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우리를 위한 고난 (요 19:17~24, 8:32) - 고난주일 -

  • 잡초 잡초
  • 246
  • 0

첨부 1


우리를 위한 고난 (요 19:17~24, 8:32)


고난주일을 맞이한 이 시간“예수님의 고난은 누구를 위한 고난인가?”라는 제목의 말씀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처참한 모습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처형은 형벌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십자가는 영광의 상징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십자가 목걸이, 십자가가 새겨진 반지가 유행입니다. 어떤 나라의 박물관에는 왕관에도, 명예로운 훈장에도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본래 십자가는 가장 무서운 형벌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영광스러운 의미로 바뀌어 졌습니다. 

각 나라마다 중한 죄를 지은 흉악범을 사형시키는 데에는 그 방법이 다양합니다. 옛날 우리나라에는 주로 사약을 내리거나, 교수형, 단두 형이 있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임금이 사약을 내릴 때 미쳐 사약이 준비되지 못했을 경우 무엇으로 사약을 대신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담배입니다. 담배 잎 삶은 물을 먹여 죽도록 했습니다. 담배 두 가피를 넣고 삶은 물을 토끼에게 먹이면 3분 안에 토끼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담배 두 갑을 넣고 삶은 물을 사람이 마시면 3분 안에 죽는 다고 합니다. 담배의 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습니다. 흡연을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17:2에“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 중동지방의 사형방법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형벌은 중죄인에게 내리는 것으로 장례식조차 하지 못하도록 시체를 깊은 바다에 던져버리는 무서운 처형법입니다. 

형벌 중에서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내리는 가장 무서운 형벌이 십자가형입니다. 그래서 잔인하기로 유명한 로마 군인들의 세계에서도 십자가만은 이야기하지 말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황제가 식사할 때에 누군가가 십자가 이야기를 했다가는 당장 끌어내어 매질을 할 정도로 십자가는 끔찍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광경을 한번 본 사람은 평생 잊혀지지 않는 악몽으로 기억될 정도로 참혹한 것이 십자가형입니다. 이 십자가형은 본래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나무에 매달아 놓고 죽이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신학적인 이유로, 땅은 본래 신성한 것인데 나쁜 죄인을 땅에다 놓고 죽이면 땅이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의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십자가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보다 더 모진 형벌은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공중에 매달린 시체는 치우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어서 새들이 뜯어 먹도록 했습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방법입니까?

이러한 십자가형을 로마 사람들이 도입하여 죄인들을 처형시킬 때 적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로마 안에서는 십자가형을 내린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로마인들에게는 절대로 십자가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의 노예나 식민지 사람들에게만 내리는 최고의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권을 소유했던 바울사도는 단두 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ㅡ. 예수님이 달려 죽으신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형가운데 가장 무섭고 잔인한 십자가의 형벌을 전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당하셨습니다. 노예나 식민지 사람들에게만 내려졌던 십자가 처형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당하셨습니다. 이것은 약소국가의 서러움까지 함께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죄인 자신이 메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죽을 곳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도 힘든 일인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역이 더해졌습니다.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은 두 죄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강도와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강도와 함께 못을 박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되 옷을 다 벗겼습니다. 그 수치스러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수난을 당하셔야만 했습니까? 그 이유에 대하여 이사야 53:4~6에 말씀하시기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죄 값을 대신한 고난이 곧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3:16말씀에는“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셨고 요한복음 1:12에는“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하면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영원한 멸망 즉 지옥에 처하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 값으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하나나을 섬기는 사람은 누구나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영혼과 육신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 모든 교회들이 예배시간마다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주후 4세기경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보다 더 앞서 있었던 니케아 신조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도 유럽 교회가운데 성탄절이나 부활절, 고난주간에 사도신경대신 니케아 신조를 고백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니케아 신조에 이러한 대목이 있습니다.“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그렇습니다. 
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소식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가리켜 복음(福音) 즉 복된 소식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어떠한 변화입니까? 자유입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8:32에 말씀하시기를“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셨습니다. 자유함을 주는 이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4:6에“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二. 진리가 주는 자유란 어떠한 것입니까?

1. 죄악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사람들이 범한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생명의 근원이 시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원수가 된 모든 인간들은 저주 아래 놓이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10~18에“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포악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자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 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타락의 결과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4절 말씀에“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되어 지옥의 형벌아래 놓인 것이 인간의 처지였습니다. 이러한 죄악과 영원한 저주로부터 자유를 주시고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신약성경 로마서 5장 10절에“우리가 원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 16절에 말씀하시기를“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2.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 은30에 팔리셨습니다(마태복음26:15~16). 은 30이란 당시 노예의 몸값이었습니다. 우주만물의 창조자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노예의 몸값으로 팔리셨습니다. 이로 인해 자유를 주는 진리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자유가 있게 되었습니다. 죄악으로부터 얻는 자유가 있고, 억압으로부터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는 노예제도가 사라졌습니다. 유럽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때 봉건제도가 무너졌습니다. 기독교에 의해 미국의 노예제도가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도 양반과 상민제도,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므로 말미암아 이러한 차별과 억압이 다 사라졌습니다. 
백여 년 전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와서 40년간 복음을 전한 아치볼드 캄벨이 당시 서울 장안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사람들이 여자를 천대하여 자기의 딸을 팔아먹고, 아내를 천대하여 거리에서 머리채를 끌고 다니고, 아내는 매를 맞고, 의사는 먹고 살기 위한 상술로 환자를 대하고 있으며, 문둥이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소경과 거지들이 거리에 우글대는 서울 장안이다.”라고 했습니다. 

