어 예수님의 장례식을 준비한 그 다음날의 일입니다.   유월절이 닷새 남은 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문이 들리자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를 맞이하러 나왔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일정은 일사천리로 착착 진행 중이었습니다.  

4복음서가 이 사건을 모두 기록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에는 생략이 된 내용이 다른 복음서에서 자세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가까이 감람산 벳바게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에 주님은 두 제자들에게 심부름을 시키십니다.   맞은 편 마을로 가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어린 나귀가 매여 있는 것을 보거든 그 나귀를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왜 이리 하느냐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십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대로 하여 어린 나귀를 끌고 왔으며 예수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까지 들어가십니다.  

전에도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적이 있지만 한 번도 이런 광경을 연출하신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특이한 행동을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마태와 요한은 이 일이 구약의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9장9절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는 예언이 있습니다.   요한은 제자들이 처음에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다가 나중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이고 사람들이 이렇게 환영한 것인 줄 생각났다고 기록합니다.   

제자들이 어린 나귀를 예수께 끌어오자 다른 제자들은 자기의 겉옷을 나귀 위에 걸쳐 예수를 태우고 갑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자기 겉옷을 길에 펴고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며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환영하였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와 주님을 맞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대추야자 열매나무로 알고 먹는 종려나무는 승리의 상징이요 아름다움과 번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호산나 찬양하며 예수님을 맞이한 것을 기념하여 오늘날 교회들이 부활주일 한 주 전 주일을 종려주일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날 유대인이 부른 호산나 승리의 노래는 자유와 해방의 명절 유월절에 옛날 선지자 모세를 통해 히브리 조상들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의 구원이 오늘날 예루살렘에서 다시 한 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부르는 찬송이었습니다.   그들이 부른 노래와 구원의 소망은 비록 그들이 현실적으로 갈망했던 방식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노래와 환영은 찬송 받으실 왕을 향한 정확한 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은 죄와 사망의 굴레에 매여 절망하는 사람들을 그 죽음의 권세와 사슬에서 풀어주시려 오신 평화의 왕이셨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표적을 예루살렘의 무리들에게 증언하였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러 온 예루살렘의 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왕으로 열렬히 환영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였습니다.   한편, 가능하면 빠른 시일 내에 예수를 체포하려던 바리새인들은 나사렛 예수를 향한 군중들의 환호소리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지는 인기를 보고 낙심하였습니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저를 좇는다!’    이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였던 사건을 기록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종려주일을 맞이한 우리들은 어떤 자세로 주님을 고백하고 그의 제자로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 담긴 말씀의 뜻을 생각하고 부활주일을 한 주 앞둔 고난주간을 주님과 함께 의미 있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나사로 까닭에’ –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은 사망과 생명의 차이가 무엇인가 분명히 보이신 주님의 표적입니다.   죽음이 세상에 가져다 주는 슬픔과 절망을 이기고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남이 주는 기쁨과 감격이 무엇인가를 나사로와 그 남매들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표적을 통해 자신도 역시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 것을 예고하셨고, 사람들로 하여금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다는 소망을 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죄의 형벌로 죽음을 향해 갑니다.  세상에서 짧은 인생을 살다가 모두가 죽음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물론 나사로의 부활은 영원한 부활이 아니라 잠시 생명을 연장 받은 다시 삶이었습니다.  그도 후에 다시 죽어 무덤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들 앞에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와 살게 하시는 표적을 보이심으로 예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는 세상에 생명을 주러 오신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은 생명을 주러 오신 예수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게다가 예수께서 다시 살린 그 고귀한 생명마저 죽이려고 무서운 음모를 꾸밉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종교적 입지를 굳히는 일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생명을 가차 없이 빼앗으려는 두려운 살인자들이었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희생하여 사람을 살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남을 짓밟고 올라서 내가 살기 위하여 남을 죽이는 자들이 있습니다.   나는 어느 쪽에 속한 사람인가요?   주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남을 위하여 나를 내어주는 사람인가요, 대제사장들처럼 나를 위하여 남을 이용하고 끝내는 그 생명까지도 요구하는 사람인가요?   나는 영혼을 살리는 자입니까 죽이는 자입니까?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 예수께서는 두 제자를 마을로 보내시며 혹시 나귀의 주인이 왜 이러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합니다’는 말만 전하면 주인이 허락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여기 주님이 왕으로 행차하시는 일에 말 없이 협력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제의 잔치에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처럼, 예수께서 쓰시겠다고 하니 어린 나귀를 기꺼이 보내드리는 사람처럼, 조용히 섬기는 일군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왕 되심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겸손한 왕으로 오신 주님과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 사람들의 모습에 화려한 꾸밈이나 어색한 몸짓도 없고 마지 못해 끌려 다니는 사람도 없습니다.  길거리에 나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찬송하는 사람들 역시 누가 강제로 동원하여 길가에 세워 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다 즐거움으로 기꺼이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주의 참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생명의 주, 영광의 왕이 오시기를 기다리며 그 왕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어린 아기로 오실 때도 이스라엘의 왕궁의 사는 사람들이나 귀족과 제사장, 장로들이 아니라,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먼저 찾아와 경배하였고, 멀리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아기를 찾아와 경배하였습니다.   

