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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나는 너를 사랑한다 (마 26:4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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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사랑한다 (마 26:47~56)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웃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가 바로 그렇습니다. 물론 같은 친구라 해도 아주 가까운 친구도 있고 좀 거리감이 있는 친구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거리감이 있다고 해도 친구라고 할 때는 그만큼 가깝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가까운 것이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흔히 죽고 못 산다는 말을 하지만 친구 사이가 바로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가족보다도 친구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어서 그것이 가정의 불평거리로 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그런 친구 사이의 사랑을 우정이라고 합니다. 우정이 돈독하다는 말을 하거니와 친구를 위해서는 물 불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친구가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구와는 아무런 마음 아픈 일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친구 사이에도 서로 원수처럼 으르렁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어울려 다닙니다. 그건 친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토록 가까운 친구가 등을 돌린다면 그처럼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숨 가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는 유월절을 맞이하기 위해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십니다. 그때 온 예루살렘이 떠들썩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라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으며 따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용히 사람들을 가르치다가 베다니로 물러가시곤 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가르침이 절정에 달하는 것이 마지막 만찬을 드시기 위해서 열 두 제자와 함께 한 다락방입니다. 이 다락방에서의 가르침을 다락방 강화 또는 누상보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마치 유언처럼 주신 이 말씀이 정말 주옥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가운데 핵심이 바로 친구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겠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 나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하지만 과연 제자들이 그런 친구라는 말을 듣기에 합당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렇다면 마지막 날 제자들이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하지만 너희들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나는 죽으면 죽었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강력하게 주장을 하였고 다른 제자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버릴 수가 있어요? 더군다나 자기들 생각에 예수님은 곧 왕위에 오르실 분인데 미쳤다고 예수님을 버려요? 그건 말도 안 되죠. 

하지만 단 한 사람은 예외죠.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팔기로 대제사장과 약속을 하고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말씀하시기를 “그 말 진심이니? 하지만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거야”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허리에 띠를 두르고 물을 떠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선생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베드로가 펄쩍 뛰죠. 하지만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시니까 그렇다면 “발만이 아니라 온 몸을 다 씻어 주십시오”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십니다. 

이윽고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다음 최후의 저녁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드십니다. 그때 “너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다”라고 하셨고 “그가 누굽니까? 납니까?” 라고 한 동안 떠들썩하다가 가룟 유다가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 나갑니다. 그리고는 그 밤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나가셨다가 그 자리에 유다가 이끌고 찾아온 군병들에게 예수님이 붙잡히십니다. 그리고는 밤새 심문을 받고 다음날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고 결국 채찍에 맞고 가시로 엮어 만든 왕관을 쓰신 채 피투성이가 되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십니다. 이 숨 가쁜 시간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가로 은 이십 개를 받고 예수님을 팔아먹었고 다른 제자들은 다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 도망쳐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칼을 빼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과 대결하기도 했지만 “칼을 치우라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씀에 칼을 내던지고 도망쳤다가 붙잡히신 예수님을 멀찌감치 좇아 가야바의 집까지 따라 들어갔다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마가의 다락방에서뿐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예수님은 친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도 군병들과 서로 약속하기를 “내가 입 맞추며 인사하는 사람이 예수니 그를 잡으라”고 하고는 군병들과 함께 와서 예수에게 입 맞추며 “선생님 평안하십니까?” 하고 인사하는 가룟 유다를 향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지금 자기를 팔아먹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건 제자가 아니라 원수도 이런 원수가 없습니다. 뻔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발을 씻기실 때도 시치미를 뚝 땄습니다.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는 예수님의 눈길을 외면한 채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도망쳐 나갔습니다. 그랬던 그가 뻔뻔하게도 예수님에게 입 맞추며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사가 바로 “이 사람이 예수니 잡으라”는 신호였다는 것입니다. 그걸 잘 알고 계신 주님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유다를 향해 친구라고 하십니다. 너는 나를 팔지만 나는 그런 너를 위해서까지 목숨을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도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라는 뜻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애절하게 친구라고 하셨던 그 제자들이 이토록 예수님을 팔아먹고 또 예수님을 버리고 다 도망쳤으며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정말로 그들만큼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데 왜 예수님을 팔아먹고 또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쳐 버리느냐고요? 
먼저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순간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아니 자기들의 무능함 때문이기도 합니다. 갑자기 몰려든 군병들 앞에서 예수님을 지켜보려고 했지만 그들만의 힘으로는 그것도 베드로 한 사람 외에는 아무 무기라고 할 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군병들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 예수님이 잡히시는 순간 자기들의 무기력함에 절망한 나머지 자기들도 모르게 그 자리를 피했던 것입니다. 그땐 무슨 정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선은 그 자리를 피하고 보자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붙잡히고 말거야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누가 뭐래도 자기들은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도망갔냐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건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들로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이제 왕위에 오르는 것은 분명한 일이요 그러면 그 장관 한 자리는 맡아 놓은 당상이라는 생각으로 꽉 차 있다가 예수님이 군병들에게 붙잡히시니 순간적으로 당황했을 뿐입니다. 이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혼란스러웠겠습니까? 정신없이 그 자리를 피했지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너무도 어이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들려오는 이야기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망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상황도 그렇지만 그 예수님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그런 마음의 아픔과 더불어 이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니 우리도 예수님처럼 잡혀서 죽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들이 저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다고 하는 사실에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건 아니었는데 너무 사랑했는데 그런데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래요 순식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습니다. 그건 그렇게 하리라고 작정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와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예수님에게 입 맞추는 순간 저놈이다 잡아라 하며 군병들이 몰려드는데 너무 당황해서 그 자리를 피해 도망치고 말았던 자기들의 모습이 정말 어이도 없고 역겹기도 합니다. 