백 년 전에 인신매매가 생겼고, 딸을 낳으면 엎어 놓아 죽여 버리고, 여자들은 밥상 위에 밥그릇을 올려놓고 먹지 못했고, 사회정의는 무너졌고, 격리되어야할 나환자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거지 떼가 다녀도 누구하나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던 사회, 이것이 어두움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암흑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캄벨의 글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와 같은 한국이 지금 변화를 받는데 그리스도의 빛이 비춰져서 그 땅에 밝은 빛이 비춰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고, 사람들의 생활이 변하고, 열매가 맺히고, 사회가 달라지고 있다.”라고 한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한 실례를 이렇게 들고 있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오인호라고 하는 한국 유학생이 공부를 하러 갔다. 청운의 꿈을 품은 유학생으로 갔다가 너무 고향이 그립고 가족이 그리워 저녁에 식사를 마치고 편지를 부치려고 우체국으로 갔다가 그 동네 불량배들에게 붙잡혀서 매를 맞아 죽고 말았다. 한국의 유학생이 죽은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의 가족들 부모님이 얼마나 원통했겠는가? 원통한 마음 한이 없지만 그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어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못다 한 일을 대신 하겠다고 부모들은 각오를 하고 장례식에 참여를 했다. 미국에서 장례식에 참여하는데 필라델피아 시장이 너무 미안해했다. 유학생이 그것도 맞아 죽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래서 여기저기서 성금을 모아 그 가족에게 위로금을 전했다. 이 가족들은 그 성금에다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더 보태서 재판소에 가있는 깡패들을 위한 변호사를 사서 그 깡패들을 용서해 달라고 청원을 했다. 그들을 감옥에 보내지 말고 기독교 학교에 입학을 시키고 그들이 대학을 다 마칠 때까지 장학금을 지불하고 그들의 장래를 보장해 달라는 탄원서를 내고, 모든 조의금을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돌려주는 미담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일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그 어둠의 나라에서 온 한국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빛이 원수까지 사랑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마침내 필라델피아 시민들이 이 소식을 신문을 통해 읽고, 감격해서 다시 성금을 보내오게 되었다. 이번에는 그 돈으로 오인호 기념관을 필라델피아에 세웠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필라델피아 한인교회가 최초로 설립되었고, 그 오인호 씨의 형님이 되는 목사님이 그곳에 가서 한인교회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빛이 비춰지게 되면 이러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사랑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은 사람의 마음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되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원수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가난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누리는 자유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말씀하시기를“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 생명록에 기록되고,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게 됩니다. 이러한 생명의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도 우리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지구상에 의식주(衣食住)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나라들은 모두가 기독교가 활성화되어 있는 나라들입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의 종주국은 모두가 그 이전에 기독교 국가들 이었습니다. 러시아가 그렇고 동유럽 나라들이 그렇습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 같이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가난으로부터 자유함을 주시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28장 1절~6절에 말씀하시기를“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그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넉넉하여 선한 일에 힘쓰며 보람되게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안에는 가난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습니다. 

4. 질병으로부터 자유가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3절에 기록하시기를“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우리의 건강을 약속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9:34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예수님이 운명하신 것을 보고 그의 죽음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니 물과 피가 나오더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때에 있어진 일에 대하여 로마의 전설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던 로마군인은 외눈 병사였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물과 피가 그 병사의 얼굴에 떨어져 그 병사의 한쪽 눈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그는 눈을 감고 생각하기를“내가 그를 찔러 나는 그와 원수가 되었는데 그의 몸에서 나온 물과 피가 분명히 나를 저주하여 내게 남아있는 한쪽 눈마저 멀어져 나는 이제 완전한 소경이 되겠구나.”하고 절망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조심스럽게 눈을 떠보았습니다. 그런데 소경이 아니고 눈이 뜨여졌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이미 시력을 잃고 멀었던 눈까지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창을 집어던지면서“나는 그를 찔러 저주하였는데 그의 몸에서 나온 물과 피는 나를 축복하여 내 감겼던 눈을 뜨게 하였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구세주라. 나는 그를 믿겠노라.”하고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도 병든 무리들을 긍휼히 보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문둥병자, 중풍병자, 귀머거리, 눈먼 소경, 앉은뱅이, 귀신 들린 자 등 각색병자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직접 치료하시지만 때로는 사람의 의술을 통해 치료하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치료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 현대의술을 처음으로 전한 사람은, 알렌 의료 선교사입니다. 그가 세운 병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 지금의 세브란스병원입니다. 
로제타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병원이 이화여대부속병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여자 의학 전문학교, 인천 간호대학, 인천 기독병원입니다. 이 로제타 선교사는 43년간 한국에 머물며 인술을 베풀었습니다. 미국은 그의 헌신적인 인술을 크게 인정하여 미국이 뽑은 200대 여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 홀도 어머니의 뒤를 이어 우리 라에서 의료선교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결핵협회를 창설했고, 크리스마스실을 만들어 그 수입으로 결핵환자들을 치료했고, 결핵퇴치에 앞장섰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종들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어디 있겠습니까? 

5.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근심걱정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두 다 무거운 짐을 지고 험한 나그네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향해 주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8절에 말씀하시기를“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셨습니다. 또 빌립보서 4장 6절~7절에 말씀하시기를“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는, 자신이 어려울 때 능력 있는 아버지께 도움을 구할 자격이 있고, 아버지는 자녀를 도울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과 자녀된 성도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되 효자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참된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진실한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자녀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 자유가 있습니다.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이 귀한 하나님의 풍성히 받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