유월절 큰 명절에 왕으로 행차하시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의 행차에 길거리로 나와 노래하며 맞이한 사람들은 역시 평범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며 메시야의 오실 날을 기대하던 서기관들도 아니었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수종 들던 대제사장들도 아니었으며,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고 경건한 믿음생활을 한다고 자부하던 바리새인과 장로들도 아니었습니다.   이름없는 순례자들, 그리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린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에게 모든 소망을 걸고 가슴이 벅차있는 이스라엘의 평범한 시민들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러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자신을 죽음에 넘김으로 생명을 주러 오신 왕이셨습니다.   이 세상에 백성을 희생시켜 왕의 자리를 지키는 왕은 많았지만, 자신을 희생하여 백성을 살리는 왕을 보았습니까?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호화로운 왕궁에서 호의호식하는 왕은 있지만, 자신의 몸을 생명의 양식으로 내주어 가난한 영혼을 살리고 먹이시는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남을 희생시키고 자신이 높은 자리에 올라서려는 사람이 많은 세상입니다.   권력을 악용하여 불법을 저질러 국가와 사회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그 죄악상이 만천하에 드러난 후에도 소위 몸통은 다치지 않고 힘 없는 깃털들만 붙들려 책임을 지고 희생하는 것으로 은근슬쩍 마무리 짓는 세상입니다.   자기 목숨을 담보로 백성들의 생명을 살리는 왕을 어디서 만나보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그 일을 하시려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지금 나의 왕으로 임하여 나의 삶을 주관하고 계시는지요?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자신의 위엄을 보이려고 화려한 치장과 과장을 합니다.   사람들을 거느리기 좋아하고 높은 말을 타고 위엄을 보이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평화의 왕으로 겸손을 보이셨습니다.   오늘날 강대국의 대통령들이 특별히 제작된 전용 자동차를 이용합니다.  이번에 런던에서 모인 G20 정상들의 전용차량과 전세 비행기 등은 최첨단의 기능과 장비와 보호 시설을 갖추어 저마다 위용을 과시하였습니다.   

신문에 보니 지난 주간 런던에서 열린 G20 금융정상회담에 참석한 미국과 러시아의 대통령들이 타고 다닌 전용 자동차에 대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야수’라는 별명이 붙은 미국 대통령 전용차는 차체와 유리를 방탄 처리했고, 화학무기 공격을 대비해 완전 틈새를 막았으며, 타이어가 펑크 나도 안전하게 달릴 수 있도록 만들어진 특수차량입니다.    큰 덩치와 생긴 것이 좀 못나서 이름을 ‘야수’라고 했을 뿐이고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차라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러시아 대통령이 영국 방문 때 가져온 차는 러시아 말로 ‘하마’라는 별명을 가졌는데 미국 대통령 차 ‘야수’보다 한 술 더 떠서 무게가 16톤이나 되는 특수차량이라고 합니다.   로켓포 공격은 물론 소규모 핵 폭탄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된 차라고 하니 그 기능이 어마어마합니다.   미국 대통령 차가 30만 달러라고 하지만 러시아 대통령 차는 무려 6천만 달러짜리라고 하니 두 나라가 이런 면에서도 서로 자존심 대결을 벌이고 있습니다.   

시대가 다를 뿐 고대 로마시대 장군들이나 왕들도 얼마나 화려하고 보안을 철저히 하며 행차를 했을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대단하고 화려한 퍼레이드에 비하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평화의 왕은 초라하기 그지 없는 모습입니다.   초라하다 못하여 우스꽝스런 광경이 아닙니까?   그래도 왕의 행차를 생각했다면 제대로 된 말 한 마리라도 빌려 타고 오실 것이지 멀쩡하고 건장한 젊은이가 어찌 아이들 놀이처럼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느냐는 말입니다.   

하기야 건장한 말을 하나 빌려 타고 들어오셨다고 한들 볼품 없는 복장에 변변한 준비도 하지 못한 제자들이 무슨 멋진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모양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선지자의 예언대로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심으로 평화스런 광경이 돋보였을 것입니다.   말은 전쟁과 싸움의 상징이지만 어린 나귀는 평화의 상징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글을 이루시려는 의도가 거기에 담겨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제자들이나 사람들이 그날 그 자리에서는 그 점을 깨닫지 못했다가 나중에야 이것이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심인 줄 알았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나사로 까닭에 예수를 믿는 자들이 많아지고 그 소문으로 예수를 환영하러 나온 군중들이 길을 가득 메웠습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고 소리 높여 노래하였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을 기대하고 옛날 다윗 왕국의 영광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능력을 가진 분이라면 분명히 우리의 왕이 될 자격이 있는 분이라 확신하고 나사렛 예수를 억지로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순전히 정치적 왕을 기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람들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주님을 왕으로 맞이함으로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는 일에 동참하였습니다. 

오늘 주께 드리는 우리의 찬송에는 어떤 기대가 담겨있는지요?   그분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애창하는 최용덕 님이 지은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이라는 복음송이 있습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 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 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 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순 없을까 남을 위하여 당신들의 온몸을 온전히 버리셨던 것처럼 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 값없이 거저 주는 사랑 그러나 나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 더욱 좋아하니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이 찬송의 가사에도 언급되었습니다만 남을 위하여 자신의 온몸을 버리셨던 주님처럼 주님을 닮아 사는 것이 나의 소망이라고 입술로는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남을 위한 사랑보다는 내가 받을 사랑을 먼저 계산하고 있는 나는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주님을 나를 위하여 그렇게도 낮아져 주시고 자신을 버리시기까지 하셨는데 그의 사랑을 받은 나는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 살펴보는 한 주간이 되기 바랍니다.  

종려주일, 고난주간을 시작하면서 겸손한 왕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찬양합시다.  다시 오실 그 분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이번 고난의 주간을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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