이젠 누구도 마주 볼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들을 향해서 손가락질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머리를 쥐어뜯지만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앞날도 걱정입니다. 정말 깜깜합니다. 하나 앞날보다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나도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몸을 숨기고 있지만 그런 두려움보다 자기 자신에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러고도 네가 사람이니?”라고 누가 손가락질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너무 한심하고 기가 막혀서 눈물도 안 나옵니다. 나오느니 한숨뿐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나쁜 놈들이라고 나가죽으라고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사람이 돼서 그럴 수가 있냐고 하시겠습니까? 
아뇨. 

우리들 가운데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갑자기 차가 달려드는데 자기 한 몸 피하기 바쁘지 곁에 어린아이 하나 껴안고 뒹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래 눈앞에서 아이가 다치고 죽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것 때문에 가슴을 치며 후회하지만 그건 사실 불가항력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움찔 하면서 혼자 피했던 것은 어쩌면 본능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누가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입장은 다르지만 누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뜻 그 사람을 위해서 보증을 서 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것도 그 사람이 갚을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보증 섰다간 열이면 열 내 재산도 다 날릴 판입니다. 그런데도 선뜻 보증을 서줄 수 있겠습니까? 그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도 같이 망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건 앞으로 재어보고 뒤로 재어봐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과는 뻔합니다. 그럴 때 누가 나서서 그를 도울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우리는 참으로 힘든 시간들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우리들 자신도 그렇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으로 겪는 가정도 있습니다. 이런 저런 사고나 집안의 우환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교회도 알게 모르게 어수선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힘들어 하는 성도들을 보면서 제 마음도 얼마나 아픈지 모릅니다. 이건 다 내가 부족해서이구나. 아직도 내가 죽지 못하고 살아있기 때문이로구나. 내 잘난 맛에 살았기 때문이로구나. 사실 다 목사님 때문이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내 스스로 봐도 너무도 무능합니다. 누군 말합니다. 말씀이 좋다고요? 하지만 그건 예수님을 따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예수님과 3년 반 동안 함께 먹고 마시며 활동하며 배웠던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버리는데 제가 그런 예수님과 비교나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을 그토록 듣고 배웠으면서도 제자들이 흔들리는데 제 설교야 이건 아니죠. 그럼 능력은 어떻습니까? 그토록 많은 능력과 기적을 보았는데도 사람들의 마음이 순간적으로 변하는데 제게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그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자비에 의지해서 기도할 뿐입니다. 누가 나를 비난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반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무관심은 증오보다 더 나쁩니다. 하지만 증오는 사랑의 반증이기에 누가 나를 미워하고 비난한다는 것은 오히려 고마울 따름입니다. 시련의 날이 지나면 광명의 햇빛이 밝게 비칠 것이요 비가 오고 난 다음에는 땅이 더 다져지기 때문입니다. 
그럼 가룟 유다는 어떻습니까? 과연 가룟 유다가 그토록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예수님을 팔아먹었기 때문입니까? 

사실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지나칠까요? 아뇨 어쩌면 예수님을 제일 사랑했던 사람이 바로 유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니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팔아먹느냐고요? 그건 사랑하는 만큼 실망도 컸기 때문입니다. 그는 열심당원이었습니다. 그냥 로마를 다 뒤엎어 버리고 나라를 새롭게 세우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랐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로서는 예수님에게서 그 희망을 보았습니다. 이젠 예수님이 마음먹기만 하면 로마를 몰아내고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리 봐도 그럴 마음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장로들과 등지는 일만 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그는 다시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지만 그러나 이런 상태로 예수님이 그냥 계신다면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꿈은 이루어질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 예수가 없어져야 새로운 메시야가 빨리 오실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그렇다면 그 예수를 나라도 팔 수 밖에 없어. 이건 신념의 차이입니다. 신념이 다른 겁니다. 그러다 보니 추구하는 방향도 달라요. 같은 길을 가도 빠른 길로 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멀기는 해도 안전한 길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유다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어요. 유다만큼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그는 예수를 돈을 받고 팔았으니 더 나쁜 놈이라고요? 아니요. 그는 예수님을 정말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백성들을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했고 안타까워했던 사람입니다. 그랬기에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 한 옥합을 부어드릴 때도 그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더 좋지 않으냐고 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 나라와 자기 백성을 사랑했던 뜨거운 마음의 사람입니다.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서 자기 목숨 하나 버리는 것은 언제나 각오가 되어 있었던 열심당원이었기에 더욱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유다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과는 너무도 달랐기에 그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이 자기의 마음을 돌이키시고자 물로 발을 씻어주실 때도 모른 척 했습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실 때도 시치미를 뚝 땠습니다. 그리고 능청스럽게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하며 군병들을 끌고 와 예수님에게 입 맞추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했지만 그보다는 더 나라를 사랑했습니다. 자기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결단하고 예수를 팔았던 것입니다. 

결코 미워서가 아닙니다. 단 하나 아쉬운 것은 그가 그랬던 자신의 행동이 더 큰 잘못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가 하루만 더 참았더라면 그렇게 성급하게 목숨을 끊지만 않았다면 아마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처럼 유다에게도 물으셨을 겁니다. 그러면 유다 역시 대답했겠죠. 그렇다고 누구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더 나라를 사랑했다고. 그래 이제부터는 내 양을 치라고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이 용서와 회복으로 일컬어지는 은혜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곧 인내입니다. 우리가 흔히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참지. 그 조금이 문제입니다. 그것도 못 참느냐고 하지만 그 사람으로서는 많이 참은 것입니다. 그 사람의 한계는 거기까지입니다. 그러니 나무라지 마십시오. 단지 그런 그에게 옆에서 힘이 되어줄 수 있다면 위로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런 그 사람을 비난하기보다는 이해해 줄 수 있다면 토론하려고 하지 말고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래 그 마음 나도 알 수 있겠어” 하고 공감만 해 줄 수 있다면 조금 더 견딜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렇겠다” 하고 그냥 다른 말 하지 말고 옆에서 그 자리를 지켜줄 수 있는 이것이야 말로 참 사랑의 표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윽고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물으실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자신 있게 대답할 것입니다. 부끄럽기는 해도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만은 자신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베드로나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던 다른 제자들 심지어는 예수님을 팔아먹은 유다만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들보다 더 겁쟁이일 수 있습니다. 더 쉽게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아직도 세상이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저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욕하면 나도 함께 거들어주고 덩달아 더 부추기기도 하고 누가 나보다 더 사랑 받는다 싶으면 나도 저렇게 사랑받도록 살아야지 하기보다는 그것 때문에 속상해하고 그렇게 다른 사람만 더 사랑하는 그 사람이 밉게 느껴지는 것 그거 이상한 일 아닙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더 이상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왜요? 우리는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친구.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 하십니다. 그리고 친구인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친구인 너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보고도 친구를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친구를 위해 죽을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예수님으로부터 사랑하는 친구야 라는 말을 듣기에 합당한 사람입니까?

우리는 내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만 가지고 판단하고 내 생각대로만 선악 간에 판단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다 진실일까요? 내 눈에 보인다고 그것이 다 진실일까요? 나는 도와주려고 하는 일인데 보는 사람에게는 해치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설날 아이가 세배를 하면 어른들이 세뱃돈을 주십니다. 그러면 엄마가 아이에게 말합니다. 엄마한테 맡겨. 그럼 엄마가 그거 아이에게 뺏기 위해서 그러는 겁니까 아니면 정말로 잘 보관하고 있다가 아이가 필요할 때 내주려고 하는 겁니까? 누구는 둘 다 다라고 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정답은 없습니다. 엄마가 말하는 대로 그대로 그냥 믿어주면 되는 겁니다. 아이 입장에서도 선뜻 여기 있어요 하고 맡기는 아이가 있고 싫어 하고 뒤로 감추는 아이도 있어요. 그 둘 다 옳습니다. 나름대로 자기 생각이 아이에게도 있어요. 그래서 생각에 따라 맡기기도 하고 싫다고 하기도 하는 겁니다. 그거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할 이유가 없어요. 

이제 우리는 한 가지만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예수님의 제자들 가룟 유다와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너무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자기들의 말처럼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도망쳤지만 그러나 다시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들 모두가 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단 한 사람 주님이 다시 찾을 기회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던 유다만 빼놓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도망치지 마십시오. 아니 다른 데로는 다 도망쳐도 좋습니다. 하지만 목숨만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그러면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아니 주님이 찾아주십니다. 그리고 회복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말씀합니다. 친구야 친구야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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